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원죄를 만들지 마라

살아가며 스스로 원죄를 절대 만들지 말아라!

by 신정수

조선은 나라를 세운 1392년부터 1897년 종말까지 내내 ‘정몽주 시해’라는 원죄에 시달린 왕조라고 할 수 있다. 정몽주는 쿠데타(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1392년(공양왕 4년) 4월 이성계에게 문병차 들렸다가 돌아가던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살해된 고려의 충신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충신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인물이다.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奠邑興; 이 씨는 망하고 정 씨가 흥한다)이라고 주장하는 정감록의 정 씨는 주로 정몽주 후손들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정감록은 주로 조선 후기의 역모 사건이나 민란(정여립 역모 사건, 장길산의 난, 홍경래의 난, 문인방 사건, 동학농민운동 등)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미 조선 초기부터 그 원형(정감록과 비슷한 내용의 예언서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조선 초기부터 고조선비사, 대변설, 지화록, 도선한도참기 등 정감록과 관련된 서적들이 민간에 많이 돌아다녔다는 기록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정몽주 살해사건이라는 원죄의 계속되는 불길에 더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단종 시해 사건이다. 삼촌인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내고 끝내는 무참히 죽인 사건으로써 이 씨 왕실의 도덕성과 민심은 땅에 곤두박질쳐진 것이다. 후에 단종 복위운동(사육신, 생육신 등), 이징옥의 난 등에서 보듯이, 삼촌인 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유배 생활을 하다가 결국 비명에 숨진 단종에 대해 유생들과 백성들은 과연 눈물의 통곡과 절규를 하였던 것이다.

인생에서 원죄를 만들지 마라.jpg 원죄(그림:.nytimes.com)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삼촌이 황제인 조카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유사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명나라 건문제는 삼촌인 영락제와 처음에는 대등하게 싸우다가 결국 남경이 함락되고, 스스로 궁전에 불을 지르라 명령하였으며, 이후 실종되어 그 행적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정난의 변)은 민심의 동요나 도덕적 엄청난 후유증 등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예로서도, 삼촌인 숙종(고려 15대)이 조카인 헌종의 왕위를 찬탈한 일이 있었지만, 헌종은 그 후 병사로 죽었으며, 조선의 단종처럼 무참히 시해되거나 도덕적인 엄청난 후폭풍과는 거리가 있었던 사건이었다.

또, 고려 공민왕의 경우에는 당시 원나라 간섭기라는 극심한 정치혼란기이었고, 왜구가 영·호남 해안가 전역을 습격하는 등 피해가 엄청나게 가중되는 시기였기에, 윤택과 이승로가 원나라 황제에게 “충정왕이 나이가 어려 국정을 감당할 수 없으니, 제발 왕을 바꾸어 달라”고 간청을 하여 공민왕(고려 31대)으로 왕위가 계승된 것이어서 조카 폐위에 대해 민심은 들끓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정몽주와 단종 시해 사건은 조선 왕실의 도덕성과 민심을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하였고, 나아가 왕조의 정통성까지 부정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는 조선 500년 역사 내내 원죄로 작용하여 왕조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수많은 민란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원죄적 사건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일들이 우리의 개인적인 일상에서도 많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상대에게 너무 심한 상처를 줄 수 있는 말과 행동은 반드시 자제를 하여야 하고, 무심코 당신이 던진 돌에 맞아 개구리는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처럼 항상 사려 깊게 행동하고, 특히, 당신께서 사회적으로 많이 배웠거나, 많이 가진 자라면, 이는 사회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은 것으로 스스로 인정하여 많이 감사해야 하며, 더욱더 당신의 행동거지에 갑질이 없도록 삼가는 마음을 가지고, 항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마땅히 실천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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