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P"란 무엇인가?
오후 두 시 반, 진료지원부서 팀장이 고객상담실 문을 급히 두드렸다.
"실장님, 큰일 났습니다."
얼굴에는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팀장이 내민 휴대폰 화면을 캡처한 종이에는 한 통의 문자메시지 내용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발신자는 80세 환자, 수신자는 20세 여성 실습생이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저녁에 만나자'라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환자가 실습생의 전화번호를 알게 된 것은 실습생이 직접 전화번호를 주었기 때문이다. 80세 할아버지가 20세 여대생의 전화번호를 딴 것이다. 실습생이 번호를 준 이유는 환자가 물어봐서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20세 실습생의 입장에서는 80세 할아버지 환자가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습생은 충격으로 병원에 출근하지 못했다. 팀장을 통해 확인한 실습생의 요구사항은 병원에서 가해자를 보지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가해자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이것저것 확인했다. 병원 변호사에게 해당상황에 대한 자문을 요청했다. 변호사는 명확한 답변을 주었다. 이는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2조 2항 '성매매알선 등 행위'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런 행위는 '보건복지부 지침'에 따라 '진료거부가 가능한 정당한 사유'에도 해당된다.
가해자 할아버지는 병원 옆 아파트의 대형평수에 살고 있었다. 병원이 서울의 중심지역에 있어서 아파트도 비싼 아파트다. 자식들은 출가시키고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정기 치료를 받으러 온 할아버지를 상담실에서 만났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고급 시계를 차고 있었다. 목소리도 적당히 힘이 있었고 분명하게 본인의 의사를 이야기했다.
실습생에게 보낸 문자 때문에 민원이 접수되었음을 설명하고 변호사 자문 결과를 설명했다.
"어르신, 이 행위는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2조 2항 '성매매알선등 행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보건복지부 지침'에 따라 '진료거부가 가능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되어 본원에서의 진료가 불가함을 설명드렸다.
가해자 할아버지는 문자를 발송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병원의 조치에도 동의했다. 따라서, 본원에 오지않고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것이 해당 법조항에 적용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이 문자를 보낸 것은 맞지만, 본인이 전화번호를 달라고했을때 실습생이 아주 빨리 자발적으로 번호를 줬다. 그리고 문자는 강제성이 없었고, 농담 비슷하게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여기는 법원이 아니니, 법위반 여부는 피해자의 고소가 들어오면 법정에서 다투시라고 안내했다. 본원 진료금지에 대해서 동의한 것으로 알고 다른 병원에서 치료받으시는 것으로 알겠다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할아버지가 다시 병원을 찾았다. 옮기려는 병원이 너무 멀어서 힘들다. 나이가 있어서 힘드니, 그냥 이 병원에서 진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소연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병원이 멀어서 힘들다고? 80세에 20세를 꼬시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뭔가 도전하고 싶어도 귀찮고 의욕부터 없어지는데 말이야.'
"어르신, 지금 그런 걸 힘들어 할 한가한 상황이 아니에요. 피해자가 고소하면 형사처벌 받을 확율이 높아요. 나이 80에 무슨 창피한 일이에요. 사회적으로도 매장될 것이고 자녀들 보기에도 부끄러우실 거에요. 피해자가 요구하는 일이니 감사하면서 수용하는게 좋치 않으시겠어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상담해 드리는 일이 형사처벌을 면하게 도와드리는 것임을 설명했다. 병원만 옮기면 조용히 넘어가려고 하는 피해자측을 자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고 했다.
가해자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병원을 옮기겠다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잘 상담해줘서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했다.
며칠 후, 오후 반휴를 내었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가해자 할아버지가 고맙다고 빵을 두 봉지나 사가지고 오셨다고 한다. 나는 맛있게 먹으라고 했는데, 다음 날 출근해보니 빵이 그대로 있었다. 열어보니 소보로빵, 단팥빵 추억의 빵들이었다. 원조교제 할아버지가 준 빵을 먹으면, 원조교제를 찬성하는 것일까? 그건 아니지만, 직원들은 법 위반 소지가 있을까 봐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책임질 테니 먹어요."
직원들과 함께 빵을 나누어 먹었다. 단팥빵은 달콤했고 소보로빵은 씁쓸했다.
이번 일로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명확한 근거라고 느꼈다. "어르신, 나이들어서 그러시면 안 돼요, 큰일나요."라고 하는 것과 "어르신, 이 행위는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대한 법률' 2조 2항에 해당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미치는 영향이 완전히 다르다. 이걸 전문용어로 EBP(근거기반실천)라고 한다. 근거를 제시하면 상대방을 더 쉽게 설득할 수 있다. 따라서, 상담 전에 내가 설명하고 설득할 말의 근거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후, 나는 일상생활에서도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지인들이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고 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다. 요즘은 상담전에 ChatGPT에게 물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80세 할아버지가 20세 실습생에게 원조교제를 제안하는 문자를 보내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니?"
이렇게 ChatGPT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EBP는 최선의 과학적 근거와 전문가의 임상적 전문성을 근거로 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실천하는 접근법이다. 의료분야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사회복지, 교육, 상담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 고객상담 업무에서도 감정이나 직감에만 의존하지 않고 명확한 법률적, 제도적 근거를 바탕으로 상담을 진행할 때 더욱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번 사건처럼 구체적인 법조항을 제시함으로써 상대방의 인식을 바꾸고 행동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