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둘은 평소처럼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안녕”
내 목소리가 조금 늦게 따라 나왔다.
그날 이후,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건 오랜만이었다.
“여기 앉아”
재현이가 옆자리의 의자를 빼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옆에 앉았다.
“다른 애들은?”
“선우는 조금 늦을 거 같고 재민이는 다 왔대”
민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본 채 말했다.
“너 26일 된다고 했지?”
재현이 물컵을 밀어주며 물었다.
“응. 시간 비워뒀어”
26일, 그 사건 이후 다 같이 찬영이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너 지난주에도 갔다 왔다며”
“응. 선우랑”
나는 민혁이를 보며 답했다.
“시험끝나고 바로?”
재현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어딘가 확인하는 느낌이 섞여 있었다.
“응. 학교 앞에서 만나서”
민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선우 걔는 매일 바쁘다고 하더니..”
그 말이 공기 중에 잠시 걸렸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서재민!”
민혁이 먼저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야, 다들”
재민은 웃었지만, 그 웃음이 예전만큼 가볍지는 않았다.
“이제 선우만 오면 되네, 오랜만이다 이렇게 모이는거”
민혁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지 생각했다.
고2 새학기.
전학 첫날,
교실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앉아 있던 나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선우였다.
밝게 웃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안녕!”
밝은 목소리가 먼저 닿았다.
나는 반 박자 늦게 따라 말했다.
“안녕..”
“동아리는 정했어? 없으면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
전학 온 지 사흘째였다.
교실에서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선우가 처음이었다.
“무슨 동아린데?”
“사진 동아리!”
선우는 웃을 때 눈이 먼저 접혔다.
그 얼굴을 나는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동아리 실 문을 열자 먼지 냄새와 필름 약품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인사해. 우리 반 친구, 이번에 전학왔어”
선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재민이었다.
민혁은 고개만 끄덕였고, 재현은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창밖을 봤다.
“여기에 싸인하면 돼”
선우가 동아리 가입 신청서를 내밀었다.
거의 결정된 일처럼.
“여기에는 전화번호도 적어줘!!”
찬영도 신나 보이며 말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섯이 되었다.
사진동아리였지만, 사진을 찍은 날은 많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점심을 같이 먹고, 수업이 끝나면 같이 걸었고, 찬영이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카메라 속에는 늘 웃고 있는 우리가 있었다.
“선우 다 왔대”
민혁이 전화를 끊고 말했다.
“서재민! 오랜만이다”
선우는 여전해 보였다.
우리는 오래전처럼 웃었다.
다만, 웃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이제 갈까?”
밤 11시가 넘어서야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오자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꽃잎은 천천히 떨어졌다.
“다 같은 방향이지?”
선우가 건너편 정류장을 가리켰다.
그 정류장을 보는 순간,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큰 벚꽃나무. 벤치. 찬영의 목소리
“벚꽃나무에 숨겨진 세계에 대해 알아?”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았다.
“버스 온다”
민혁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아.. 뭔가 생각이 나려고 했던 거 같은데..’
나는 옛날 기억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무슨 생각해?”
인상을 쓰고 있는 내 표정을 살핀 재현이 물었다.
“우리 옛날에 동아리 실에서..”
나는 재현이를 붙잡고 그 때의 기억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다.
“너 카드 없다고 했지? 내 뒤로 와.”
선우가 내 손목을 잡고 끌었다.
나는 선우를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 앉아”
“괜찮아”
“사람 많아서 많이 흔들릴거야.”
재현이 등을 밀었다.
나는 등 떠밀려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출발했고, 창 밖의 벚꽃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그래서 동아리 실에서 뭐?”
재현이 물었다.
“동아리 실?”
나는 떠올리려 했다.
“벚꽃나무에… 숨겨진 세계가…”
머리가 울렸다.
쿵.
이마가 창문에 부딪혔다.
“조심해.”
재현의 손이 내 머리와 유리 사이로 들어왔다.
체온이 느껴졌다.
그때.
맞은편에서 거대한 빛이 밀려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전조등.
‘빠아아앙—’
소리가 찢어졌다. 시간이 접히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공중으로 뜬 것 같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벚꽃은 없었다.
버스도,
도로도,
불빛도 사라져 있었다.
그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