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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수 May 01. 2023

네 삶이 아름답게 빛나게 하여라

네 삶이 과연 아름답게 빛나게 하여라!


 살면서 네 삶에 멋진 작품을 많이 올려놓아라!  

   

 살아가며 자기 작품을 많이 만들어, 네 인생의 옥쟁반 위에 올려놓아, 네 생(生)이 과연 풍요롭게 빛나도록 하여라!     


 아마 자기 인생에서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많이 남기는 것 이상의 보람된 인생은 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든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 의미 있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무엇에 대해서도, 실체의 껍데기나 외관만을 보고 만든 작품은 제대로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다소 베끼거나 표절한 것과 유사한 특징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소 가벼워 보이면서, 그 내포하여 주장하려는 바가 명료하지 못하고, 작품의 생명력도 짧을 것이며, 무엇보다 그 의미가 쉬이 퇴색되므로 존속 가치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본질적 가치에 충실한 작품은 추구하고자 하는 대상의 알짜 혹은 핵심에 다가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 내포하고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고, 존속 가치 또한 대단히 높을 것이다.

 과연 이러한 알짜나 핵심을 빼고서 무엇으로 그 주장하고픈 대상의 전체적 의미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또 이렇게 실체의 본질에 접근한 작품은 문제의 근본에 보다 접근한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대단히 길어서, 작자의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와 사상을 오랫동안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때에 따라서는 작자의 높은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함축된 의미로 담겨져 있어서, 작자의 작고 후에도, 오랫동안 작자의 전하려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전해지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 도(道)를 구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언제나 호소력이 진한 침묵의 소리로 그 뜻을 말해주고, 설명해 주는 듯하기도 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의미를 새로이 재해석도 가능할 것이고, 시류의 흐름에 따라서 추가되는 또 다른 의미를 계속해서 발굴해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본질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 본질은 항상 껍데기의 내부에 숨겨져 있으므로, 항상 쉬이 알아내기 힘들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질을 제대로 찾아내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진심을 담아라.

 여기서 ‘진심’이라 함은, 무엇에 임하든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관조하여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참된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만약 욕심이 네 눈을 가리게 하거나, 재물에 눈이 멀게 되면, 본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화려한 허상만이 보일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도모하여도 그 진실된 본질로의 접근은 요원할 것이다.  

 모쪼록, 깨끗하고 사리사욕을 모두 내려놓은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네 관심과 사유(思惟)를 원하는 분야에 투여한다면 언젠가는 네가 원하는 본질이 제대로 출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 삶에 멋진 작품을 올려놓아라”(그림;.ebay.com/itm)




 둘째, 가치를 담아라.

 자신이 도모하는 일이나 대상에 대해, 자신이 먼저 진실되고 올바른 가치를 명확히 정의할 수 있어야, 보고자 하는 대상이 그 본래의 속(본모습)을 제대로 드러낼 것이다.

 쉬운 예로서, 연필을 깎는 칼을 대할 때에도 자신이 진실된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 칼이 본래의 기능이자, 본래의 의도이기도 한 유용한 도구 혹은 가치 있는 용품으로서의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엉뚱하게 잔머리를 굴리거나, 엉클어진 가치를 조명한다면, 아뿔싸! 그 칼은 남을 해칠 수 있는 도구나 무서운 흉기로 돌변할 것이며, 이제 더 이상 본질(본래의 기능이자 의도)은 없어지고, 이상한 악마의 모습이 새로이 출현할 것이며, 이는 그 본질을 완전히 악의 장막으로 가려 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셋째, 결과보다 원인 혹은 의도를 보아라

 본질을 제대로 챙기려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그 대가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그 결과에도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가 남을 도울 때도, 그야말로 그 도울 사람을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하는 것이지, 그 도움의 대가에 눈독을 들이면 들일수록 그 도움의 감동적 의미(본래적 의미)는 어느덧 사라지고, 음흉한 구렁이 몇 마리가 내 마음속에 들어앉아 나를 괴롭힐 것이다.

 또한, 내가 어떤 가치를 좇아 열심히 그 도모하고자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우선이지,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너무 미리부터 신경 쓰거나, 걱정하는 것도 결코 좋지 못하다.

달리 표현하면, 내가 내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과 의도 그 자체에 우선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여야, 비로소 본질을 충실히 쫓을 수 있을 것이고, 나중에 그 결과는 덤으로 좋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넷째, 가식적 요소를 철저히 없애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좀 더 잘 보이기 위해서 자기 생(生)에 지나친 덧칠을 하고, 바탕을 완전히 가려 버리는 진한 화장을 하고, 온갖 방법으로 꾸미고, 왜곡하고, 마구 자랑하는 등 가식적 요소를 더하고 싶은 충동을 많이 받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네 삶에 가식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면 클수록, 나중에는 한순간에 허탈감이 몰려올 수 있을 것이니, 이 점을 꼭 경계하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본질에 제대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식적 요소를 벗어던지고, 보다 원시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가식적 요소를 철저히 없애는 순간, 비로소 당신은, 마치 맨살을 자신 있게 노출시켜, 어디에서 불어온 신성한 바람에 문지르듯, 진실한 본질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다소간에 추상적일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서 몇 가지 예를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이순신 장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진심을 가슴에 담았기에, 두 차례의 백의종군(억울한 사연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전투에 ‘졸병’의 신분으로 출전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매사 그러한 지극한 마음(진심)으로 모든 행함을 이루었으므로, 장군이 남긴 유무형의 작품(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첩들, 난중일기, 친필 휘호, 친필 장검 등)은 우리 역사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빛나는 명작으로 살아있다.

 아마 이 모두가 자신의 욕심이나 잇속을 철저히 벗어나서, 오직 진심으로 구국(救國)이라는 사명에 가치를 더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가치를 위한 도전 과정에서 결과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구국의 과정과 의도 자체에 진심을 다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놀랄 만한 성과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장군이 남긴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휘호가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영국의 처칠 수상의 경우도 이순신 장군의 사례와 다소 유사한 면이 있다.

 당시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큰 패전이라는 트라우마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가면서도,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가슴에 ‘나치(Nazi)’에 대항한 구국을 위한 진심을 속속들이 담았기에, 전직 ‘해군 장관’이라는 총지휘관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에 가까운 ‘중령’이라는 초라한 계급으로 총알이 마구 빗발치는 최전방의 참호를 이리저리 오가며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말단 현장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염병을 막아내기 위해 부단히 아낌없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승리’하는 큰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후에도 여러 곡절이 있었지만, 히틀러에 용기 있게 맞선 자유 진영의 최고의 영웅이자 ‘20세기 최고의 리더‘라는 정신적 유품(작품)을 남겼으며, 또한 노벨상에 빛나는 그의 문학작품, 회고록, 연설문 등도 많이 남겨 놓아, 오늘날까지 세계인들에게 읽히고, 자주 회자되고 있다.     


의사 출신의 이태석 신부는 남수단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훌륭한 제자를 많이 남겼다. 인명의 길고 짧음을 떠나서, 그는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것인가?

그의 제자들 중 이미 의사가 된 이도 꽤 있고, 의대에 재학 중인 이는 무려 45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이태석 신부가 생전에 남기고 간 훌륭한 인적 유품이자 작품인 것이다.

이들 제자들은 오늘도, 오직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봉사와 헌신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휘젓고 있다.     


 또, 작자의 이름이 일부는 알려져 있고, 더 많은 일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지만, 우리 역사 속의 수많은 서예 작품, 고전문학 작품, 고려청자, 조선백자, 기타 많은 건축물과 조형물 등을 창조해 낸 장인들의 흔적과 혼(魂)은 수천 년 이상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꼭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관점은, “자신과 자기 작품의 이름을 반드시 크게 알려야, 비로소 보람 있는 생(生)을 살았고,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름의 유명세와 무관하게 네 의도와 진정성은 이미 하늘에 닿아 있을 것이므로, 그 이름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며, 이미 네 아들과 딸을 포함한 많은 후세들이 훌륭한 당신을 따라서 많이 배웠을 것이며, 네 의지와 의도는, 유명세와는 무관하게, 이미 역사 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즉, 네 이름이 잘 알려지든, 안 알려지든, 유무형의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기고, 네 후세들이 그 흔적을 귀중히 간직하고,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 준다면, 그 자체가 이미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관점으로는, 뭐 그리 대단한 작품만 작품인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지내는 어떤 후배의 아버지는 암에 걸려 그 병마와 싸우면서도, 자신의 평생 주특기를 살려, 아주 훌륭한 집 몇 채를 지어 자식들에게 남겼다고 한다. 아마 자손들의 마음속에 대대로 그 훈훈한 정신과 감동을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출장 중 자주 찾아가는 지방의 어느 식당은, 가격은 비교적 싼 편인데, 손님에게 내어놓는 반찬은 맛나고도 풍성한 편인 그런 식당이다. 그래서 어느 날 주인에게 한번 물어보았다.


     “이렇게 다 푸짐하게 내어놓고서, 뭐 남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식당 주인은 그냥 빙그레 웃고만 있다가, 잠시 후 수수한 한마디를 꺼낸다.


   “손님이 이렇게 맛있게 드시는 것이 저는 제일 좋고, 그런 것이 보람입니다. ~ 고맙습니다!”


 식당 주인은, 돈 벌기보다 더 우선으로, 자기가 만드는 요리를 하나의 작품의 수준으로 귀하게 여기는 듯하다. 이른바 ’자기 자부심‘이다.

 어떻게 보면, 다소 평범하여 대단하지 않게 보여도, 이렇게 우리 주변에 자기 잇속보다 자기가 임하고 있는 일의 본질에 충실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의 이러한 진심 어린 자세가 지속되다 보면, 백 년 가는 가게, 혹은 그 이상 반열의 가게에도 충분히 한번 도전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약 350여 년 이상 이어온 경주 최부자집의 고택이 아마 그 유사한 좋은 사례일 것이다.

 최부자집 사람들은 재물을 모으되 만 석 이상을 모으지 말고, 많이 벌수록 많이 나누어 주라고 하였고, 손님이 찾아오면 항상 후하게 대접하라고 했고,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고 하여 오늘날 부동산 투기와 유사한 행동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평소 ’근검절약‘이 몸에 배도록 하라고 하였고, 특히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도 하는 등 참으로 대단한 훈계가 가문의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내 친구 중 하나는, 대기업 엔지니어로서 자신이 직접 정성 들여 설계 및 개발한 에어컨 제품이 전국 어디에도 많이 설치되어 있어서, 자신이 출장 중 문득 식사하러 들린 어느 식당에서 자신이 직접 탄생시킨 제품이 설치되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때, 기술인으로서 많은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마치 제품을 직접 개발하여 시장에 내어놓는 것이 자기 자식을 출가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아마 자신이 충심과 성심으로 탄생시킨 자기의 발명품이 고객에게 전해져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내면에서 흐뭇한 감동이 일어났으리라!

 이렇게 한 엔지니어의 충실한 작품(발명품)은 후에 있을 더 진보된 기술 작품의 선구자 혹은 어버이 역할을 충분히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기 자식 또한 큰 범주에서는 자기의 인적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들을 잘 뒷바라지해주고, 잘 성장시키고, 훌륭히 키워내어 이 세상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게 할 때, 부모로서 이보다 더 큰 보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이러한 고귀한 의지와 행적은, 자기 생명을 그 생전의 인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손들로 말미암아 대대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니, 얼마나 보람되고 대단한 일이겠는가?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는, 현생에서의 자기의 인적 작품을 포함한 유무형의 많은 작품들을 통해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이미 열려있는 것이다.

 누구나 이 길로 본질적 가치로서 다가선다면, 인명이 짧든 길든 간에, 아주 크고 의미 있는 행적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그것은 아마, 자신의 이 땅에서의 존재 의미, 혹은 자기 평생 가치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고, 영원히 사는 길이기도 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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