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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Jan 07. 2022

터져버린 순두부, 그 연약함

가장 연약한 부위가 드러나는 순간, 탈피

가장 연약한 나의 부위

허벅지 안쪽 살. 팔뚝과 옆구리가 만나는 부위의 살. 겨드랑이로 올라가는 팔의 윗부분 살. 마지막 갈비뼈가 끝나는 부분의 횡격막 살. 엉덩이가 허벅지와 만나기 바로 직전의 살. 턱뼈와 광대뼈 사이 턱에 더 가깝게 위치한 볼살. 잇몸과 입술사이의 선홍빛을 띠는 입안 쪽의 살. 그리고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그 경계의 살.


연약했다. 단단한 두부는 아니더라도 찌개용 두부 정도의 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각 잡힌 네모난 플라스틱 통에 들어가 있는 연두부도 되지 못했다. 용기에 가만히 담겨있을 수 없어 물컹, 넘쳐흘러버렸다. 나는 폴리에틸렌 비닐백에 겨우 담긴 순두부였다. 조금 날카로운 것에 찔리거나 부딪히면 내장이 터진 것처럼 가장 연약한 부위를 바깥에 내뿜어 버리는 순두부. 그 정도였다. 작은 자극에도 물컹물컹 울컥울컥, 양옆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곧 터져버리는 연약한 순두부로써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가장 연약해져 버린 상태. 나는 순두부다.


하얗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 역할을 하는 내 피부, 근육이 잘 생기지는 않지만 '얍'하면 근육의 형태는 보일 정도로 있던 나의 근육이, 세상의 험한 것들로부터 내 연약한 살을 지켜주던 나의 껍질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껍질이 사라져 버린 나는 적들의 공격에 한없이 상처받았다. 나를 찌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언제든 '푹'하고 찌를 수 있었다. 장난감 칼로 찌르든, 나뭇가지로 찌르든. 찌르기만 하면 적당한 염도가 섞인 액체를 뿜어낼 수 있었다. '푹'하고 찌르면 '주르륵' 하고 Nacl이 섞인 액체가 눈에서 흘러내려 턱끝에서 떨어졌다.


오, 사람들이여 당황해하지 말라. 가장 당황스러운 건 '찌개용두부'인 줄 알았으나 비닐백에 담긴 '순두부'일 테니. "왜 그러는 거야?"라는 물음 섞인 시선을 보내지 말라. 이미 내 안은 '물음표 살인마'가 내 뇌로 가는 혈관마다 자리하고 있으니.

'물음표 살인마'를 무찌르기 위해 바빠진 내 중추신경계들은 세로토닌을 만들 에너지가 없었고, 부족한 호르몬은 약봉지에 담겨 챙겨 먹어야 했다.


"거, 순두부 좀 터트리지 마시오."


가재는 지금의 몸집보다 더 커지기 위해서는 '탈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뾰족한 집게 가위로 열심히 적들과 싸우고서는 "아, 이 정도로는 쨉도 안 되겠군"이라는 생각이 들면 가장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는 탈피의 과정을 거쳐서 "쨉"을 키워야 한다. 그렇게 단단한 껍질을 스스로 벗게 되면 가장 연약한 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연약한 살을 가진 가재는 다른 가재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쉽고, 다른 생물체에 의해 상처받기도 쉽다. 그렇기에 안전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 탈피를 해야 한다. 그러나 탈피를 하지 않으면 가재는 더 이상 자라날 수 없다. 지금껏 어떻게든 적에게 버텼지만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탈피를 통해 더 큰 몸집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 생존해 나갈 수 있다.

가장 위험한 순간. 탈피이다.


내 신체는 포유류이나 내 마음은 갑각류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나는 '탈피'를 스스로 인지해서 해냈어야 했다. '쨉'이 안 되는 덩치를 가지고 세상에 덤벼댔으니 세상이 안 그래도 작은 나를 흠칫 두들겨 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인지하고 탈피의 과정을 겪었으면 좋았으려만,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안전한 곳으로 가지 못한 채 '탈피' 당해버리고 말았다. 연약해져 버렸다. 연약한 살들을 드러내버리게 되었다.


'탈피'를 당해버린 순간, 많은 것들에 스스로 두들겨 맞고 나니 안전한 공간으로 대피해야 했다. 이러다가는 터져버릴 순두부가 남아나질 않게될터였다. 나는 나에게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지금은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기능할 수 없는 상태임을 남에게도 알렸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곳, 나의 집으로 대피했다.


홀로 있는 자취방이지만 나의 집이었다. 내가 머물러있어도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내 안전공간이었다. 전화 벨소리, 전화받는 소리, 벌컥 문을 열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소리, 불쑥불쑥 나를 부르는 직장상사의 소리, 모두 다 우리 집에는 들어올 수가 없다. 안전한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나에게 먹일 건강한 요리들을 해서 날 먹이고 키웠다. 그렇게 안전한 공간에서 탈피를 진행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 이제 순두부 안해. 단단한 두부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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