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다시

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by 프리지아


우리는 전날 보았던 산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체력이 좋은 선우와 재현이를 나눠 두 팀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서쪽에서는 선우와 재민이,

동쪽에서는 재현과 민혁, 그리고 나가 올라가기로 했다.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내 발목을 고려해 짠 조합이었다.

그리고 벚꽃나무에 대해 알고 있는 나와 재민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도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것이었다. 나는 재민을 바라보며 벚꽃나무를 발견하면 알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재민도 나를 보며 같은 의미의 눈빛을 보냈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등산 간다고 생각하자.”

살짝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를 풀 듯 선우가 말했다.

“그래. 정상에서 보자.”

민혁이 웃으며 답했다.

산은 생각보다 그렇게 가파르지 않았다. 다만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없어 우리가 직접 길을 만들어 가야 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지나온 길의 나무마다 끈을 묶어 표시하기로 했다.

미리 챙겨 온 것들 중 노란 끈이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다행이었다.

“조심해.”

앞서가던 재현이는 산을 오르는 내내 뒤를 돌아보며 내 상태를 확인했다.

“응.”

나는 민혁이 건네준 긴 나뭇가지를 짚으며 천천히 산을 올랐다.

앞에서는 재현이가 길을 만들고, 뒤에서는 민혁이 혹시라도 내가 미끄러질까 봐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산을 오르는 동안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때 기억나? 축제 때.”

내가 말을 꺼내자 민혁은 곧바로 떠올랐다는 듯 웃었다.

“아, 이재현 춤춘 거?”

“아… 그건 좀 잊자.”

재현이가 걸음을 멈추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게. 왜 안 하던 걸 해서 그렇게 인상 깊게 박히냐고.”

민혁은 비웃듯 말하며 빨리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고3 마지막 축제에 재현이가 반 친구들 몇명과 무대에 올라간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재현이 무대 올라간대.”

동아리실에서 재민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재현이?”

선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재민을 쳐다봤다.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맞아. 이재현.”

재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나와 선우, 찬영이까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돼… 협박받았대? 돈 필요하대?”

찬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반 친구들이랑 나간대. 1등하면 상금도 있다던데.”

재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넌 왜 이렇게 안 놀라?”

선우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재민은 잠깐 나를 보더니 말했다.

“나서는 거 싫어하는 애가 왜 나서겠어.”

“…왜 나가는데?”

내가 묻자 그는 잠깐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돈 필요한가 봐.”

나는 더 묻지 못했다.

이후에 재현이를 직접 만나 물어봤지만, 재현이는 그냥 웃으며 말했다.

“그냥.”


축제 당일, 우리는 부스를 돌며 놀다가 재현이 무대를 보기 위해 강당으로 갔다. 강당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와… 사람 봐.”

찬영이 놀라며 말했다.

“이재현 인기 뭐야.”

선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투덜거렸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밖에 있을까…”

사람 많은 곳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러자 뒤에서 민혁이 등을 밀었다.

“너 안 보면 이재현 울지도 모른다.”

재민도 팔을 잡아끌었다.

“영상 찍어야 된단 말이야.”

결국 못 이기는 척 강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간 지 3초 만에 후회했다.

사람들 사이에 휩쓸려 아이들을 놓쳐버렸다. 발은 계속 밟혔고 몸이 밀려났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민혁이었다.

“김민혁…”

나는 거의 구조된 사람처럼 그를 바라봤다.

민혁은 나를 끌고 강당 뒤쪽 벽으로 이동했다.

“애들은 앞쪽 간 것 같고… 우린 여기 있자.”

나는 벽에 기대 서 있었고, 민혁은 내 뒤에서 사람들을 막아주듯 팔을 올리고 있었다. 무대가 몇 개 지나고 조명이 꺼졌다.

그때 민혁이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나온다.”

나는 고개를 들어 무대를 바라봤다. 재현이는 반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무슨 노래인지는 몰랐다. 그냥 재현이의 움직임만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잘 추네…’

조명 아래 서 있는 재현이, 그를 향해 소리치는 여학생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 무대를 바라보는 나. 괜히 가슴 한쪽이 묘하게 조여 왔다.

무대가 끝난 뒤 우리는 강당 밖으로 나왔다. 잠시 의자에 앉아 있으니 재민과 찬영, 선우도 곧 나왔다.

“영상에 노래 들어갔을까 모르겠다.”

찬영이 카메라를 확인하며 말했다.

“함성이 더 크게 들어갔을걸.”

재민도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학교 밖 놀이터로 나가 재현이를 기다렸다. 조금 뒤, 재현이가 뛰어왔다.

“1등 했다.”

재현이는 뿌듯한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 무대는 재민과 선우가 틈만 나면 따라 하는 놀림거리가 됐다.




“근데 그거 왜 나간 줄 알아?”

민혁이 뒤에서 웃으며 말했다.

“춤추고 싶어서?”

내가 대답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되묻자 민혁이 말했다.

“그때 축제 1등 하면 너한테 고백하려고—”

“야!”

앞에서 걷던 재현이가 소리쳤다.

나는 놀라 걸음을 멈췄다.

재현이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김민혁…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무슨 고백?”

나는 다시 민혁을 바라봤다.

민혁은 재현이 눈치를 잠깐 보더니 결국 말했다.

“어떤 애가 축제 1등 하면 너한테 고백하겠다고 떠들고 다녔거든. 그 얘기 듣고 재현이가 무대에 끼어든 거야.”

나는 재현이를 쳐다봤다.

“그게 이유라고?”

재현이는 잠깐 망한 표정을 짓더니 중얼거렸다.

“…걔 별로였어.”

“걔 누구였는데?”

내가 묻자 재현이가 작게 말했다.

“김수철.”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걔랑 친했다고?”

그 이름은 기억났다.

친하지도 않았는데 볼펜을 빌려 가 놓고 결국 돌려주지 않았던 애였다.

“아끼던 거였단 말이야.”

나는 발로 작은 돌을 차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민혁이 배를 잡고 웃었다. 재현이는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어갔다. 나는 잠깐 그의 귀가 빨갛게 물든 걸 봤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때 민혁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찬영이가 들었으면 진짜 웃었겠다.”

나는 잠깐 멈췄다.


무대 영상을 하루에 한 번씩 돌려보던 찬영이 떠올랐다.

“…그러게”

나는 작게 웃었다.

“엄청 웃었겠지.”

우리는 잠시 말없이 걷다가 다시 속도를 내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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