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을 넘어 참된 마음을 가져라!
사람은 누구나 좀 배우고, 좀 알게 되면, 혹은 많은 것을 가지게 되면 일단 오만해지기가 쉽다. 남들보다 더 성공하였으니 심리적으로 잘난 행세를 하고 싶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랑할만하다고 생각한 결과, 남의 말에는 귀를 열지 않고, 남들을 무시하고, 오만해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사회생활에서 이러한 행실은 상대방을 많이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며, 사회적 관계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전라남도 해남에 대흥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거기에 걸려 있는 ‘대웅보전’이라는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남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다. 원교 이광사는 조선 후기 문인으로서 향토적 글씨로 독특한 서체를 이룩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런데 훗날 제주도로 귀양 가던 도중 추사 김정희가 대흥사의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들렀다가 이 편액을 보고, 조선의 글씨를 몽땅 망쳐 놓은 이광사의 편액을 당장 떼어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주장은 그대로 실행되어졌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혹독한 귀양살이 8년 후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서 예전의 경솔함을 사과하였고, 이광사의 글씨를 다시 원래의 자리에 걸어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사과의 뜻으로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을 써서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이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엄청난 외로움과 서글픔으로 가득했던 생활을 하면서 뭔가 깨달음이 컸었고, 또한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하고, 예술의 경지에 이르면서 겸허해진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현재도 ‘대웅보전’이라는 편액 옆 스님들의 거처인 백설당에는 ‘무량수각’이라는 글자로 남아있다. 이광사와 김정희가 한 공간에서 글씨로써 나란히 사이좋게 마주하게 된 셈이다.
김정희는 유배 전 대흥사 외에도 전주에 사는 ‘유수체’로 유명한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보고는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고 살 만한 서생의 글씨’라고 면전에서 무시한 적이 있었다. 이 사건 역시 제주 귀양살이 후 창암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 지난 일을 진심으로 사과하러 전주에 들렀더니 창암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평소 거만했던 세기의 천재도 엄청난 시련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예술 세계를 경지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고, 그 태도 또한 매우 겸허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같이 사람은 자기 예술의 세계가 매우 깊어지거나, 학문의 세계가 어느정도 경지에 가까이 이르게 되면, 마음속에 드디어 깨달음을 갖게 되고, 겸손해지며, 언행과 태도가 비로소 따뜻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청나라에 자주 다녀와서 국제적인 감각을 배우고 세련미를 갖춘 추사 김정희로서는 향토색 깊은 이광사나 이삼만의 글씨는 아마도 '촌스럽게' 느껴졌을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혹독한 유배 기간 동안 공부와 예술을 거듭해보니 안목이 넓어져서, 그런 향토적이고 촌스러워 보이는 서체도 나름의 차별화 되고 뛰어난 예술적 가치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사과를 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겠다. 즉,
“교만은 곧 지옥이고, 겸손과 깨달음만이 그 유일한 탈출구이다!” - Pa say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