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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Feb 03. 2022

"이게 국룰인가요?"

'중간'의 인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괜찮을까? 

국룰 

- 국민 룰(rule). 특정 행위가 불문율 혹은 유행
-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일반 상식
- 진지함보다는 유머러스한 뉘앙스가 강한 유행어로,
  정식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통용되거나 유행하는 규칙 및 행위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가 국룰이지"

"삼겹살에 소주가 국룰"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습관들까지 "00에는 00이 국룰" 이다. '버스정류장에 버스 오면 안 탈 거라고 뒤로 물러서고 기사 아저씨 안 보는 게 국룰' 이고 '떨어져도 3초 안에 다시 집으면 괜찮다는 거 국룰' 이다. '이게 국룰이지'하는 순간 '어! 맞아, 맞아'가 자동으로 입밖에 나오게 되고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나와 같은 '국룰'을 외칠 때면, 그 순간 그 사람과의 심리적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진다. 예민하고 왠지 모를 벽이 있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국룰'에 공감하는 순간, '나와는 안 친하지만 내 친구랑 친한 옆반 친구' 정도의 거리감으로 확 좁혀지게 된다. '국룰'중에서도 나와 유년기를 같이 보낸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시대상이 반영된 국룰이라면 더욱더 공감대가 높아진다. '우유에 타 먹으려고 제티 가져오면 친구들 굽신거리는 거 국룰' '학교에서 손바닥 맞았을 때 책상다리 잡고 손 식히는 거 국룰' 이라고 하면 초등학교 시절에 이 사람을 본 것도 같은 기억 조작이 일어나고는 한다. 


 우리는 '국룰'을 외쳐가며 공감대를 형성했고 추억에 잠겼다. '너도 나와 같은 시대 사람이구나' 라며 친근감이 더해지며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해도 이 사람이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은 아니구나'라고 동질감이 느껴진다. 소개팅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면 성공확률이 높아지듯, 우리는 '국룰'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며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국룰'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도 다 국룰이 돼가고 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국룰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국룰'을 외쳐대고 있을까? 

처음에는 '부대찌개에는 라면이 국룰이지'라며 먹는 취향에 공감대를 형성하더니 '옛날에 이랬었는데'라며 추억을 되새긴다. 몇 년 전에는 '취존'이라며 '취향 존중'을 그렇게 외쳐댔었는데 지금은 '국룰'이라며 규정화된 불문율을 외쳐대고 있다. 누군가가 나의 결정이나 선택에 태클을 걸 때면 "어! 취존 합시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는 "이게 국룰이지!"라고 누군가 말하면 '나는 이거 먹고 싶은데'라고 선뜻 내 의견을 피력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냥 룰도 아니고 국민 룰이라고 외치는데, 거기에 토를 달기란 여간 쉽지 않다. rule을 싫어할 것만 같은 2030 세대들이 아이러니하게 국 룰(rule)을 만들어내고 '나도 국룰 지키는 사람이야'라고 인스타그램에 '#국룰', '#국룰이지' 라는 해시태그를 단다. 


 사회가 정해놓은 관습은 싫고 그것을 강요하는 꼰대도 싫지만 그래도 '국룰'사회에는 같이 발을 담그고자 한다. 70-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지금의 5060과, 200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rule의 개념이 다르다. 예전이라면 '룰'을 지키지 않았을 때 엄격한 체벌이 따랐지만, 1명의 선생님이 직접 돌아다니며 4-50명의 학생들 중 '위반자'를 적발해야지만 체벌이 가능했다. 다시 말해,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었다. 모두를 컨트롤할 수 없기에 더 엄격한 체벌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90년대와 200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2030들은 rule을 지키지 않았을 때 체벌의 강도는 낮아졌지만, 룰을 지키고 있는지 감시하는 시스템이 발전했다. 독서실에 가도 cctv가 지켜보고 있고, 하루 동안 핸드폰을 얼마나 이용했는지도 모두 기록된다. 학원을 가지 않으면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출결 여부가 부모님에게 전달된다. 전 세대보다 '룰은 지키는 것이다'라는 것이 체계적으로 학습된 세대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냥 이렇게 해줘요!'라고 막무가내로 떼쓰는 것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회사의 지침에 따라 모든 것이 해결된다.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있기에 룰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매번 따른다. 그런데 '국민 룰'이란다. 국룰이라는데 나도 국룰에 합류해야지 탕아가 아닌 주류가 되는 것이다.  흔히들 mz세대들은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 특징이라고 다루고 있으나 마냥 또 그렇지 만은 않은 듯하다. 예전 관습이나 직장 문화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며 개인주의 성향을 보이지만, 주류들이 외치는 '국룰'에서는 공감을 넘어서 나의 결정보다 '국룰'에 의존하고자 한다. 

"이게 국룰인가요?"


 이제는 사람들이 더 나아가 역으로 '국룰'에 대해 묻는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당신들의 평균값을 묻는 것이다. "불금 저녁에 배달음식이 국룰인가요? " "손절은 몇퍼부터가 국룰인가요?" "나초는 무슨 소스가 국룰인가요? 살사? 과카몰리?" "첫차는 무조건 중고차가 국룰인가요?" 다수 사람들이 하는 평균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실패의 경험수를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작은 실패도 내 인생 경험에 들어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저녁 메뉴를 잘못 정해서 내 저녁시간을 망칠 수 없으니 사람들이 많이 먹는 '국룰' 음식을 통해서 기회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국룰'을 통해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 실패할 가능성을 낮추고, 선택을 해야 하는 고민의 시간을 줄여 효율성이 높인다. 사소한 결정에도 "이게 국룰인가요?" 라고 물으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기보다는 남들의 결정에 의존하며 '중간값'을 취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택에 애먹기보다 '국룰'을 따르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국룰'에 대해 묻는다.


나 또한 그렇다. 구내식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점심 선택'에 애를 먹는다. 나 혼자만의 점심이 아닌 과장님을 모셔서 하는 팀 회식인 경우에는 더군다나 더욱 그렇다. 누군가는 "막내에게 선택권을 줄게~"라고 선심 쓰듯 말하지만 그게 더 지옥이다. 모두를 만족할 수 있는 메뉴를 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다. 나는 충동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에 비해 좀 더 신중하고 침착한 성향 때문에 결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또 다른 사람은 완벽주의 강박에 따라 '모든 선택을 실패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쉽게 결정을 못 내린다. 저녁 메뉴를 정할 때도 한 가지를 정하기보다는 3가지 정도 선택지를 만들고 남에게 결정하도록 최종 선택권을 넘긴다. '이 메뉴가 맛이 없더라도 최종 결정은 네가 한 거야'라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다. 선택에 대한 결과물에 나를 탓하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5년 전만하더라도 메뉴 선택에 이렇게까지 애먹지는 않았었는데 점점 선택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저는 다 괜찮아요~" 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선택하도록 선택권을 주고 안도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요즘에는 사소한 선택의 순간에 결정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결정하는데 기준을 두면 선택이 더 쉬워진다. 음식 메뉴를 선택할때면 '먹어보지 않았던 것' 으로 기준을 두고, 옷을 선택할때면 '옷장에 가장 없는 것' 으로 기준을 두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건강을 해치지 않을 것'과 '후회하지 않을 것'을 기준으로 둔다. 


온갖 국룰이 생겨난 이유는 타인으로부터 내 평판과 효율을 극대화하고 싶어서입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으니까. 그러니 이 기준이 너무 높습니다. 무엇보다 평균, 중간을 추구한다는 국룰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서글프게도 중간의 인간은 대체됩니다. AI는 중간을 학습해요.   
                                                                                        < 그냥, 하지 말라 - 송길영>


 선택이 중요한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내가 한 선택들이 모여서 내가 가는 길의 방향이 정해진다. 선택들의 집합체가 새로운 경험을 하게하고, 경험에서 얻어진 결과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 '그냥 하지 말라'의 저자 송길영은 모든 선택에 '국룰'인 중간값을 따르게 되면 '중간'의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간의 인간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된다고 경고한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명확한 기준을 두고 있지 않으면 새로운 결정을 내릴 수 없고, 다른사람들이 해왔던 결정을 따르게 된다. 생각없이 다름 사람의 결정에 의존하다보면 나라는 사람이 없어지게 된다. 대체불가능한 고유한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른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부품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사람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비효율적이다'라고 판단되면 이제 사람에서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 


결국, 모든 선택과정에서 '국룰'을 따르다보면 '특별한 재능없으면 AI가 대체하는게 국룰' 이 되어가는 새로운 국룰의 시대가 올 때(코 앞에 다가와서 문밖에서 노크하고 있는 그 시대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룰'에 따라 대체되는 것이다. 


'국룰'만 따르는 사람들은 AI로 대체되는 것이 '국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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