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집요하게 따라가 본 오펜하이머의 빌런 이야기
개봉 당시엔
"극장에서 꼭 볼 필요는 없다"는 리뷰를 보고
넷플릭스로 공개된 후에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극장에 가서 봤어도 좋았었겠구나 "
생각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 그런가?
놀란이 이런 영화도 만드는구나'
흑백과 컬러의 시점 구분을 둔 것을 제외하면
놀란 특유의 기술도 자제한 느낌이었습니다
영화 게시판에 감상문을 남긴 후에
오히려 원작 도서"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 궁금증이 생겨서
결국 원작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한도전에서 하하가 읽었던 바로 그 책
영화와 책을 비교한 요약문을 위키나 블로그에서 찾았다면, 책 안 읽어도 되었을 텐데....
그래도, 10여 년 전에 나왔던 베개와 같은 양장본이 아닌 페이퍼백이 "특별판"이란 이름로 발간되었더군요.
도서관에서 빌려 후루룩 날림으로 읽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원작이 궁금했던 점은
1954년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1958년 스트로스 장관(로다쥬) 청문회 사이에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입니다.
1954년 오펜하이머가 보안 심사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사건 이후 핵물리학자들 사이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길래, 4년 후인 1958년 스트로스 장관(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청문회에서는
오펜하이머를 옹호하고 스트로스를 비토하는 분위기로 과학자들 사이에 분위기가 형성된 것인가?
영화에서는 4년 동안의 사회의 변화나 핵물리학계의 역학관계 변화에 대해서 직접 묘사하지 않고
흑백으로 연출되는 스트로스 청문회의 분위기 변화로만 보여줬습니다.
시작 전에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던
장관 청문회 분위기는 점점 녹록지 않아 지더니
오펜하이머가 언급되기 시작하고 점점 분위기가 전환
(이것은 오펜하이머 보안 청문회 때와 대구를 이룹니다.)
결국 결정적인 증언을 통해서 스트로스는 청문회에서 낙마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작을 보니, 아예 스트로스 청문회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책에서는 오펜하이머라는 인간에 집중합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는, 1954년의 보안 심사과정의 묘사도 좀 더 복잡하고,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실각 그 이후의 오펜하이머의 행보에 집중합니다. 스트로스의 행적이나 다른 사람의 행적은 그다지 다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펜하이머의 명예회복은 매카시 열풍이 사라지고 케네디 정부가 들어설 즈음인 60년대 전후에 서서히 이루어진 것으로 간단히 한 두줄 묘사됩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제목처럼 , 책 전체가 오펜하이머를 마치 프로메테우스라는 신화 속 존재에 투영시켰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프로메테우스의 서사와 유사하다는 느낌입니다.
로스 알라모스를 만들고 원자탄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상승 부라면 원폭 이후 인간적으로 고뇌하며 수소탄 개발과 현장 일선에 물러서 있다가 결국 보안청문회를 통해 수모를 당하고 추락하는 후반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책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형벌을 연상시키기 위해서일까요? , 오펜하이머의 사후 그의 남겨진 가족들의 행복하지 못한 삶을 묘사합니다. 책에 따르면 오펜하이머의 아들은 오펜하이머라는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고 하고, 가장 불쌍한 딸 토니는 아버지와 가족들과 한때 함께 머무르던 버진아일랜드의 별장에서 1977년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오펜하이머(~1967)와 키티 오펜하이머(~1972) 둘 다 별장이 있던 섬 부근 바다에 유골을 뿌렸음)
결국 영화 '오펜하이머' 제목이 원작과 다른 이유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에 대한 원작과 다른 독자적인 해석이 담겨있기 때문이고,
스트로스 시점 부분을 흑백으로 처리한 것도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 "오펜하이머"를 구성하면서
몇 가지 대응 구도를 보이는데.
수소폭탄 찬성(스트로스 + 텔러) VS 수소폭탄 반대(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 & 보안 청문회 VS 스트로스 & 인사청문회
전자의 경우는 실재하던 대응이자 외부에도 두드러진 갈등이라면
후자는 원작 소설에는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을 바탕으로 놀란의 추가 조사를 바탕으로 쓰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안이 놀란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당시 오펜하이머 박사의 실각(?)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신문에도 1면에 크게 보도될 정도였으니까요.
1954년 4월 16일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오"박사는 널리 알려진 국제 명사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도 우리나라 언론에 이 실각이 매카시 의원의 매카시즘에 의한 생사람 잡는 게 아니냐는 뉘앙스가 보일 정도 이니까요. ( "매카시" 글씨가 더 크기도 하고..)
흥미로운 것은
1958년 11월 루이스 스트로스의 장관 임명 또한 한국 신문기사에 나왔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스트로스"를 상무장관에 지명한 것이 1958년 11월
임명, 취임선서를 한 것이 우리나라 언론에도 보도됩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59년 6월 20일 그의 임명이 의회의 동의안 부결로 철회된 것 또한 임명기사의 크기보다는 작은 기사입니다만, 우리나라 신문 지면에 보도됩니다.
1959년 당시 신문 열독자들은 이 인사청문회를 보고 4년 전 오펜하이머 청문회와의 연관성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나비효과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기사상으로는 물론 오펜하이머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이날 청문회는 미국정치사에 굉장히 기록으로 남은 사건이라고 합니다.
영화에서도 언급이 되듯, 이 전까지 인사 청문회에서 장관 후보자가 낙마한 사례가 없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잠깐동안의 청문회 장면이 비춰졌지만
청문회는 1959년 3월 17일부터 5월 14일까지 무려 두 달의 기간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청문회 원문 기록자료를 구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n0a7jG7KlN8C&printsec=copyright&redir_esc=y#v=onepage&q&f=false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다 읽어볼 수 조차 없는 분량이라,
대략 훑어만 보는 것도 버거워서... 오펜하이머의 언급 부분만 살펴봤는데
약 45회가 언급되었으며 대부분 700페이지대의 힐박사(레미 말렉 분)의 인터뷰입니다.
이 인사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 박사의 보안 심사 부적격 판정에 대한 스트로스의 부적절한 조치에 대한 지적이 나온 것은 분명 하나, 그것이 이 청문회의 핵심은 아닙니다. 오펜하이머 관련 내용은 분량으로 따지면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 의회 홈페이지 자료에 나와있는 이 지명 거부에 대한 요약 기록을 번역했습니다.
전체적인 청문회의 내용은 주로 그가 AEC회장으로 재직하던 기간 동안의 냉전시대 원자력 에너지 정책의 공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는 하나 표결의 원인은 은 직전 선거의 구도의 영향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64:34에서.. 49:46이면?.... 좀 아리송 하긴 한데요...) 영화에서 언급한 대로... 케네디 그리고 린든 존슨 표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임명에서 낙방까지 무려 8개월이라는 시간이 소요가 된 것도 이례적인 것 같습니다. 정치적 힘겨루기 요소도 다분했던 것 같고요.
상원, 루이스 스트로스 지명 거부(미의회 홈페이지 글, 번역기 사용)
1959년 6월 19일
상원은 지난 2세기 동안 소수의 내각 후보자만을 공식적으로 거부했습니다. 1925년부터 1989년까지 64년 동안 단 한 번의 거부가 발생했습니다. 1959년 6월 19일에 일어났습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날을 "상원 역사상 두 번째로 부끄러운 날"이라고 불렀다. 앤드류 존슨 탄핵 재판에 이어 두 번째다. 타임지는 이를 "통렬한 개인적 뺨 때리기... 대통령 지명 확인을 둘러싼 미국 역사상 가장 쓰라린 싸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입법적 린칭인지 정치적 자살"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습니다.
아이젠하워가 1958년 중간선거 2주 전에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에게 상무장관 휴회 임명을 주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선거일에 공화당을 기다리고 있던 대격변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Strauss는 지난 4년 동안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은 특히 폭풍우였습니다. 한 번은 그는 뉴멕시코주 민주당 상원의원이자 원자력 에너지 합동위원회 위원장인 클린턴 앤더슨이 냉전 시대의 원자력 에너지 정책에 "무엇이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제한된 이해"를 갖고 있다고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앤더슨은 스트로스 그 발언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지만 백악관에 자신이 하급 상무장관 자리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958년 선거는 상원의 구성과 전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경제 불황, 백악관의 영향력 남용 스캔들, 소련의 우주 진출에 대한 우려로 인해 상원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의석 이동이 발생했습니다. 민주당은 공화당 의석 13석과 새로운 알래스카주에서 2석을 얻었습니다. 이를 합하면 민주당원은 64명, 공화당원은 34명이다.
1960년 선거가 가까워지자 민주당 의원들은 공화당 행정부에 명백히 반대할 수 있는 문제를 모색했습니다. Strauss 지명은 맞춤형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빠르게 신랄해진 인사 청문회에서 Strauss는 상원 의원에 대해 거만하고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적대적인 증인과 상원 의원을 반대 심문하기 위해 증인 테이블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의 지지자들을 화나게 하고 반대자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앤더슨은 이전의 불간섭 서약을 포기하고 상원 동료들에게 강력한 제독을 거부하도록 강력하게 로비했습니다.
1959년 6월 19일 자정 35분, 꽉 찬 상원 회의장에서 슈트라우스 후보는 찬성 46표, 반대 49표로 절벽 위의 호명투표에서 사망했습니다. 스트로스의 거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임기의 남은 18개월 동안 입법 교착 상태를 예고했습니다.
스트로스라는 인물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오펜하이머에 비해 전혀 족적을 남겼다고 보기 힘든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여러 관점에서 외형적으로는 오펜하이머의 보스였고
상무장관 후보까지 올라간 유력정치인 후보였습니다.
영화에서 그는 물리학자를 꿈꾸었으나 구두를 팔았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실제로, 그는 백만장자로, 물리학자도 아니면서 군대와 정치인맥으로 AEC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행정가에 가까웠겠죠. 그는 자기가 가진 부를 이용해,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가 소속되어 있던 프린스턴 연구소의 이사장이 되었고, 아이젠하워의 후원자로 원자력 분야 자문을 맡다가 1953년 아이젠 하워가 당선되자 AEC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처럼 "오펜하이머"가 스트로스 낙마의 극적인 결정타가 되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영화의 특성상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원작에 없는 실제 청문회 내용에서 오펜하이머가 언급된 장면을 모아서 극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Lewis_Strauss
심지어 59년 LIFE지의 스트로스의 낙마를 다룬 논평기사는 꽤 상세합니다만, 오펜하이머 이름의 언급은 없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두 달 이어진 청문회에 등장한 증인도 아니었고 , 청문회 기간 중 45번 언급된 사람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스트로스는 이렇게 내각 진출이 좌절됨으로써, 그동안 빌드업한 커리어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하며, 정계진출은 이후로 물 건너갔지만,
본업이 백만장자인지라... 프린스턴 연구소 이사장직을 계속 맡으면서, 오펜하이머의 사저 건축을 막는 등 소소한 복수를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보다, 8살 많은데. 더 오래 살았다고 하니,
누가 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3년 후인 1962년에는 자서전도 남겼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꽤 팔렸다고...
이 책에는 본인의 전쟁 때 업적과 함께, 자신의 청문회 낙마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여기에 AES의 사업 딕슨- 예이츠계약 사건과 , 오펜하이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자신이 복기했을 때에는 그 부분이 자신의 낙마의 두 가지 주요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https://content.time.com/time/subscriber/article/0,33009,827513-1,00.html
1949년 10월 라이프지 표지 (킬리언 머피 / 오펜하이머)
영화에서는 59년 스트로스 청문회의 힐박사의 증언으로 갑자기 여론이 뒤집히고 바로 뒤에 63년 페르미상을 받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명예 회복을 한 것처럼 보여줍니다.
원작 "A. 프로메테우스에서는" 극적인 사건은 언급되지 않고 1960년대쯤에 서서히 명예 회복이 되었다는 표현으로..
그렇다면, 실제로 1954년 보안 심사를 통과 못해 실패한 오펜하이머의 명예는 어떻게 회복이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 다른 이론을 찾았는데... 그럴싸합니다. (유튜브에서 본 다큐인데... 출처를 분실했네요..)
1955년 1월에 방송된 CBS의 방송 See it now라는 방송에 오펜하이머가 출연, 진행자 에드워드 머로우와의 대담이 방송된 이후에 오펜하이머에 대한 지지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것
https://www.youtube.com/watch?v=Zt5wQF8RUoU&t=482s
인터뷰 스크립트입니다.
https://famous-trials.com/oppenheimer/2694-edward-r-murrow-interviews-oppenheimer-see-it-now
OPPENHEIMER: 그리고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장 깊이 느끼고 지금 제 직업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의사소통의 진실성입니다. 비밀 유지의 문제는 그것이 과학을 방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나라에서는 그런 식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기술적인 것들은 정말 널리 알려져 있고 과학의 점점 더 첨단에 있는 것들은 실천과는 너무 거리가 멀 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아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그래야 합니다. 비밀 유지의 문제는 대중에게 참여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비밀 유지의 문제는 정부 자체가 전체 공동체, 국가 전체의 지혜와 자원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가능한 한 최고의 개요, 최고의 대중화, 기술적인 사항에 대한 최고의 중재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남성이 자신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 그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십시오. 자유롭고 손상되지 않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잡한 기술 세계에 사는 마음이자 자유의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이게 정말 비밀이어야만 하는가? "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건 좀 더 말해줄 수 없나요?" "우리는 정말 현명하게 행동하고 있나요?" 우리가 수다를 즐겨서가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위험을 인식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위험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대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로우: 글쎄요, 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직업뿐만 아니라 제 직업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OPPENHEIMER: 저는—그렇다고 확신합니다.
머로우: 사실 비밀은 별로 많지 않나요?
OPPENHEIMER: 자연의 세계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의도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때때로 남자는 자신이 피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비밀로 유지됩니다....
내용을 보면 선문답 같긴 합니다만, 오펜하이머 지적인 면모 유려한 말솜씨와 태도 등을 미국 국민들에게 보여주어, 오펜하이머가 어떤 사람인지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방송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TV가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에 가능했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전설적인 CBS의 방송이 제작 과정을 영화화하기도 했습니다
50년대 초부터 미국사회에 영향을 끼치던 매카시즘을
진정시킨 것도 이 See it now가 영향이 컸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는데,
오펜하이머를 통해서 어느 정도 느끼게 된 케이스인 것 같습니다.
"오펜하이머 보안 사건"은 어느 정도 매카시즘 끝물이기도 한 것 같고요.
워낙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매력적인 셀럽이기도 해서,
색깔 몰이가 힘들었던 이유가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것은
미디어가 발명된 시점 이후로부터는 미디어일 수밖에 없고..
TV가 발명된 이후에 그 파급효과는 대단하지 않았나 합니다.
엘비스가 등장하던 시점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