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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생(生)의 큰 뜻과 그윽한 마음이 항상 변함없고, 아주 끝없이 이어지게 하여라!
“당신 생(生)을 통해 당신의 인품이 끝없이 이어지게 하여라.
당신의 진실한 마음도 끝없이 이어지게 하여라.
당신의 고귀한 뜻도 끝없이 이어지게 하여라,
세상을 향한 당신의 미소도 끝없이 이어지게 하여라,
모두 모두 변함없이 그윽하게, 아주 끝없이 이어지게 하여라,
살아가며, 여러 고난이나 시련을 맞닥뜨려서도, 별 동요 없이, 별 특별한 흔들림도 없이, 오직 변함없는 네 의지로써, 모든 것을 관통하여 나가라.
당신의 큰 의지가 계속 새로운 상승의 연결 고리, 가치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가며, 아주 끝없이 이어지게 하여라.”
우리는 누구나, 변함없고 그윽한 인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이러한 인품이 당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가져다주고, 매우 큰 안정감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한 발전과 미래에 대한 큰 기대감마저 가지게 해 주어, 지극히 믿음이 갈 것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반면에,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인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품, 입장이 아주 모호한 인품은 누구든 싫어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인품은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고, 예측 불가의 성격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미국 Upper Geyser Basin에 위치한 “Old Faithful”이라는 온천(간헐천)은 예로부터 Yellowstone 공원의 가장 큰 명물이다.
이 온천은 하루에 약 20회 내외(약 70~80분의 간격) 정도를 분출하는데, 거의 일정한 높이로 약 4분간 솟아오른다고 한다.
공원 안에는 Old Faithful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온천들이 산재해 있기는 하지만, 왜 유독 이 온천이 그렇게 유명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온천이 주는 믿음 혹은 신뢰(Faithful)의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즉, 다른 온천은 언제 그 온천수가 분출하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는 데 비해, 이 온천만은 그 분출 시간을 예측하기가 매우 용이하다.
또, 분출 시간(간격) 뿐만 아니라, 분출하는 높이(평균 약 50m 내외)도, 분출되는 수량(약 4만 리터)도 거의 일정한 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 분출 시간이 가까워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게 되는데, 그 분출하는 광경을 보게 되면, 처음에는 조금씩 흘러나오다가 점점 커져서 클라이막스에서는 아주 엄청난 높이로 대분출을 하며 장관을 이루게 된다.
그 옆에 있는 숙박시설(Old Faithful Inn)에 숙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도착 6개월 이상 이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편이라고 한다.
이처럼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 변함없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것은 아주 큰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그 가치의 핵심 요체는 바로 ‘신뢰감’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니,
늘 변함없는 모습은 곧 믿음이 된다.
늘 변함없는 말씨나 태도 또한 큰 믿음이 될 수 있다.
늘 변함이 없고, 늘 한결같음은 곧 당신의 그윽한 인품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이는 끝없이 이어지는 당신 생의 가치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당신의 “늘 변함없음”은 그 자체로서 이미 무한한 의미를, 무한한 느낌을 말없이 주변으로 전파해 주고 있다.
이는 또한, 그윽한 ‘항상성’이다.
어쩌다, 한두 번의 선행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을 끝까지 견지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이기적인 성향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한순간의 효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효도가 끝까지, 마지막 자락까지 이어지기란 참으로 어렵다.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헤아리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한때는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을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이어가기란 참으로 어렵기만 하다.
생의 중간중간에 여러 피치 못할 곡절이 엄청나게 많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한동안은 자기 말에 모순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초지일관으로 자기 말에 모순이 발생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렵다.
사람이란 늘 현혹되고,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니 말이다.
세상에 많은 이들이 처음에 한 말과 나중에 한 말이 서로 다른 것을 자신의 오점으로 잘 인정하지 않고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아주 많은 이들이 여기에서 한 말이 다르고, 다른 곳에서 한 말이 다른 것을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려 한다.
이렇게 마구 일관되지 못하고, 아주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러한 세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아주 어처구니없고, 상호 모순되기만 한 모습들을 마치 당연한 듯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아주 짙어진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모순적 모습의 최악은 바로 ‘위선’이다.
위선은, 말 다르고 행동 다른 모습이다.
말 다르고 표정 다른 모습이다.
행동 다르고 자세나 태도 또한 다른 모습이다.
완전히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말문이 막혀 올 때가 많다.
당신은 항상 이러한 위선적 모습들을 매일매일 잘 경계해 내고,
늘 초지를 일관할 수 있도록 기꺼이 해 보아라!
반면에, “변함없음”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날처럼 아주 복잡다단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인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최고의 덕목이 될 수 있다.
세상에 그 누구라도, 변함없는 인품의 친구나 이웃을 당연히 더 좋아하고 고대할 것이 아주 당연하다.
변함없는 이들에게는 당연히 호감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태도를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 말과 행동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그들에 대해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당연히 거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특히, 자신이 매우 어려울 때도 변함없이 옆을 지켜주는 사람, 한번 뿌리를 내리면 평생 그 자리를 잘 지켜주는 고목과도 같은 사람은 더욱 잊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큰 나락에 빠져 헤어 나오기 매우 어려운 지경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기가 얻어내거나 챙길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변함없는 태도를 보여주고, 기꺼이 도와주기까지 하는 사람은 더욱더 못 잊을 것이다.
이러한 변함없는 그의 태도에 대해, 언젠가는 꼭 되갚으려는 감정도 아주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다.
이런 변함없는 가치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보은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아주 인지상정일 것이니 말이다.
우리 주변에 사회적으로 아주 크게 이루어 내었거나, 매우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보게 되면, 대개는 심지가 아주 굳고, 자기 믿음에 매우 충실한 편이다.
또, 말 바꾸기를 잘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대개는, 매사 찬찬히 잘 생각하여 한번 결정을 내리게 되면, 최선을 다해 지키려 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이들은 자기 일상의 준칙이나 자기 나름의 철학을 매일매일 습관적으로 잘 실천해 나가고, 타인과의 약속이나 대화에 있어서도 거의 흐트러짐이 없이, 오직 실천으로 보여주는 그러한 사람들인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럼, 이렇게 언제나 변함없는 인품을 잘 지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평생 자기 뜻을 변함없고 꿋꿋이 잘 이루어 내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 대표적인 방안들을 한번 생각해 보기로 보자.
첫째,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하여라.
매사에,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면, 남들에게 자신 있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된다.
즉, 상대방에게 자기 속마음이 탄로 날까 봐서 조마조마해하거나, 무언인가 자기 잘못을 감추고 있거나, 어떠한 형태이든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자기 마음속에 내재되어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태로 무슨 의미 있는 일을 제대로 치고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상태로, 어떻게 세상을 제대로 도모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은 자기 마음을 매우 소극적이거나 방어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고, 이러한 소극적인 혹은 방어적인 형태의 마음은 자기 생에서 아무런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 내기가 어렵게 되고 만다.
특히, 아주 진취적인 일 혹은 자기 생에서 스스로가 매우 의미를 두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더 아주 곤란한 상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요즘 정치인들이 많이 인용하는 문구 중 ‘양두구육(겉치레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변변치 못함)’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당신이 이렇게 양두구육처럼 처신하게 된다면, 속마음을 꼭꼭 숨기고서 겉을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을 잘한다고 하여도, 네 마음이 별로 편치 못할 것이며, 들킬까 봐서 지속해 조마조마해할 수도 있고, 당신이 상대에게 제시하는 그 어떤 말이나 제안 또한 힘을 받기가 매우 어렵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누구든 가급적 남을 조금이라도 속이지 말고서, 남들에게 거짓말이나 허투루 하는 말은 더더욱 없게 하고서, 모든 일을 항상 떳떳하게 어필할 수 있어야만, 그래서 언제나 부끄럼이 전혀 없을 정도가 되어야만, 자기 마음속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지고, 매우 편해지게 되며, 매우 자유로워지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 이렇게 편안하고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가 된다면, 당신이 이 세상을 향해 도모하려는 그 무슨 일이라도, 아주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이러한 떳떳하고 아주 당당한 마음은, 그 무엇에도 스스로 매우 자신이 있을 것이기에, 매우 큰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기에,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매우 정당할 것이기에, 지극한 ‘항상성’을 그 무엇보다도 더 잘 지켜줄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항상 좀 더 내다보고 말하여라.
만약, 자기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서 어떤 이야기를 한다면, 자기 말을 끝까지 지켜내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며, 그래서 결국 자기 말을 자주 바꾸는 사람이 되어버리기 쉽다.
결국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기 쉽다.
그러니,
가급적 자기 앞의 두세 단계 정도를 더 내다보고서 말도 하고, 행동도 하여라.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바로 앞의 한 단계만이라도 더 생각을 해 보고 말하려는 습관을 들여라.
이러한 습관은 당신 스스로를 잘 케어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상대에 대한 큰 배려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벌어질 수 있는 소소한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가령, 내가 꼭 필요해서, 친구를 좀 만나고 싶을 때, 그래서 시간 약속을 잡고자 할 때,
성급한 마음에 너무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혹은 이 말을 문자나 카톡을 보내었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오늘 12시에 시간이 되면, ~ 근처에서 좀 만나자.”
그 대답이 돌아왔다.
“나 오늘 12시에 다른 약속이 좀 있어!”
이렇게 되면, 만날 수 있는 분위기에 매우 유쾌하지 못한 금이 가게 되어버린다.
잘하면, 만날 수도 있는 기회에 마치 찬 물을 끼얹어 버리는 격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한 제안의 구체성으로 인하여, 자칫 오늘 꼭 만나고 싶어 하는 네 속마음이 들켜버리기도 쉽다.
그런데, 그 친구는 12시라는 시간이 문제일 수도 있고, 장소가 문제일 수도 있고, 당신만의 입장에서 너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질문 그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당신이라는 인간 자체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상대가 아주 까다롭다면, 차라리 이렇게 한번 해 보아라.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시작해 보아라.
친구가 거절할 가능성이 있음을 잘 예상하고서, 일단 점진적으로 입장을 좁혀 들어가는 방식이다.
“우리 오랜만에 좀 만날까?”
당신의 이런 유형의 질문에 친구는 다짜고짜 “싫어!”라고 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개는 “언제?”라고 물어올 것이다.
그럼, 이렇게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
“언제가 좋을까?”
“오늘은 안 되고, 내일은 아직 잘 모르겠고, 모레 정도는 괜찮을 수도 있어!”
“좋아! 그럼, 모레로 하자!, 그런데, 몇 시가 좋아?”
“12시쯤이면 어때?”
이런 식으로 서로의 가능한 입장을 좁혀 들어가는 방법이다.
만약, 친구가 12시가 아닌 다른 시간을 원하면, 서로 시간 조율만 잘해 나가면 될 것이다.
이른바, 바둑으로 치면, 포석을 잘 두는 형국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방법은, 매우 까다로운 상대에 대해서 마저도, 상대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해 주면서, 자신의 목적을 아주 요령 있게 달성해 나가는 방식이며, 상대에 대한 ‘큰 배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렇게 앞을 다소 내다보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 방식은 당신이 말을 바꾸어야 할 상황을 최소로 줄여 줄 것이며, 또한 당신이 이런 말, 저런 말로 변덕스럽게 입장을 바꾸어야 할 상황도 결코 없도록 많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 누구든 차별 없이 대하여라.
비근한 예를 몇 개 들어보자.
국회의원에 출마한 한 후보자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그런데, 여러 행인을 대할 때마다 그 자세가 매우 달랐다.
양복 차림의 신사에게는 인사를 90도로 깍듯이 하고, 말끔한 평상복 차림의 어떤 사람에게는 인사를 45도 정도로 적당히 하고, 아주 허름한 복장의 행인에게는 인사를 10도 정도로 그냥 까딱한다고나 할까, 그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건네고 있는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자.
이러한 인사는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행위일 수 있다.
그 행인들이 유권자임을 떠나서도, 인간으로서도 모두가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함이 아주 당연할 터인데, 그러한 차별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자기 속에 매우 차별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은, 적어도 인격적 측면에서는, 이미 국민의 대표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과의 통화 시에는 ‘선생님’이라는 아주 깍듯한 호칭을 써가며 매우 공손하면서도, 많은 감탄과 칭찬이 섞인 말투로 통화를 하다가,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거만한 태도로, 마치 침을 뱉어내듯이 투덜대면서 통화를 하고 있는 상황을 한번 가정해 보자.
물론, 통화하고 있는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나 구체적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통화의 예절이나 말투의 수준이 같을 수만은 당연히 없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통화하고 있는 사람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침이 마르게 감탄과 칭찬을 늘어놓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안하무인’ 격의 말투를 마구 쏟아내는 태도는 대체로 그 사람의 인격적 결함을 심히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는 그 누구를 대하더라도, 인간적 존재 자체만으로도, 일단 존중의 마음을 그 바탕으로 깔아야 함이 아주 마땅하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최대한 차별 없이 대하려 해야 하는 것이지, 이리저리 상황이나 조건에 너무 휘둘리거나, 사람의 지위나 행색에 따라 너무 차별적으로 대하려는 태도는 차라리 추한 모습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누구에게든, 아주 동격으로, 동일한 대우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상대하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천차만별로 자기 태도나 말투를 정반대 방향으로 마구 바꾸려 하는 것은 차라리 ‘자기 위선’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니, 가급적 윗사람에게나, 아랫사람에게나, 그 어떠한 지위의 사람에게도 항상 공손과 존중의 마음을 그 바탕으로 할 수 있도록, 자기 태도와 말투를 잘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다.
더욱 바람직하게는, 당신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항상 최고로 대하여라.
누구에게나 최고로 대접하는 당신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최고의 인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자세야말로, 당신이 평생을 통해 스스로의 입장과 태도를 전혀 바꿀 필요가 없는 아주 반듯한 자세이지 않겠는가?
넷째, 말을 예쁘게 하여라.
당신의 말이 예쁘지 않으면 않을수록, 당신의 말이 즉흥적이면 즉흥적일수록, 당신의 말이 거칠면 거칠수록 다시 주워 담아야 할 가능성이 상당히 커지게 마련이다.
상대에게 아주 거친 말을 하여 결국은 나중에 사과해야 하거나, 제삼자에게 친구를 험담하게 되었는데, 이게 친구가 알게 되어 아주 난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고 결국은 사과를 해야 하거나, 정치인이나 사회의 리더급들이 누구를 비방하거나, 마치 혹세무민(惑世誣民)이나 자기기인(自欺欺人) 등을 마구 행하다가, 이게 부메랑이 되어 다시 자기가 비난받게 되고, 결국은 유감의 표명 혹은 석고대죄라도 해야 하는 상황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애초부터, 항상 말을 예쁘게 했다면, 자기가 한 말을 다시 주워 담을 방법에 대해 그토록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고, 결코 이런 유형의 사과나 유감 등의 표현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자기 말이 매우 즉흥적이고, 거칠었던 이유로, 이런 안 해도 될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겠다.
유사한 사례를 하나 꺼내 보자.
내가 출장차 어느 열차역 근처에 있는 한 카페에 들렀을 때, 그 매장 직원은 내가 주문한 커피를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커피를 갓 내렸기 때문에, 상당히 신선하고 맛이 있을 거예요!”
이 얼마나 예쁜 말인가?
매장 직원의 이러한 예쁜 멘트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날 내가 마신 커피는 유난히도 달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만약, 그 매장 직원이 내게 커피를 건네면서, 다소 퉁명스러운 말과 표정으로 내게 커피를 건네주었다면 과연 그 커피의 맛이 어떠하였을까?
이런 경우라면, 그 맛이 매우 쓰거나, 심지어는 끔찍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관점이 하나 더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예쁜 말을 하게 되면, 자기 행동의 실수도 거의 없을 것이다.
매사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손님을 위한 태도가 각별하였을 것이니 말이다.
반대로. 거친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수나 사고를 유발할 가능성도 커진다.
자칫 손님에게 커피를 건네면서 쏟거나, 넘치게 하거나, 심지어는 커피잔을 넘어뜨리는 실수도 범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는 모두 비슷하다.
비즈니스 세계이든, 정치 세계이든, 산업 현장이든 간에, 말을 예쁘게 하면 할수록 사과나 유감을 표명할 일도 거의 없고, 그런 것을 요구할 일도 거의 없다.
또한, 사고나 실수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섯째, 난관에는 기꺼이 “가치형 돌파(열린 돌파)”를 택하여라.
자기가 현재 하고자 하는 일이 막히게 되었다면, 더 이상 나아가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면, 그래서 마치 ‘사면초가’의 상태가 도래하였을 때, 당신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겠는가?
그 선택지는 아래와 같다.
먼저, ‘회피형’이다.
이 방법은 어렵고 아주 골치 아픈 일에 대해서, 일단은 회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형태이다.
매우 가벼운 생각의 심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회피형은 사태의 해결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개념이 될 것이며, 나중에 가면 갈수록 문제가 더욱 덧나기도 쉽다.
문제를 그냥 방치해 두는 격이 되기 쉬워, 더욱 곪아 터지기 십상인 형국이다.
그러니, 나중에는 매우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잠시 동안의 시간을 벌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이 방법을 활용하려 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수 있다.
그다음, ‘막무가내형 돌파’이다.
이 방법을 택하는 것 또한 아주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제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부딪히고 보는 막무가내형 돌파는. 그 의지나 뜻은 매우 가상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실제의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큰 무리가 따를 수 있는 그야말로 엉터리 방법이기가 쉽다.
무작정 부딪혀 마음의 상처가 더욱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니, 자칫 자기 마음의 상처를 더욱 크게 키우게 되는 그러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다음은, ‘잔머리형 돌파’이다.
이는,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에 해당한다.
이른바 ‘잔머리 굴리기형 돌파’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철저히 계산적인 방법에 해당한다.
이 방법은, 그 선택의 득실과 관련하여 자기 나름의 계산을 열심히 한 후, 많은 잔머리를 굴려 선택하는 방법이므로, 내심 매우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잔머리는 그냥 잔머리일 뿐, ‘소탐대실’이 되기가 매우 쉬운 방법이다.
얄팍한 잔머리로,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선택한 것이 나중에는 애물단지 혹은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치형 돌파’이다.
이는, 어떤 문제나 사태의 본질을 관통하는 가치를 따르려는 그러한 돌파에 해당한다.
즉, 보다 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에 접근하여,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는 그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접근법은 가장 근원적인 부분을 먼저 해결하려는 방법이므로, 한번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만큼 재발이나 뒤탈도 적을 수 있다.
또한, 이는 해당 문제의 본질적 가치를 잘 따르려는 방법에 해당한다.
자신의 금전적 부분 혹은 이해득실과는 아주 무관한 방법에 해당한다.
설령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심지어는 내가 좀 더 고생을 많이 하게 되더라도, 오로지 정상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을 원칙적이고 반듯하게 해결하려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특히, 상대에게 부당하게 손해를 입히게 하거나, 변칙적인 방법은 절대 동원하지 않는 그러한 방법이다.
오로지, 매우 솔직하고, 핵심적 해결 가치에만 집중하는 그러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방법은 회피형보다, 막무가내형 돌파보다, 잔머리 굴리기형 돌파보다, 아주 자신에게 강력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방법은, 과연 회피형보다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게 되어 맞부딪혀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어 좋을 것이고, 막무가내형 돌파보다는 스스로가 겪을 수 있는 소모적 상처를 매우 줄일 수 있어 좋을 것이며, 잔머리 굴리기형 돌파보다는 보다 더 핵심적인 문제 혹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 매우 좋을 수 있다.
즉, 이러한 가치형 돌파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그 문제 중 가장 핵심이 되고 있는 요체를 해결해 내는 방식인 것이다.
특히, 이 방법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 절대 차등을 두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마저도 너무 한쪽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서,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열어 두고서, 그들을 종합적으로 잘 참조하여, 필요시 많은 부분을 주변에 공개도 하여, 오직 본인의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직관력과 통찰력의 힘으로 그 핵심을 관통해 나가는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가치형 돌파를 마치 ‘열린 돌파’ 혹은 ‘안과 바깥이 모두 투명한 돌파’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모든 가능성을 공정히 열어두고, 아주 객관적이고 투명한 방법을 통하여 천천히 판단을 내리려는 방식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가치형 돌파’에 있어서, 무슨 변덕스러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슨 마음의 심한 동요나, 오락가락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기 삶의 여러 문제나 난관에 직면하여서도, 이러한 가치형 돌파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일관성을 가장 지속해 지켜나갈 수 있는 그러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단지 이 과정에서, 아무리 가치형 돌파 혹은 열린 돌파를 잘 선택하여 매우 객관적이고 공정해지려 하여도, 자기주장보다는 상대방의 주장에 일단은 더 무게를 두고 협의도 하고, 안건의 수렴도 해 나가야 한다.
항상 순간순간은 손해를 좀 본다는 느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점차 간격을 좁혀나가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참외밭에서는 신발 끈을 고쳐 매지 않고,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아야 한다)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고, 당신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바를 주변과 별 마찰 없이 자연스럽게 얻어낼 수도 있겠다.
세상에, 일이라는 것은,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결국은 사필귀정으로 자기 자리를 잡아갈 수 있겠으나,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게 되거나, 상대에게 큰 미움을 사서, 결국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어떠한 형태로든 제대로 된 복구는 거의 어려운 것이 아주 ‘인지상정’ 일 것이니 말이다.
지금까지, 항상 변함없는 마음과 변함없는 인품을 잘 지니기 위해서는, 평생 변함없이 자기 뜻을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관점과 사례들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주의할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너무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을 지니게 되면, 자칫 당신의 그러한 마음을 역이용하려는 자가 생겨날 수 있다.
이들은 대개, 당신의 스타일을 미리 짐작하여,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이용해 먹으려는 심보를 지닐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마음이 항상 변함없이 한결같더라도, 이를 너무 표시 내거나 강조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저 그러한 인품을 당신 마음의 베이스로 잘 깔아서 아주 은은하게 향유할 수 있으면 된다.
아무리 좋은 일에도 아주 이상한 마찰과 부작용을 만들어 내려는 자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이러한 매우 엉뚱한 존재들을 잘 뿌리치고서, 또 결코 이런 작은 문제에 너무 예민해지지도 말고서, 무릇 당신 스스로의 모습과 인품을 잘 완성해 나갈 수 있어야 하겠다.
또 다른 주의점으로는, 변함없는 마음 그 자체는 참으로 훌륭하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너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경직되어 있으면 안 된다.
즉, 길게 보면, 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을 터인데, 매우 역설적이게도, 당신의 변함없는 마음 또한 왜 변하지 않겠는가?
차리리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당신의 변함없는 마음이 시사하고 있는 그 본뜻은 그대로 유지하되, 그 마음의 수준은 항상 더 상승적으로 업글해 나가야 한다.
차라리 스스로 적극적으로 변하려 하고, 항상 스스로 업글해 나가려 하여라.
즉, 항상 알을 깨고 나와, 더 큰 자아를 지속해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니,
당신의 변함없고 그윽한 마음이 끝이 없어라.
그러한 그윽한 인품 또한 끝없이 유지하여라.
당신의 꿋꿋한 의지 또한 과연 끝이 없어라.
변화무상한 세태에도 항상 흔들림이 없이,
금전만능의 세태에도 아무런 요동도 없이,
그 어떠한 내둘림도 당하지 않고서, 자신을 온전히 지켜 내어라.
친구에게나 이웃에게나 언제나 변함없는 당신으로 남아있게 하여라.
언제나 변함없이 따스하고 존경받을 만한 당신으로 남아있게 하여라.
이런저런 많은 고난과 시련의 세상사에도 결코 그 어떠한 휘둘림이나 변덕스러움 조차 없어라.
당신의 마음과 인품, 그리고 큰 뜻이 과연 변함없고 끝없이 이어지게 하여라.
"보다 더 큰 자아를 위한 당신의 큰 의지가 계속 새로운 깨우침과 가치의 고리를 만들어 가며, 아주 끝없이 이어지게 하여라.
이러한 변함없는 모습이 바로, 항상 세상의 진실과 진리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려는 당신의 숙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