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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Jan 28. 2022

어쩔 수 없이 딸은 엄마를 닮는다

서른이 되어서 깨달은 가정환경의 중요성  

 내가 30년을 살면서 마주한 사람들 중에 가장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다. 난 오랫동안 엄마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의 세포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포가 아니다. 분명 이건 대책을 세우고 걱정을 해야 하는 중대한 일임에도 매사에 감사가 넘치고 웃음이 넘친다. 나로서는 걱정이 돼서 고심하며 잠못이루며 방법을 찾아내고, 그것도 불안하여 플랜 b를 세워도 모자랄 판에 엄마는 그저 "하하하" 하고 웃어넘긴다. 매일 엄마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핸드폰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대고, 엄마가 먼저 찾아가는 사람도 많다. 엄마랑 같이 있으면 항상 이야기가 넘치고 심심할 틈이 없다. 

 

 반면, 아빠는 엄마랑 정반대이다. 걱정이 많고 매사 부정적인 편이며 밖에 잘 돌아다니지 않는 집돌이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취미도 낚시이다. 낚시 가기 전날 밤에 낚싯대와 장비들을 정비하고선, 우리가 모두 자고 있는 새벽에 조용히 집을 나간다. 새벽 낚싯배를 타고 저 멀리 사람이 살지 않은 바위로 가득한 섬에서 두발을 딛고 있을 만한 단단한 바위를 찾아선 위태롭게 낚싯대를 던진다. 해를 막을 그늘조차 없는 망망대해 바다에서는 캡 모자를 써도 따가운 햇빛을 막을 수 없기에 항상 햇빛에 그을러 져서 집에 온다. 오후 늦게서야 낚시복으로 무장한 채 비린내 가득한 아이스박스를 들고 귀가해서는 묵묵히 잡아온 생선회를 떠주는 사람이 아빠다. 아빠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다녀와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서는 야심 차게 준비한 아재 개그로 집사님들을 까르르 웃길 때면 '한 건했다'라는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미소를 짓는다. 아빠는 쉬는 날에도 일찍 일어나지만 특별히 누군가를 만나 약속을 잡거나 밖에 나가기보다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편이다. 엄마가 무언가를 하자고 말하면 '근데 이건 이런 문제가 있어'라고 부정적인 면을 더 부각해서 바라본다.

 엄마랑 아빠는 성격이 참 다르다. 

 무슨 일을 하자고 하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빠와 우선 일을 저지르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엄마로 인해 몇 번씩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MBTI를 하면 분명 서로 맞는 게 하나도 없지 않을까? 엄마는 극 E 형일 테고 아빠는 극 I 일 것이다. 나는 E를 추구하는 I이다. 어떤 시기에는 E 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나는 I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빠와 같은 성격이었다.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밖에 나가는 것보다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엄마처럼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대부분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논술학원을 꾸준히 다녔었다. 논술학원에서는 매번 어떤 글을 읽고 나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가르쳤다. 마지막에는 항상 '위의 글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고를 서술하시오'였다. 저자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했고, 대부분 '이것은 이런 관점에서는 옳지 않다'로 귀결되었다. "A의 의견은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B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렇게 모든 의견에 다른 관점에서 보는 사고를 연습하다 보니, 모든 것에 'BUT,  하지만, 그러나'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그래서 나는 학창 시절 동안 어떤 사람의 의견에 대하여 '그렇지만 이거는 이런 문제가 있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는 논리력은 좋아졌겠지만 매번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고, '비판적인 태도는 항상 옳다'였기 때문에 아빠의 태도가 나에게는 '옳은 것'이었다. 이 태도는 사춘기가 되면서 요동치는 급격한 감정 변화와 맞물리면서 비판에서 좀 더 부정적으로 치우친 '비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 내가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인 언어를 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작은 것에도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또 작은 것에도 굉장히 기쁘고 즐거워서 친구들이랑 계속 웃고 다녔기 때문이다.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을 때지"라며 어른들은 나랑 친구들을 보면서 말할 정도였다. 그만큼 별일이 아닌 데에도 숨쉬기 어려울 만큼 꺼이꺼이 웃어댔다. 그래서 나는 비관적인지 몰랐다. 그렇지만 모든 사춘기 아이들이 그렇듯,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재밌게 웃고서는 가족들과는 잘 웃지 않았으니,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돼! 매사에 감사할게 얼마나 많니?" 하며 나를 걱정하는 듯 보이지만 엄마 특유의 밝은 톤으로 순화시켜 말했다. 아마 그때 나는 "엄마,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안 좋은 거야. 왜냐면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대비할 수 없잖아..." 하면서 긍정적인 태도에 대해 또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논술학원에서 열심히 배운 논리력을 설파하며 맞받아쳤다. 나는 20대 중반까지 이런 태도가 유지되었고 항상 생각이 굉장히 많았다. 어느 날은 어떻게 하면 생각을 멈출 수 있는지 괴로울 정도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고리들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생각이 멈춰진 것은 터져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지켜내기 위한 '결정'을 내리면서 였다. 


'퇴사'라는 결정이었고 그 후유증의 돌파구는 '여행'이었다.


 병원을 퇴사하고 바로 프라하 한 달 살기를 했다. 내 몸집만 한 캐리어에 짐을 가득 싣고 혼자 돌연히 프라하로 떠났다. 핑크빛 노을이 잘 보이는 레티나 공원에 올라가서 프라하 구시가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저 멀리 대한민국의 작은 도시의 한 대학병원에서 고통받던 내가 얼마나 작아 보였 덜었는지 모른다. 그 대학병원의 수술실이 세상에나 얼마나 작고 별거 아니여 보였 던 지. 그곳에서의 걱정과 불안과 각종 기계 소음들과 사람들의 말들이 있던 세계는 아득히 멀고도 작은 돌멩이 밑의 개미집 같았다. 벗어나 보니 별거 아니구나. 그렇게 20년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던 세상 속에서 나와, 프라하 거리를 혼자 걸을 때면 '별 거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들었다. 별거 아니다. 나에게 소리치는 의사들, 어떻게든 작은 것 하나 잡아서 태우려는 윗년차들,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던 시간들, 걱정들 모두 다 멀리서 보니 별게 아니었다. 작고 작은 것이었다. 그 세계만 나오면 그 사람들도 한낱 개미집에 갇힌 사람들이었다. 개미집에 갇혀 어두운 땅굴에서 살기에는 지구라는 세계가 너무도 넓고 아름답고 황홀했다.


 프라하를 다녀오고 새로운 직업을 구했고, 새 동네로 이사 오면서 나도 많이 변했다. 처음부터 오래 다닐 생각이 없었던 병원이 있던 동네와는 달랐다. 깔끔하게 정돈된 나무들과 잘 구획된 거리가 마음을 평화롭게 했다. 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월급은 그 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6개월 정도 지나니 귀여운 월급도 적응이 되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안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 때면 "아니야. 그래도 잘될 거야"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들었다. 자동이었다. 자동적인 의지가 든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아니야!" 라며 어둠이 나를 덮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건 내가 헤쳐나갈 수 있는 거야". "그래도 이 경험을 통해 다음번에는 힘들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친구가 고민을 토로할 때도, 내가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을 때도 마무리는 "그래도 잘될 거야"라는 것이었다. 엄마가 된 것 같았다. 이 방식은 엄마의 방식이었다. "그래도 감사하지 않니?"라고 항상 말하는 엄마의 방식이었다. 희한하다. 집을 떨어져 나온 지가 꽤 되었고, 집과 더 멀어진 직장으로 인해 엄마를 찾아가는 빈도가 줄어들었지만 갑자기 엄마의 사고방식이 탑재된 것이다. 

왜 엄마처럼 된 거지? 


 사람들이 그래서 가정환경의 중요성을 항상 말하는 건가. 전반적인 내 삶의 기조가 엄마처럼 돼버렸다.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그랬고 내가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쓸 때도 그랬다. "그래도 참 감사하지 않니?"라고 모든 대화의 말미에는 긍정과 감사로 끝나는 엄마의 방식이 내 삶에 적용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아빠의 감수성이 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면, 이제 어른이 되고 서른이 돼가자 엄마의 감수성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될 나이가 가까워져서일까? 더 신기한 것은 애인과의 관계에서도 엄마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었다


 남자 친구랑 있을 때면 나는 더욱 '엄마' 같아졌다.

 엄마가 아빠를 대할 때의 모습이 나왔다. 엄마는 아빠와 있을 때 항상 밝고 애교가 많고 솔직하고 귀여웠다. 엄마는 어떻게 저러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남자 친구랑 있을 때면 나도 밝아지고 솔직해지고 장난도 많이 치고 귀여워진다. 다른 친구들이랑 있을 때면 대부분 침착한 아빠의 성격이 나오는데 남자 친구랑 있을 때는 좀 다른 모습이 나온다. 가정환경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내가 가장 가까이서 보고 겪은 남녀의 관계가 엄마와 아빠의 관계이다 보니, 자연스레 애정을 나누는 남녀관계가 되면, 나는 엄마의 모습이 나온다. 남자 친구를 처음 우리 집에 데려갔을 때 "아빠랑 엄청 닮았다. 성격은 엄마를 닮고!"라고 말했다. 매번 "너는 누구 닮았어?"라고 하면 "저는 아빠 닮았어요. 외모도 성격도 아빠를 좀 많이 닮고, 오빠가 대신 엄마를 닮았어요"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남자 친구에게 나온 대답은 의외였다. 내가 엄마 성격을 닮았다니. 남자 친구 앞에서 엄마의 모습이 나오는 게 맞았다. 역시 나는 지금 엄마처럼 돼가고 있다. 


 내 남자 친구는 우리 아빠를 닮았을까? 왜 딸은 아빠랑 닮은 사람이랑 결혼하다고 하지 않는가. 학교를 다닐 적에 아빠가 집에 없을 때면 엄마는 나에게 "아빠 같은 사람 없어.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야 돼. 물론 좀 재미가 없기는 한데, 그래도 성실하고 인격도 좋고, 밥도 안 해줘도 잘 차려먹고, 얼마나 착하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배우자가 없을 때 배우자 흉을 보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는 엄마'를 아빠가 만난 것이 참 행운이다라고 생각했다. 자식에게 보여줘야 할 사랑 넘치고 서로 존중하는 부모 모습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주입식 교육? 아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아빠랑 내 남자 친구는 닮은 점이 많이 없는 것 같다. 공통점이란 '집돌이'와 '인성이 좋다'라는 것이다. 아마 남자 친구는 우리 아빠를 닮기보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 모습을 많이 닮았겠지?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방식처럼 나를 대하고 있겠지? 남자 친구가 길을 가다가도, 빵집을 가다가도, 쇼핑을 하다가도 나를 생각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들,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자주 사 오는 것을 보면 아버님이 어머님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셨을지 짐작이 간다. 


 나는 엄마의 모습을 닮고, 엄마는 외할머니 모습을 닮았겠지. 외할머니는 증조 외할머니를 닮고, 증조 외할머니는 고조 외할머니를 닮았겠지. 그렇게 다들 질량과 농도는 다르겠지만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만큼, 또는 스며들지 못하게 방수막코팅을 하고 싶은 부분까지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닮아갔겠지. 어쩌면 나는 우리 아빠와 우리 엄마의 모습이 스며들고, 남자 친구는 어머님과 아버님 모습이 스며들어 제 각각 부모에게 배운 사랑을 거름망에 걸러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하고 있는 거겠지. 거름망의 성긴 정도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 둘'이 만나고 있다고 하지만 
'둘'이 '둘'만은 아닌 거겠지. 

뿌리 깊은 대하소설의 서사 하나가 만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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