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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수 Nov 03. 2023

쭉정이 인격으로 살지 말아라

적어도 쭉정이 인격으로 살지는 말아라


  적어도 쭉정이 인격으로 살지는 말아라!     


  “그 사람의 인격을 보려면, 처지가 더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된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격이 있다고 하겠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너무도 그 종류와 구분법이 많아서, 짧은 글에서 일일이 다 살펴보기는 어렵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어떤 사람의 행실을 평생에 걸쳐 한번 정산해 보았을 때, 그가 타인에게 베풀어준 크고 작은 은혜의 양이 타인에게 피해를 준 양보다 훨씬 더 큰 인격(가치로운 인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가치로운 인격이야 말로, 이 세상을 단 한번 살면서도, 보통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서, 좋은 카르마를 세상에 듬뿍 뿌려놓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으며, 가히 크게 화려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평생을 후회 없이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 말년이 대체로 평화로울 수 있는 유형이다.     


  둘째는, 역시 어떤 사람의 행실을 평생에 걸쳐 정산해 보았을 때, 그가 타인에게 피해를 준 양이 타인에게 베풀어준 그 무엇의 양보다 훨씬 더 크다고 평가되어질 수 있는 인격(쭉정이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쭉정이 인격은 세상을 살며, 나쁜 카르마 혹은 악의 카르마를 보다 많이 뿌려놓은 경우로서, 대개 평생을 두고 자신이 치러야 할지도 모를 악행의 대가나 보복 같은 것이  두려워, 항상 마음이 편치 않을 수 있는 유형의 인격이며, 그 말년에, 더 이상 거리낄 것 없는 마음의 상태에서 회고를 한번 해보게 되면, 참으로 후회 막급하다고 스스로 느낄 수밖에 없는 인격이다.

  이른바, 이런 인격은 이 세상을 살며, 자타가 모두 아무런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는 유형의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치로움과 쭉정이의 갈림길(그림;.cfact.org/2020/07/21)


       

  물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평가할 때, 자신에게는 다소 객관적이지 못하고, 후한 평을 내릴 수가 있어서, 너무 쉽게 자신을 가치로운 인격이라고 평가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평생 공도 크고, 과도 커서 제로의 상태(엇비슷함)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가만히 얹고 고요한 상태에서 명상을 한번 해보게 되거나, 타인의 지적을 반추하여 잘 생각해 볼 때, 그러한 객관성이 결여된 평가는 충분히 스스로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위에서 언급한 ‘제로의 상태(엇비슷함)’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인격 또한 쭉정이 인격에 지나지 않음이다.

  즉, 남들에게 베푼 은혜가 아무리 크더라도, 타인에게 가한 피해 또한 그만큼 크다면, 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역시 별 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우니, 그냥 쭉정이 인격으로 평하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우리는, 단 한번 세상을 살아가며, 가치로운 인격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었다면, 자신에게도 매우 행복하고 보람 있는 생(生) 일 것이고, 남들에게도 축복이 되어줄 것이겠지만, 개인적 혹은 사회적으로도 주로 문제가 되는 쪽은 ‘쭉정이 인격’으로 산 경우일 것이다.     


  혹자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자기는 비록 쭉정이 인격으로 살았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자기 스스로의 가치에 충실하여 한평생을 살았노라고 하소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의 가치에 충실한 삶이라는 것은 적어도 쭉정이 인격이 아닌 경우에나 어울릴 수 있는 말인 것이지, 어디 쭉정이 인격으로 살았으면서, 자기 스스로의 개인적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며, 차라리 ‘어불성설’이라고 하겠다.

  즉, 자기 생을 과연 쭉정이 인격으로 살아왔다면, 자기 개인적 삶의 가치를 이리저리 돌려 말하기 이전에, 이미 객관적 평가 기준에 미달된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면,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정산해 볼 때, 자타가 인정하여 ‘쭉정이 인격’을 적극적으로 피하고,‘가치로운 인격’으로 살아왔노라고 평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독자님들과 가치로운 인격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선(baseline)을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거들먹거리지 말아라.     


  간혹 자신의 잇속이나, 가오(자랑, 허세 등)를 위해 남에게 거들먹거리는 자가 제법 있다.

  이러한 인격은 참으로 못난 인격일 것이며, 거짓된 인격 혹은 엉터리 인격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인격의 근본적 특징은, 보통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서라면 상대의 입장을 깔아뭉개는 경우도 많이 있다.     


  대개 이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뛰어나거나 잘난 사람에게는 함부로 거들먹거리지 못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이나 가오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마구 자기 능력과 세치 혀를 휘두르려는 경향을 띤다.

  때로는 부탁조로, 때로는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은 후 협박조로 상대를 무너뜨려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 하는 인격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쪽은 자기보다 물질적이거나 혹은 정신적인 면에서 많이 처지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경우일 것이다.

  만약, 그 약한 자가 어떤 허점이나 약한 고리라도 노출하게 되면, 더욱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상대방을 결국 넘어뜨리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려고도 한다.

  보통 이러한 행동은 상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거의 못 느낀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면, 아무개 사람이 어떠한 인격의 소유자인지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그 사람이 자신보다 처지가 더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는 것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인격의 소유자라면, 아마 자기보다 여러 면에서 처지가 약한 사람을 보게 되면, 혹시라도 자신의 행동이 거만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혹은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말이나 행동거지 등을 조심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함에 있어서도 자랑으로 들리지 않게 조심하고, 상대방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조신하고, 또 항상 무엇인가 도와줄 거리가 없는지를 찾아보려고도 애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쭉정이 인격의 소유자라면, 이와는 정반대로, 자기보다 처지가 약한 사람일수록 더욱 오만해지거나 거만해져, 마구 거들먹대려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슨 작은 빈틈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이때다!” 싶어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어 더욱더 아프게 하거나, 몰아붙일 수도 있는 것이겠다.

  이런 사람들의 안중에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높은 곳으로 향하는 사다리만 보이는 것이고, 주변 사람들의 처지나 소외된 사람의 입장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반드시 주의해야 할 관점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절대 거들먹거리지 않게 보이며, 매우 점잖고 배려심 있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러한 행동을 자기 본래의 진심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이익이나 가오, 마음의 허영 등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행하는 인격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은, 자칫 그 진정성의 유무를 판단하기가 매우 힘들어도, 항상 남들에게 보여주기식의 단순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하겠다.     


  즉, 일반적 행동에 있어서, 다소 부자연스럽거나 지나침이 심한 경우가 많고, 늘 자신의 행실을 사진이나 영상에 담아 지나칠 정도로 홍보하려는 경우도 많으며, 특히 힘 있는 자에게는 머리를 과도하게 숙이기도 해 보인다.

  또, 장기적으로는 결국 자기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들게 되며, 그래서 그 숙이거나 점잖게 행동하는 모습 또한 그 누구에게도 오래 유지해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인격 또한 매우 못난 인격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쭉정이 인격에 다름 아니니, 아주 경계해야 할 인격인 것이겠다.     


  둘째, 기회주의적 인격을 거부하여라.   

  

  기회주의적 인격 또한, 늘 자기 입장 본위의 사고와 행동을 하며, 그래서 타인에게는 인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 한술을 더 떠서, 행동의 방향이나 성향이 일정하지 않아서 매우 예측하기가 힘들며, 언제라도 기회가 되면 상대를 사정없이 깔아뭉갤 수도 있는 인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기회주의자들의 또 다른 특징은, 매사 위선도 마다하지 않아서,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못하는 모습 혹은 말과 행동이 정반대로 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대인관계에서는, 그 상대가 아무리 다짐을 굳게 받아 놓아도, 나중에 딴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또, 이들이 아주 잘하는 것은 베끼기와 아부이다. 이런 것에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내면을 철저히 숨기려 할 것이고, 그래서 철저히 위선의 가면을 쓰기도 하며, 마치 자신의 ‘영혼’까지도 팔아넘기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괴테의 ‘파우스트’ 이야기를 잠깐 도입해 보자.


  주인공, 파우스트가 자신의 영혼을 메피스토펠레스(악마)에게 팔아서, 양약을 먹고 젊음을 얻어, 천상의 미인인 그레트헨과 헬레나 등을 만나 밀회와 온갖 쾌락들 즐기게 되고, 또 큰 전투에 나가서 황제를 도와 승리를 이끌어 내고, 그 논공행상으로 아주 넓은 영지를 얻게 되었으나, 이에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어느 노부부의 땅을 탐내다가 그들을 죽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며, 만족이라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파우스트와 헬레나의 사랑(그림; pixels.com/featured)


     

  물론 작품에서는, 파우스트가 악행을 반성하고, 해안가 땅을 개간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인류애’를 보여줌으로써 결국 구원을 받게 되도록 설정되어 있지만, 어쨌든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영혼을 팔아가며 쾌락을 즐기고 만족을 채우려 하여도, 그 만족의 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인간이 쾌락과 만족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끝없이 방황을 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인간은 결국 파멸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작품 속에 강하게 녹아있다고 하겠다.   

  

  물론 사람은, 다른 한 측면으로는, 누구나 영악해질 수가 있어서, 기회주의적 인격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때 잠시 실수로 인하여 빠져든 기회주의의 길이라면, 용서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평생을 통틀어 ‘쭉정이 인격’을 견지한 기회주의자였다면, 이는 결코 용서받기 힘든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 남을 핍박하지 말아라.    

 

  위에 언급한 두 가지의 쭉정이 인격(거들먹거리지 인격, 기회주의적 인격)은 인간이 인간인 이상, 일부 그러할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핍박하는 인격(핍박형 인격)만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다.     

  이러한 인격은 보통 막무가내식의 인격으로서, 그야말로 상대방과 원수 지간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의 뜻에 반하는 자에 대해서 일단은 무차별적으로 괴롭히려 하며, 그래도 안 될 경우에는 상대의 존재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즉, 같은 인간이라면, 그 누구에 의해서도 존귀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며, 결코 그 어떤 핍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이상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마치 철저히 자신만을 위한 마녀사냥식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며, 상대의 정신마저도 빼앗으려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의 이유로도, 인간은 결코 다른 인간에 의해서 핍박되어질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과거 공산주의의 인민재판 혹은 중세의 종교재판을 떠올리게 하는 마녀사냥식의 핍박이 오늘날에도 음지에서 버젓이 행사되어서는 절대 안 되겠다.

  그리고, 오늘날에 주로 저질러질 수 있는 심각한 핍박의 종류로서는 노동착취, 성적 노리개, 잔혹한 막무가내식 범죄, 그루밍(grooming) 범죄, 기타 다양한 종류의 인권유린 등이 있을 수 있으니, 이러한 행각을 특히 주목하고 주의를 해나가야 하겠다.     


  그럼, 이러한 핍박의 사례와 유사한 역사적 사건을 하나 예로 들어보자.

  현재 여주에 위치하고 있는 영릉(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은 원래 서울시 내곡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세조대에 이르러 영릉의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크게 대두되었으나, 세조 당시에는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가, 예종 1년에 결국 여주로 옮겨 천장되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조선 8대 임금인 예종이 묘소의 주인공이었던 이인손(광주이씨)의 아들, 이극돈을 불러들여, 마구 핍박을 하여, 억지로 양보를 받아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만 하여도, 지엄한 나라님이 묫자리를 내어놓으라고 하는데, 어디 일개 개인이나 가문 따위가 여기에 반기를 들 수 있었겠는가?     


  이런 일을 일러, 흔히 참상핍하(분수에 맞지 않거나, 타인을 핍박하여 자리를 빼앗는 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당시 그 가문에서는 참으로 하늘이 꺼지고 땅이 노할 일(경천동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천장 이후에 예종은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젊은 나이(20살)에 승하한다. 또한, 이에 연이어 온갖 국정 혼란이 초래된다.     


  즉, 성종이 계비 윤씨를 폐출한 일(폐비 윤씨 사건), 연산군의 엄청난 폭정, 중종반정, 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독살설이 전국으로 퍼진 일, 불붙은 사화와 그로 인한 피바람 등으로 온통 혼란과 국정난맥이 그야말로 난리였던 것이다.  

  역시, 비정상 혹은 핍박은 또 다른 비정상이나 핍박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요즘의 장묘문화는 예전과 달리 그리 엄격하지가 않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위의 충격적인 참상핍하를 제대로 잘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15세기 당시만 하여도, 조상에 대한 장묘문화나 음택풍수(풍수지리에 의한 묏자리 잡기)는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라, 왕실의 이러한 처사는 그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나 가문에게는 실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 자명하다.  

   

  결론적으로 볼 때,

  우리는 생(生)을 단 한번, 그것도 아주 짧게 살지만, 이를 가치로운 인격으로 살아낸다면, 당신의 말로가 아주 안녕하고 평화로울 것이겠지만, 마치 쭉정이 인격으로 살게 된다면, 생의 의미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며, 나중에는 “나는 내 인생을 과연 헛살았구나!, 후회스럽다!”라며 크게 푸념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늘 일일신우일신의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하여, 쭉정이 인격만은 꼭 피해야 하겠다.

  즉, 상대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철저히 자기 잇속 챙기기 위주의 거들먹거리지 인격, 선한 양의 가면을 쓴 기회주의적 인격, 도무지 막무가내식의 핍박형 인격은 절대적으로 피해나가는 것이 좋겠다.

  이는 당신이 스스로의 인생에서, 그 아름다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지노선과도 같은 아주 중요한 기준선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당신의 가치로운 인격만이 결국 가치로운 생을 남길 것이며, 당신에게도, 이웃에게도 큰 축복이 되어줄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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