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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Jan 26. 2022

SNL 주기자에게서 '나'를 보았다

신입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 줄 수 있잖아

 인스타그램에 SNL짤이 떴다. 바로 주기자 영상이다. 주현영 배우는 취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열정에 가득 찬 신입기자를 연기한다. 앵커의 부름에 당당하게 "젊은 패기로! 신속! 정확한! 뉴스를 전달한다"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대중에게 밝힌다. 그리고서는 자신 있게 자기 이름에 쉼표를 두며 한 템포씩 띄워 "안녕하세요! 주. 현. 영. 기자입니다" 라며 대답한다. 안영미 앵커가 뉴스에 대해 질문한다. 그러나 주기자는 앵커의 질문에 오히려 역질문을 하면서 관심을 유도한다. 흔한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발표하는 형식이다. 대중들에게 주제에 대한 질문을 하고 관심을 불러일으켜 키는 것이다. 그렇게 대중들에게 주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본 뉴스는 큰 알맹이가 없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마치 대단한 뉴스 인양 과도한 리액션을 하며 본인이 준비해 온 뉴스를 전달한다. 경력 많고 노련한 앵커는 본론의 핵심에 대해서 재 질문한다. 세밀한 근거를 요구하는 질문이었다. 주기자는 당황한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 그렇지만 질문에 대한 애티튜드를 지켜야 한다. 예상하지 못했을지라도 "일단은 좋은 질문? 지적? (시선이 불안정해지며) 감사합니다!" 라며 공식을 따른다. "일단은..." 하면서 답변을 계속 시도하지만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뉴스와 암기된 대본이 아닌 내용에 대해서는 대답할 능력이 없다. 목소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하고 얼굴 표정은 울먹거리면서 입꼬리는 삐죽하고 점점 내려간다. 사람들 앞에서 울음을 참으려 할 때 나오는 입꼬리이다. 앵커는 재차 질문하고 기자의 태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주기자는 자신의 의도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며 질문의 맥락을 알지 못하고 문장 그대로의 의미를 해석하여 대답한다. 점점 뉴스는 산으로 가고 주기자의 울먹거림은 심해진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을 남기며 도망치듯 화면에서 사라진다. 


 처음 이 영상이 떴을 때 mz세대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며 '대학교에서 조별과제를 발표하는 내 모습이다', '사회초년생이 발표할 때 나오는 모습', '아는척하고 싶으면서 모르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고, 전문적으로 보이고 싶지만 전문적일 수 없는 지식과 경력을 가진 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 또한 19금 관련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으로 보였던 snl이 주현영 배우의 디테일한 연기력으로 우리 세대를 현실 고증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감탄했다. 사실 그 짧은 영상을 보며 내 20대 초중반의 모습이 몇 시간 고운 사골처럼 진하고도 아주 빠르게 그 시절로 데려갔다. 주기자의 당찬 모습을 보며 대학교 때 많이 보던 발표수업이 생각났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마지막 멘트를 보며 신규 간호사로 일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면접 준비를 하며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아먹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며 속담을 서두에 넣어 자기소개를 했었다. 실제로 나는 아침형 인간이라 항상 일찍 일어났고, MBTI를 하면 매번 J가 나오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기에 억지로 자신감을 불어넣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던 자기소개의 첫 문장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간호사는 모두 새벽같이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하는데 일찍 일어나는 것은 누구나 다 해야만 하는 일이지,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말이 되지 못했다. 어느 면접장에서는 "일찍 일어나면 오히려 다른 포식자에게 더 일찍 잡아먹히지 않겠어요?"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좋은 지적? 딴지? 아무튼 감사합니다) 속담을 가지고 질문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제가 그 포식자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겠습니다."라며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면접위원들은 나의 당황함과 자신들의 말장난에 기분이 좋아져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고, 나도 긴장이 풀려서 더 잘 대답할 수 있었지만 참으로 재치 없는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첫 사회생활인 수술실에서 신규 간호사로 일을 할 때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었다. 수술실에서는 대학 4년 동안 배웠던 시간들이 무심하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새로 배워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수술기구들 이름과 수술 set 에 있는 기구들을 다 외우는 것, 마스크를 쓴 교수님들의 얼굴과 이름을 매칭 하는 것. 모두 다 생소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수술방을 준비하고, 수술 중에는 하나라도 더 배워야 다음에 혼나지 않을 수 있기에 내 눈동자는 수술 내용을 익히기에 바빴다. 수술 중 갑자기 필요한 기구를 가지러 기구장이 있는 곳으로 뛰어다니느라 몸도 매일 지쳐있었다. 매일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쳐있었고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해도 다음 날을 위해 책상에 앉아 수술 공부를 해야만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감정노동이었다. 수술은 연습이란 것이 없었다. 항상 실전이었다. 매번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를 봐야 하는 것이었기에 집도의, 마취의, 간호사 모두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보니 실수가 생겼다. 의사도 실수를 하고 간호사도 실수를 한다. 그것을 바로 잡아주며 팀워크로 일 해야 수술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실수를 바로잡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꼭 그렇게 소리치며 화내지 않아도 내 귀는 열려있고 다시 그 교수의 스타일대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은 처음부터 귀청 떨어지게끔 화를 내었다. 그렇게 화를 낼 때면 나는 더 몸이 굳어져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었고, 실수를 더 하게 되었다. 몇 개월 더 일을 하다 보니 이 사람이 정말 수술을 위해 화를 내는 것인지, 자기 분풀이로 화를 내는 것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괜히 자기 기분이 좋지 않아 화를 내는 교수들에게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수술이 잘 되기 위해 의사와 간호사가 협력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자신의 기분만을 내세우는 의사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이자 최대한의 공격은 '답답함'이었다. 그 순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내 일을 해내가면서 복종하는 태도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요하지 않았다.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았고 진심으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숨 한번 깊게 들이쉬고, 따박따박 말대답해줄 걸 이라는 후회가 든다. 내가 최선의 방어로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은, 화가 나서 말을 하게 되면 '울음'부터 나기 때문이었다. 말을 하는 순간 나는 울먹거릴 것이고 그런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약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더 우월감을 느끼고 강한 자로 굴림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가 차가운 수술방에서 견디며 지켜야 하는 마지막 선이었다. 자존심이었다. 이 선이 무너지는 순간, 내 선을 누군가 무자비하게 밟고 넘어오는 순간, 나는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매일 새벽마다 생각했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상사인 임수정이 신입직원에게 명품백을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20대는 돈이 없잖아요. 사회 초년생들이 왜 무리해서 명품백을 사는지 알아요? 가진 게 많을 땐 감춰야 하고, 가진 게 없을 땐 과장해야 하거든요. 이 사회가 그래요. 투쟁할 수 없으면 타협해요."


힘든 취업의 문을 열고 나와 새로운 사회에서 항상 긴장한 채로 매일을 견뎌내고 있는 우리들은 가진 게 없다. 내 회사의 시스템도 잘 모르고, 내가 하는 업무도 잘 모르고, 모를 땐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제 돈을 벌기 시작해 가진 것은 없다. 가진 경력도 없고, 가진 돈도 없고, 가진 능력도 없다. 비어있는 성긴 그물을 손바느질로 고쳐가며 촘촘히 다듬어야 한다. 그 시간동안 다른사람들이 내 선을 넘지 못하도록 무장할 수 있는 것들을 둘러야 한다. "젊은 패기로!" 라며 내세울 것은 '젊음'만이기에, 자신 있게 젊음을 외쳐돼야 한다. 


 SNL영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무리 패기 있게 준비해온 멘트를 한다 하더라도 노련미와 능력이 없는 신입은 경력직에게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사에게 깨지고, 선배에게 혼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유독 초짜에게 아주 매몰차다. "사회란 게 그래!"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다들 처음부터 경력직은 아녔을 텐데, 다들 초짜이고 뉴비이고 잼민이었을 텐데. 새로운 신입이 나타나면 마치 자기들은 안 그랬다는 것처럼 긴장된 어깨에 힘을 한껏 풀고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하며 "원래 그런 거야~"라는 시답지 않은 말을 한다. 신입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아무도 주기자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지 않고 그저 신입이 깨지는 상황을 보며 웃어대기만 하는 것인지, 주기자를 보며 내 사회초년생이 떠올랐던 나로서는 이 영상을 그저 유쾌하게 웃으면서 다음 클립을 누를 수만은 없었다.


다들 주 기자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줄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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