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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요한 성실이 Jun 17. 2024

대한민국 : (물부족) 국가의 탄생(3)

제1회 물의 날의 미스터리 

1989년 월드워치"물부족" 보고서와 한국 


세계적인 환경연구소 월드워치는, 1990년대를 목전에 두고, 이집트, 중국, 인도등의 인구대국에서, 향후 10년간  대규모 "물부족"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는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1989년 12월 10일 LA 타임스의 보도 

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1989-12-10-mn-471-story.html


중국에서는 베이징 지하의 지하수면이 연간 2미터씩 낮아지고 있으며 중국의 건조한 지역의 농부들은 중요한 도시 및 산업 수요로 인해 관개용수의 30~40%를 잃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도에서는 이미 수천 개의 마을이 물 부족 현상에 직면해 있으며, 뉴델리 수도권의 많은 지역에는 하루에 몇 시간만 물이 공급되는 반면, 멕시코시티 주변에서는 지하수 고갈로 인해 땅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요르단, 서안 지구에서는 하천, 대수층, 강수량에 의해 재생되는 기타 모든 물 공급원이 1995년까지 사용될 예정이며 "부족이 임박했습니다"라고 Postel은 말했습니다.



 


1989년 월드워치 보고서는,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찾아봤더니, 경향에서만 보도했습니다. 

1989년 기사 중 "물부족" 키워드 연관성으로  첫 번째 기사입니다.  5면 사회면 맨 아랫단,  "해외토픽"으로 작게 아주 작게 실렸습니다. 



1989년 12월 11일 경향신문 


   

1989년 12월 11일 경향신문 5면 사회면 해외토픽 




반면, "물부족" 연관 검색어 순위 두 번째 기사인,  조선일보의 안동지방에 새로 건설되는 임하댐에 50km의 수로를 추가로 건설하여 대구 금호랑의 수량을 확보하자는 내용의 기사. 굉장히 큰 지면을 차지하는 기획기사입니다.  




水量(수량) 부족  

1989.09.09 조선일보 17면 사회

水量(수량) 부족 금호江(강) "臨河(임하) 댐물 끌어와 되살리자" 폭 3m導水路(도수로) 50㎞(㎞) 건설 浦鉄(포철) 용수공급‥‥河床(하상)... 수량부족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금호강을 되살리려는 계획이 본격추...

임하댐-금호강 도수로 공사는 이후에  추진하여, 완공되었습니다.  환경단체와 많은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며, 도수로가 환경 영향에 대해서는 정 반대의 평가로 논쟁을 빚기도 했습니다.  



3위는 한겨레의 기사입니다.   

가뭄 피해를 입은 농촌 현장취재에 거의 한 면의 절반을 할애했습니다. 논에 물을 못 대 비관 자살한 농민에 대한 기사입니다. 생각해보면, 80년대에는 도시에도 단수 같은 문제도 종종 있었던 기억입니다.    


하늘만 쳐다보며 발'동동'애타는 농민  

1989.06.04 한겨레 5 면사회기사(뉴스)(창간 1달여 뒤) 

물 못 대자 비관 자살까지 중앙기상대는 6일 전국적으로 한차례 비가 오고 장마가 시작되는 23일(남부지방), 27일(중부지방) 전에 3~4일... 이곳 농민 김춘식(30·시미리 389)씨는 “산간지역 논에 물을 대지...




결국, 당시에는 "물문제" 자체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던 시기이며, 

  가뭄 피해에 직격피해를 입는 농민들과 수자원 개발(댐)과 연관된 토목사업 업자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낙동강 페놀유출 사태 

 1991년 3월 18일 수돗물에서 악취가 난다는 대구지역 주민들의 신고로 조사에 나선 경찰 당국이 악취의 원인이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 폐수를 방류한 전자업체 때문인 것으로 밝혀냅니다.  

1991년 3월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https://www.youtube.com/watch?v=9vzgSOhg4pw


1991년 3월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습니다.

일본에서 미나마타 병과, 이타이 이타이 병이 그랬듯,  깨끗한 물에 대한 관심,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폐수를 방류한 기업과 폐수방류를 막지 못한, 당시 제도 문제가 큰 것 같은데, 당시 산업화 시대를 거쳐오신 기성세대분들은,  이 상황을 절대 패배주의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가지 않았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오히려 문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기존에 없었던, 정수기, 생수 시장이 형성되고 깨끗한 물을 만들자는 운동이 벌어집니다. 





세계 최초(?) 물의 날 탄생 


그때는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었습니다. 

두산전자 관계자가 구속된 것이 3월 22일, 관련 공무원들이 구속된 것인 3월 23일인데, 민자당에서 파견된 오염조사단이 수질오염 실태조사에 나선 것이 같은 날인 3월 23일입니다. 

백문이 불여 일견,   백견이 물여 일식(?), 음식은 먹어보는 게, 물은 마셔 보는 게 제일인가 봅니다.  수원지 물을 한 컵 씩 마셔보는 민자당 의원들.  


3월 23일 민자당 의원들 수원지 물 시식회가 열립니다.


그리고 잽싸게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을 까요? 4월 7일  "물의 날"이라는 기념일 제정을 추진한 공무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었다면, 될 법할 일인가 싶긴 한데요.  

수자원 오염의 80%가 생활하 수 때문이랍니다. 

아.. 그래서 예전에, 샴푸 절약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환경보호는 중요하죠... 


정부는 대구지역 상수도의 페놀오염사건을 계기로 수자원보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올해부터 「물의 날」을 제정키로 했다.

『특히 수자원의 경우 오염원의 80% 이상이 생활하수등이어서 국민적 협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에 따라오는 15일 건설부와 총무처 등 관계부처 간 협의를 거친 뒤 20일께 환경주무부처인 환경처의 최종 검토를 거쳐 국무회의에서 「물의 날」 제정안을 의결키로 했다.

정부는 또 「물의 날」 제정에 맞춰 샴푸사용 안 하기, 합성세제 적게 쓰기, 정화조 청소 자주 하기, 식용유 하수구에 안 버리기 등 수자원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생활수칙도 마련, 공직자 등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과 함께 대 국민 홍보활동도 적극적으로 벌여나가기로 했다.

<기사내용>

정부는 이와 함께 「물의 날」이 공식으로 제정되면 환경처 주관으로 기념식을 갖고 수자원보호 유공자를 포상하며 정부 및 민간단체 등이 주관하는 학술세미나도 열어 국민적인 경각심을 계속 유지토록 노력키로 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50285


그런데 평범한 기사내용을  두 번 세 번 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행사는 환경부에서 주관하는데,  건설부와 총무처에서 15일에 관계부처 협의를 합니다. 환경부는 20일에 최종검토만 하면 되니. 

게다가 물의 날 "행사 포상"은 환경 관련 유공자가 아닌 "수자원" 보호 유공자.

게다가 애초에 기사가 이상합니다. 이 기사의 취재원은 "정부의 한 관계자"입니다. 어떤 회의 석상에서 나온 논의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수자원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추진력이 강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수자원공사 이태교 사장 

아마도,  물의 날의 아이디어를  한국수자원공사 측에서 건설부에 제공해서 추진했을 것입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제1회 "물의 날" 전후로 환경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수자원에 관련된 보도가 신문 지상에 많이 등장합니다. 


1991년 7월 5일 동아일보의 보도 식수도 공업용 수도 부족하다는 보도

1991년 7월 5일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0년 11월 9일 조선일보 기사, 타임지를 인요하며,  전 세계적 물 부족에 대한 보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대중들의 물에 대한 관심은커녕 환경오염에 대한 개념마저 모호하던 시기에  

수자원공사가 의도한 것은 당시에 페놀 사건으로  갑자기 국민들에게 생긴 식수안전에 대한 관심을 물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시키는 것.  

 그 방향성을  수자원 공사에 대한 우호적인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것  

"물의 날"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991년 7월 6일 매일경제 인터뷰 




32년 전에는 그냥 끄덕끄덕했을 텐데, 지금에 와서 봤을 때는 거슬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인터뷰의 가장 큰 문제는, 행사의 개최 명분이었던 "환경"은 온 데 간데없고, 목적 자체가  "수자원 보호"가 되어버린 데다가.  결국 그나마도  가정, 회사등에 범 수질 보호 "운동"을 펼치는 게 전부입니다. 

제도적으로 폐수배출이나  유해물질 사용을 제한할 방법이 없던 때이니, 아무리 좋게 봐줘도 "수자원 보호" 방법은 "캠페인" 밖에 없었어요.  

결국 하고 싶은 본심은 마지막 줄입니다.  

"급증하는 수요에 대비, 다목적댐, 중소규모댐 등을 시범적으로 개발, 용수공급량을 늘려나가겠습니다. " 


이것이 「물의 날」을 제정 추진하면서  실제로 내고 싶었던 목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회 물의 날 미스터리 


그런데, 위 1991년  7월 6일 매경  인터뷰와 7월 5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7월 1일에 제2회  "물의 날"이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제1회 물의 날은 언제 개최된 것일까요?    

원래는 7월 1일에 제1회가 개최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게다가,  물의 날 제정을 알린 4월 신문 기사는 많지만, 정작 물의 날 개최를 알린 기사는 7월 2일의 매경 기사가 유일합니다.(제가 찾은 바로는) 그것도 7월 2일에 대청댐에서 간단한 시상식만 가졌습니다. 장관등 참석자 이름도 없습니다. 지역 주민만 언급될 뿐. (1991년 7월 1일은 월요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2년에는 7월 1일 코엑스에서 당당하게 제3회 물의 날 기념식을 갖습니다.  

건설부 장관과 500명의 내빈이 자리를 빛냈습니다.  


그렇다면, 왜 1991년 물의 날은 왜 대청댐에서 조촐하게, 치러진 것일까요? 

첫 물의날인데 왜 2회로... 


정확한 사정이야 제가 알 수는 없고,

다만 추측할 뿐입니다. 


수자원공사에서 비공개로  제1회 "물의 날"을 개최한 적이 있던 것이 아니라면 

낙동강 페놀사건 때문에 부랴 부랴 물의 날을 개최하는 것은 영 모양 빠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단, 물의 날은 진행하기로 중앙부처와는 합의가 되었으니. 

그래서, 일단 2회로 약식으로 진행을 하고 나서 

행사가 끝나고 보도를 더 많이 내보내는거죠.   


왜 이렇게 되었을까? 누구의 눈치를 봤던걸까? 


저는 1991년 4월 9일 조선일보 "만물상"에서 힌트를 찾습니다. 

정부의 한 관계자 발로, "물의 날" 제정 계획이 보도된 그 다음 날입니다. 

아마도 조선일보에서는 기자출신 이태교 사장의 꼼수를 간파한 듯 합니다.  



그런데, 같은해인  1992년 11월,   유엔에서도 세계 물의 날을 제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물의 날의 제정 취지는 수자원공사가  세계 최초(?)의 "물의 날" 처럼 댐 건설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유엔의 세계 물의 날은 정말로 세계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무려 30년 동안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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