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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Feb 04. 2022

설 요리 경연 대회

아빠가 만든 라이스페이퍼 전과 빠에야

 설 연휴 이틀 전 비행기를 타고 부모님 집으로 내려갔다. 공항에 마중 나온 엄마와 함께 우리는 곧장 고기를 파는 정육점으로 갔다. 신선한 고기를 바로 잡아 파는 정육점 매장 일대가 시골 마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명절을 맞이하여 고기를 사려는 사람들로 매장 앞 주차장은 차들도 붐볐고 정육점 안에도 고기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코로나 때문에 한 사람만 들어와야 한다는 매장 방침에 의해 나는 차 안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정육점에서 갈비찜을 할 고기와, 두툼한 목살, 잡채에 들어갈 고기들을 사 왔다. 그렇게 오자마자 장보기를 시작했고, 그다음 날에는 아빠도 같이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각자 필요한 것들을 메모해서 갑시다" 

아빠, 엄마, 나 모두 사야 할 재료들이 제 각각 있었다. 매번 반복되는 명절과 같았다면 엄마가 필요한 식료품을 주도적으로 샀겠지만 이번 설은 각자 필요한 요리 재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설 명절 요리 경연 대회가 있기 때문이다. 설이 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가족 톡방에 아빠가 제안을 하나 했다.

 

"설에는 각자 요리 하나씩 하기로 하자" 

아빠의 제안이었다. 엄마는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했고 오빠랑 나도 준비를 해야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각자 하나의 요리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겨 1등을 뽑기로 했다. 각자 1만 원씩 상금을 각출해서 1등이 4만 원을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자 메뉴에 따라 요리 재료가 필요했다. 아빠는 스페인 요리인 빠에야, 엄마는 떡국, 오빠는 잡채, 나는 바질 토마토 냉파스타로 메뉴를 올렸다. 오빠가 아직 내려오지 않아 우리 셋이서 장을 봤다. 아빠는 휴대폰 메모에 빠에야 만드는 레시피를 켰다. 정리된 레시피 안에 사야 할 재료들이 들어있었다. 치킨스톡, 홀토마토 캔, 페퍼론치노, 바질 등 한식과는 거리가 먼 재료들이었고, 나 또한 바질 파스타를 하기 위해서는 바질 페스토가 꼭 필요했다. 그러나 대형 식자재마트를 몇 번이고 돌아봐도 바질 페스토가 없었다. 남쪽 소도시에는 바질 페스토가 없는 것인가. 저번에 리코타 치즈를 사려고 마트를 몇 번이나 돌아다녔던 일이 기억났다. 어째서 마트에 그 흔한 리코타 치즈가 없는 걸까? 그래서 결국 1시간 동안 차를 타고 좀 더 큰 도시의 이마트에 가서 리코타 치즈를 발견했었다. 이번에 집으로 내려올 때 "설마 바질 페스토는 있겠지"라고 과대평가한 것이 잘못이었다. 바질 페스토는 부모님이 사는 이 남쪽 소도시에는 없었다. 홈플러스에 가도 없었고 아웃렛에 딸린 마트에 가도 바질 페스토는 없었다. 대형마트 3군데를 돌아가니고서야 여기는 바질 페스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요리를 잘하는 지인에게 바질 페스토를 파는 곳을 물었지만 "바질 페스토? 그게 뭐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새벽 배송이 안 되는 지역인지라 마켓 컬리로 시킨다 하더라도 이미 설 연휴가 시작돼버려 택배 배송이 기간 내에 도착하지 못했다. 바질 페스토가 메인이었던 나는 메뉴를 바꿔야 했다. 하는 수없이 나는 예전에 한번 만들어봤던 양송이 크림 리조또로 메뉴를 바꿨다.


 4일의 연휴기간 동안 사다리 타기를 해서 각자 요리를 할 순서를 정했고, 내가 첫 번째로 당첨되었다. 메뉴가 바뀐 나는 다시 장을 보러 가야 했다. 또다시 마트를 왔고 양송이버섯과 생크림을 추가로 샀다. 아빠는 라이스페이퍼로 만드는 전을 하겠다고 라이스페이퍼와 참치캔, 파프리카 등 야채들을 더 샀다. 그날 저녁 나는 생쌀로 만드는 양송이버섯 크림 리조또를 만들었고, 아빠는 저녁에 사이드 메뉴가 필요할 것 같다며 라이스페이퍼 전을 시작했다. 아빠는 한껏 들떠있었다. 평소에 요리를 잘하지 않는 아빠가 적극적으로 주방을 차지하고 나섰다. 나와 동시에 요리가 시작되었다. 요리할 때 실내화를 신고하면 더 잘된다고 엄마는 내게 굽이 좀 있는 실내화를 꺼내 주었다. 그러자 아빠가 자신도 신발이 필요하다고 어필했고, 우리는 각각 실내화를 신고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아빠는 신이나 보였다. "이거 장갑을 끼고 해야 되는데?"라며 '셰프의 키친'이라는 상표의 라텍스 장갑을 끼고 셰프처럼 각종 야채들을 잘랐다. 내가 양파를 다듬는 것을 보고는 "아마추어 구만" 하고 자기가 양파를 자르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자꾸 나를 불렀다. 내가 메인인데 아빠가 메인이 된 것 같았다. 아빠는 주방에서 보통 요리를 하지 않아 도구나 재료가 어디 있는지 잘 몰라 엄마가 도왔다. 그런데 엄마가 도와주는 것이 참견이라고 느껴졌는지 아빠는 자신의 레시피대로 하겠다며 계속해서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요리를 하는 주된 공간은 내가 차지하고, 아빠는 식탁에서 라이스페이퍼 전을 만들었다. 오빠는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마치 예전 '냉장고를 부탁해'의 김성주처럼 메뉴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아빠는 카메라가 다가오자 진짜 셰프인 양 인터뷰를 했다. 


"아 제가 10년 동안 이 요리를 해왔는데요. 바로 라이스페이퍼 전이라는 겁니다."

"본인이 개발하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제가 개발해서 해오고 있습니다"


마치 경쟁구도인 것처럼 아빠와 나는 각기 오빠의 핸드폰에 대고 인터뷰를 했다. 나는 생쌀로 많은 양의 리조또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빠의 라이스페이퍼 전이 먼저 완성되었고 다들 배가 고파서 먼저 시식을 했다. 바로 만든 전은 뜨거웠고 오래 기다린 만큼 맛있었다. 일반 전이 아니라 라이스페이퍼로 재료의 바깥을 감싸서 구우니 마치 딤섬 같은 맛이 났다. 간이 적절히 되어있는 재료들과 라이스페이퍼의 쫄깃쫄깃함이 식감을 살려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이미 엄마랑 오빠는 라이스페이퍼 전을 먹고 있었고 내 리조또는 관심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결국 내 리조또는 쌀이 익지 않은 부분이 있었고, 크림 리조또 특성상 느끼함으로 인해 엄마와 아빠는 맛있게 먹기보다는 고생한 나를 생각하여 표정관리를 하며 먹는 듯 했다. 다들 아빠의 전을 먹어버려 배가 불렀던 탓에 더 내 리조또는 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오빠는 생쌀로 리소토를 만들었다는 것에 점수를 주기로 했다. 내 요리시간은 라이스 페퍼 전이 메인이 돼버린 시간이었다. 한 번 요리를 성공하여 가족들에게 반응이 좋았던 아빠는 설연휴간 모처럼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설 당일 엄마의 떡국을 먹었고, 그다음 날 아빠의 주 메뉴인 빠에야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주방에 저번보다 익숙해진 아빠는 재료를 다듬고 씻었다. 빠에야 전용 팬이 없던 터라 웍에다 생쌀을 넣고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를 하면서 생기는 설거지 거리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씻어 정리했다. "빠에야 팬이 필요한데. 이 웍으로는 안되는데..." 라며 장비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지만 빠에야 전용 팬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전처럼 오빠는 핸드폰 카메라로 아빠를 인터뷰했고, 나도 동영상을 찍었다. 아빠는 자신의 메뉴를 설명하며 망설임 없이 빠에야를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고 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아빠 이거 탄 것 같은데?"

"응. 근데 이게 원래 밑이 누룽지처럼 좀 타는 거야. 아 팬이 안 좋네... 옆 부분이 안 익어."


 아빠는 괜찮다고 했지만 표정은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강불에 익히고 있어서 탄 냄새가 계속 났고 나는 중불로 불을 조절해줬다. 아빠 멘탈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탄 냄새를 맡은 엄마와 오빠도 차례로 주방에 들어왔고 저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한 마디씩 훈수를 뒀다. 아빠는 절대로 저으면 안 된다며 이대로 익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탄 냄새와 주변의 훈수에 아빠는 졌고 결국 웍에 있는 내용물을 좀 저었다. 


"아니 원래 이렇게 하는 건데 주위에서 계속 저으라 해서 망해버렸네"


 아빠의 빠에야는 물이 너무 많아서 마치 리조또, 또는 토마토 죽처럼 되어버렸다. 밑부분은 타버렸고 전체적으로 탄 향이 베어버렸다. 빠에야가 아닌 빠에야였지만 그래도 맛은 괜찮았다. 타지만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평가들이 오갔다. 죽처럼 된 것이 더 먹기 좋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아빠가 이대로 요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엄마와 오빠의 노력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앞으로 계속 요리를 해야 한다며 너무 맛있다고 아빠를 추켜올렸고 옆에서 오빠는 맞장구를 쳤다. 아빠는 멋쩍은 듯 웃으며 빠에야가 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엄마는 계속 장비 탓을 했기 때문에 태도에서 1점을 깎겠다며 점수를 종이에 적어 잘 접었다. 나도 고심하여 점수를 종이에 적었다. 그렇게 3개의 종이를 접어 유산균 상자 아래에 보관했고, 내 점수는 그 옆 비타민 상자 아래에 보관되어 있었다. 


 오빠의 잡채까지 요리가 끝났고, 연휴 마지막 날 점수를 발표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엄마가 거의 다 도와줬던 오빠가 점수가 가장 낮았다. 그다음은 나였고, 엄마가 떡국으로 2등을 했다. 1등은 역시 아빠였다. 아빠는 예견되었다는 듯이 차분히 1등이 된 소감을 발표했고, 상금 4만 원을 가져갔다. 


 명절마다 요리를 하나 하자는 것은 매번 엄마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무슨 요리야..."라고 아빠가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엄마가 음식을 만들면 우리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설거지를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설에는 요리가 하고 싶었던지 아빠가 먼저 제안을 했고, 가장 적극적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내년이면 환갑이 되는 아빠는 "10년만 젊었어도"라는 말을 자주 했고, 확실히 10년 전보다 살이 많이 빠지고 잔병치레가 많아졌다. 어렸을 때 우리를 혼내거나 엄마와 다툴 때,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치던 아빠 모습은 이제 볼 수 없다. 훨씬 더 온화해지고 부드러워졌다. 그 덕분에 가족끼리 대화가 좀 더 많아졌다. 오빠랑 내가 일찍 독립을 해왔던 터라 오랜만에 가족이 다 모일 때면 조금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는 했었는데 아빠가 전보다 부드러워지면서 어색함의 길이가 점점 짧아졌다. 엄마, 아빠, 오빠, 나 모두 자기만의 노력이 있었다. 아빠는 가부장적인 태도를 버리고, 좀 더 우리와 가까워지려했다. 엄마는 항상 재밌는 아이디어를 냈고 아빠를 잘 구슬렸다. 오빠도 매번 직장문제로 아빠와 트러블이 있지만 그래도 아빠에게 다정한 말들을 건넸다. 누구 한 사람의 노력이라기 보다는 다들 화목하고 재밌게 명절을 보내기위해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리고 채워야 할 것을 채워 서로에게 다가갔다. 다음 추석에도 우리 가족은 명절 요리 대회를 열기로 했다. 추석에는 상금을 좀 더 올리기로 했고 평가표를 더 자세히 만들기로 했다. 


추석에 아빠는 어떤 모습으로 요리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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