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우리가 잃어버린 계절

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by 프리지아


“가자.”

이번엔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번엔,

아무도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평소보다 더 단단하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발을 내딛을 때 생각났다.

‘아.. 지도’

나는 방 안에 접어 둔 지도가 생각났다.

필요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가져가고 싶었다.

이 세계를 기억할 방법 중 하나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잠깐만 기다려달라 말하고 다시 집으로 뛰어올라갔다.

방 안에는 내가 접어둔 지도가 바닥에 있었다.

나는 지도를 가방에 넣었다.

방에서 나와 거실, 주방, 우리가 함께했던 공간을 잠시 눈에 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말이다.

‘띵동.’

나는 숨을 죽인 채 문에 달린 작은 렌즈로 밖을 봤다.

사람의 형체가 서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괴물일까?. 하지만 괴물이라기엔 체구가 작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띵동.’

빨리 문을 열라는 듯 초인종은 계속 울렸다.

나는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땐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땅이 흔들렸다.

‘지진인가?’

나는 벽을 짚으며 중심을 잡았다.

그 순간,

비상구 계단 위에 있는 창문 너머로 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직감했다.

‘문이 열렸구나’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지진은 멈춘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와, 넘어져”

뛰어나오는 나를 보고 재현이 말했다.

“지진. 지진 못느꼈어?”

나는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지진?”

민혁이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무슨 소리야, 지진이라니?”

선우도 내 말에 많이 당황한 듯 보였다.

“.. 문이 열렸어..”

나는 아이들 뒤로 보이는 산을 바라봤다.

푸른 산에 유일하게 분홍빛을 띄는 벚꽃나무 한 그루.

이젠 나에게도 보였다.


급한 마음에 오르는 산길은 평소보다 가팔랐다.

숨이 거칠어졌고 발은 자꾸 미끄러졌다.

“진짜… 돌아가는 거 맞지?”

재민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니면 뭐야. 또 다른 세계?”

민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선우가 말했다.

“그래도 가야지. 여기서 멈춰 있을 순 없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걸어놓은 노란 리본은 초록 색으로 뒤덮인 나무들 사이에서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재현이 속도를 조금 늦추며 내 옆으로 왔다.

“괜찮아?”

“응.”

“거짓말.”

나는 잠시 웃었다.

“조금… 무서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근데,”

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도망치는 게 아니잖아.”

그 말에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벚꽃나무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벚꽃나무 한 그루는 바람도 없는데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서 빛이 번져 나왔다.

빛은 서서히 길처럼 이어졌다.

마치 우리를 재촉하지도, 막지도 않는 채.

“진짜네…”

재민이 중얼거렸다.

“이게 끝이야?”

민혁이 물었다.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작이지.”

아무도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 발짝 다가갔다가,

다시 멈췄다.

“돌아가면…”

재민이 말을 꺼냈다.

“여기에 다시는 못오겠지?”

“돌아간 우리는..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는 문득 겁이 났다.

“응. 그래도 우리는 잘 살거야”

민혁이 나와 재민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답했다.

“우리가 여기 있었던 걸 잊지않은 채.”

재현이 벚꽃을 손으로 받아보며 말했다.

“찬영이도 그걸 바랐을 거야.”

그 이름이 나오자,

우리는 모두 잠시 고개를 숙였다.

선우가 나를 바라봤다.

“..아직 망설여져?”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좋잖아.”

“근데 여긴 우리가 웃던 기억이지, 우리가 웃을 미래는 아니야.”

선우가 답했다.

그 말에 가슴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우린 계속 함께할거야”

선우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가 먼저 한 걸음 내디뎠다.

빛이 그의 발끝을 감쌌다.

“가자.”

민혁이 뒤따랐다.

“얼른 와.”

재민이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쓰러가자”

그 말에 묘하게 가슴이 설렜다.

재현이 마지막까지 내 옆에 서 있었다.

“같이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를 돌아봤다.

이 세계의 하늘.

우리가 웃던 바다.

그 모든 시간들.

그리고 벚꽃 아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거기에 있을 누군가.

“이제 진짜 갈게.”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흩날렸다.

빛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율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웃었다.

아주 크게.

그리고 망설임 없이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번엔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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