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말하지 못했던

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by 프리지아


그러다 재민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하…선우야..”

안도하는 듯한 한숨과 함께 재민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나에게도 반가운 이름이었다.


희미한 가로등 빛 아래,

멀리서 선우와 재현, 민혁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애들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놀란 듯 뛰어오기 시작했다.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

재현은 우리에게 뛰어오며 물었다.

“야, 이거 뭐야.”

옆에서 따라오던 선우가 찢어진 내 옷과 그 위에 묻은 피를 보고 말했다.

“뭐야… 다쳤어?”

연달아 민혁까지 내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아. 내 피 아니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민과 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다행이다… 하…”

이야기를 다 들은 재현이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안도했다.

“너는? 너희는? 다친 데 없어?”

나는 민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땀 난 거 말곤 괜찮아. 오랜만에 뛰었더니 너무 힘들다.”

민혁은 웃으며 말했다.

“하…”

나는 웃고 있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감과 걱정,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불안이 뒤섞인 한숨이었다.

선우와 재현은 민혁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고, 민혁은 괴물들을 피해 숨어 있었다고 했다. 다만 너무 정신없이 뛰어간 탓에 길을 잃어 잠시 헤맸다고 했다.


“괴물 말이야… 왜 나는 공격을 안 하는 걸까…”

선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는 선우의 말에 아까 재민을 향해 다가가던 괴물을 떠올렸다.

선우가 돌멩이를 던졌는데도 괴물은 선우를 본체만체하고 재민이에게 다가갔었다.

“나를 공격했고… 재민이한테도 다가갔고… 민혁이도 쫓아갔어.”

나는 나를 향해 달려오던 괴물을 떠올리며 말했다.

생각을 하다 보니 어깨의 상처가 다시 쓰라린 것 같았다.

“아…”

나는 오른쪽 어깨를 붙잡았다.

“다쳤어?”

재현이가 바로 내 어깨를 살폈다.

“살짝… 괜찮아.”

나는 애써 웃었다.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따갑고 아팠지만 괜찮다고 했다.

“치료할 거 있나 찾아보자.”

선우가 말하자 민혁과 함께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혁이 구급 키트를 찾아왔다.

재현은 그걸로 재민과 내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다고 했다.


“우선 너랑 재민이는 괴물 앞에서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치료가 끝나고 긴장이 조금 풀리자 민혁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랑 재현이는?”

나는 민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괴물들이 나를 쫓아오는 것 같진 않았어.”

재현이 말했다.

“나는 쫓아오긴 했는데… 위협적이진 않았달까.”

민혁이 재현을 보며 덧붙였다.

“이상하지 않아? 왜…”

재민이 말을 꺼냈다.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그 뒤에 올 말을 알고 있었다.

나와 재민을 공격하는 괴물들.

그리고 내가 느꼈던 그 크고 기괴하고 압도적인 괴물의 모습.

“그럼 다음에 산 정상은 나랑 김민혁, 이재현이 갔다 오는 걸로 하자.”

선우가 말했다.

“그래. 해가 좀 져도 뛰어서 가면 되니까.”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민이 말했던 산 위의 공터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았다.

어째서인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건물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씨가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더러워진 내 옷은 선우가 위층에서 찾아온 검은색 박스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벽에 기대 앉은 우리는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 왜 그런 거야?”

나는 민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까지 위험해질 뻔했잖아.”

재민을 구하려고 망설임 없이 뛰어들던 그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알던 민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늘 느긋했고, 쉽게 흥분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한 번 더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안전한 선택이.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민혁이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나도 한 번은, 너희를 지켜줘야지.”

그 말은 가볍게 던진 것처럼 들렸지만 끝에 아주 작은 떨림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를 향하던 시선을 맞은편 벽으로 옮기며,

낮게 말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민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벽에 기대 있던 머리를 떼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한 번 잃어봤으니까.”

공기가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보고만 있었잖아.”

그는 숨을 한번 삼켰다.

“그때처럼 또 그러기 싫어서.”

말끝이 아주 조금 갈라졌다.

“이젠..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어.”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 나를 향해 있었다.


문득,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이번엔 내가 너를 지켰다”던 재현이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가볍게 넘겼던 말이 이제야 제대로 들리는 것 같았다.

민혁이도, 재현이도 같은 마음이었구나.

우리는 모두,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그 속에서 재현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재현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조금 더 세게 손을 맞잡았다.

붙잡는 쪽이 나인지, 그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그 온기 속에서 그날의 사고가 다시 스쳐 지나갔다.


뒤집히던 버스,

깨지던 유리,

찬영의 마지막 눈빛.

숨이 잠시 막혔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장면을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상처.

같은 날에 멈춰버린 시간.

…우리는,

모두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구나.

나는 고개만 조금 들어 민혁을 바라봤다.

“…좀 후련해?”

잠깐의 숨.

민혁은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응.”

짧았다.

“조금은.”

그는 가슴께를 한 번 쓸어내렸다.

“여기, 답답했던 게… 좀 내려간 느낌이야.”

말은 담담했지만 표정은 전보다 훨씬 가벼워 보였다.

억지로 버티던 힘이 빠진 사람처럼.


그때,

재현이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그럼 이제…”

그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혼자서 짊어지지 말자.”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누가 또 무너지려고 하면, 그땐 그냥 말해. 숨기지 말고.”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우리, 서로 지켜주자.”

재민이 말했다.

“이번엔… 아무도 혼자 두지 말자.”

그 말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조금 따뜻해졌다.

우리는 여전히 상처를 안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걸 혼자 끌어안고 있진 않을 것 같았다.

손을 잡은 채,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가 우리를 차례대로 쳐다보다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너희는 다 내가 지켜..”


그렇게 긴 밤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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