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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uyt Jan 21. 2017

축구로 영국 채우기 (4)

4 - EPL에서 홈팀이 이길 수 있나?


이제 열두 번째 날이다. 이날은 맨체스터의 두 경기장과 맨체스터 축구박물관까지 돌아보는 게 목표였지만, 맨체스터 축구박물관은 시간 관계상 찾지 못하였다. (사실 방탈출 한번 더 한다고 오기 부리다가 못 갔다.)


 첫 번째 일정은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이었다. 워낙 방송에서도 그렇고 매체에도 노출이 많이 된 곳이라 딱히 가보고 싶다거나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동승자가 맨유의 팬이었으므로 찾아가기로 했다. 리버풀에서 신나게 끌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경기를 볼 경기장은 미리미리 찾아가 보는 게 경기 당일날도 편하니까.  


 올드 트래포드나 에티하드 스타디움 모두 트램으로 찾아가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올드 트래포드는 조금 걸어야 하고,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정말 바로 경기장 앞에 역이 있다. 맨체스터 시내에서 노선만 헷갈리지 않는다면, 편하게 찾아갈 수 있다.

 

Old Trafford


 맷 버스비 거리를 지나 올드 트래포드로 향했다. 첫인상은 크고 깔끔하다는 느낌이었다. 경기장에 왔다는 생각보다는 에펠탑이나 빅벤처럼 유명 관광지에 온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에 이적할 때 즈음하여 내가 해외축구를 접하기 시작했으니, 어릴 적에 티비에서 자주 접했던 기억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구장이 워낙 크다 보니 빙빙 돌다 겨우 투어 판매소를 찾아 투어 예약을 하고, 경기장 주변을 둘러보며 기다렸다.


아잇 눈부셔


 영국 치고는 날씨도 기온도 참 좋았지만 사실 올드 트래포드 투어는 내게 별다른 추억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로프터스 로드, 스탬포드 브릿지와 함께 실망스러웠던 경기장으로 기억될 뿐이다. 내가 맨유라는 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었겠지만, 경기장을 그다지 내어주려 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있었고 가이드 분도 조금 불친절한 모습을 보였었다. 물론 즐거운 추억이었지만, 크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알렉스 퍼거슨 스탠드가 보인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클럽이 워낙 큰 클럽이기 때문에, 그 역사와 전통에서 나오는 이야깃거리들을 무시할 수많은 없다. 분명 즐거웠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지만 전날에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기도 하고, 주류 클럽들을 기본적으로 꺼려하는 내 반골기질이 이곳에서 제대로 발휘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 영국을 돌아보며 맨체스터 근처를 찾는다면, 꼭 찾으라고 해주고 싶은 곳이다. 굳이 축구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박물관에서 박지성의 흔적을 찾아보고, 거대한 메가스토어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물건에 맨유 엠블럼이 찍힌 것을 구경한다면 분명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다음날 경기를 보러 올 예정이었기에 뱃지와 함께 머플러를 구매하였는데, 이날은 제대로 비뚤어져 있었는지 메가스토어도 박차고 나와 경기장 앞에서 머플러를 파는 청년에게 구매하였다. 그것도 빨간색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맨유의 전신은 뉴튼 히스를 상징하는 노란색-초록색 패턴의 머플러를. 맨유 팬들, 특히 오랜 팬들이 우승을 축하하거나 현재 구단주인 글레이저 가문에 대한 반감을 표시할 때 사용하는 머플러인데, 순순히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경기를 보기 싫었던 나는 결국 이 머플러를 두르고 경기까지 보고 왔다고 한다.   


에티하드의 메가스토어. 최고다. 


 그렇게 올드 트래포드 투어를 마치고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 에티하드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시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편하게 찾아갈 수 있었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어 서둘러 투어를 예매했는데, 운이 정말 좋게도 마지막 투어가 남아있어 아슬아슬하게 예매를 하고 남는 시간 동안 메가스토어를 구경했다. 맨시티 메가스토어는 크기뿐만 아니라 내용도 알차고, 볼 것도 살 것도 많다. 나이키 제품들이 기본적으로 눈을 호강시켜주는 데다가, 맨시티 자체적으로 판매하는 제품들도 디자인이나 퀄리티가 좋다. 맨시티와 상관없는 나이키 제품들을 살펴보다 보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옷을 구할 수도 있다. 또 간간히 섞여있는 맨시티의 자매구단, 뉴욕시티의 제품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Etihad Stadium.


 그리고 에티하드 스타디움 투어를 시작하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간단한 박물관 - 각종 라운지 및 관중석 - 락커룸과 경기 준비실 - 그라운드의 순서로 투어가 진행되었던 것 같다. 사실 맨유보다 맨시티의 이미지가 원래는 더 좋지 않았다. 지금은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 말이지만 '돈으로 우승컵을 살 수 없다.'라는 말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축구계 '자본의 침공'의 시작 격인 맨시티가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경기장 투어를 진행하고 친절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맨시티는 돈을 '잘'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느니 지역사회에 공헌한다느니 이런 말들이 다 핑계일 줄 알았는데, 맨시티는 아니었다. 그들만의 실현 가능한 마스터플랜을 늘 가지고 있었다. 경기장을 둘러봐도 호화스럽다는 느낌이 아닌,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돈을 쓰는 법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 쓴 돈은 돈을 불러오고, 좋은 평판을 불러온다. 맨시티는 이 둘을 모두 할 줄 아는 클럽이었다. 여행이 끝나고 이전보다 이미지가 가장 좋아진 클럽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맨시티를 꼽는다. 맨시티는 이제는, 빅클럽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 돈의 향기가 난다. 의자 진짜 편하다. 


 맨시티 마지막 타임 투어는 사진이 정말 잘 나온다. 여행 중 건진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사진을 추리면 해가 지고 에티하드에서 찍은 사진이 많다. 은은한 조명과 그라운드에 드리워진 인공태양이 조화를 잘 이루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냈다. 아래 두 사진은 그 유명한 '열선이 깔린 좌석'에서 찍은 사진이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다르게 벤치 위 2층 쪽 일부 좌석에만 열선이 깔려 있었다.


더 좋은 카메라가 아닌게 아쉽다. 
Moon on the Blue Moon.


  푸른 달(blue moon. 시티 팬들의 애칭)의 집은 아름다웠고 여행을 슬슬 마무리하는 나에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되어주었다. 여행을 하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불확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기에 나는 준비가 되어있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원래 여행을 하면 후유증이 심한 편이다. 꿈에서 깬듯한 그 기분을 빠져나오는 게 유독 힘들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만큼은 일말의 미련도, 후회도 없이 꽉 채워 보낸 2주였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도 크게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하루에 잠깐씩이라도 생각을 정리하고, 나를 위해 시간을 쓰며 돌아다닐 수 있었던 점이 나를 조금 강하고 유연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에티하드의 사진을 보면 괜한 상념에 잠기곤 한다.


에티하드의 그라운드. 예쁘다. 
한동안 내 메신저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사진인데, 괜시리 마음에 들었다. 꿈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 사진도 자꾸만 눈에 밟히는 사진이다. Keep off the grass..


 사진만 봐도 여행 중 느꼈던 공기, 기분, 생각들이 많이 떠오른다. 기분 좋고 홀가분하게 에티하드 투어를 마치고, 피곤하지만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갔다. 이제 새로운 경기장은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했고, 쉼 없이 달려온 그동안의 내가 대견하기도 했다. 12일간 16군데의 경기장을 다녔다. 대부분이 좋은 기억이었고, 하고 싶은 일은 원 없이 했다. 사실상 나의 여행은 이날부터 마무리였다. 급하고 정신없게 시작한 만큼, 마무리는 천천히 그리고 기분 좋게 하고 싶었다.


 열 셋째 날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사우스햄튼 FC의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친구가 맨유의 팬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사우스햄튼의 경기는 꼭 보고 싶어서 무리를 해서라도 이 경기를 보기로 하고 예매를 했었다.


경기장 가는 길. 트램 역에서 내려서 바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기 당일 경기장을 가는 길은 늘 즐겁다. 축구를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다 보니 경기장 가는 길에는 정말 '살아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경기에서 진다면 '죽어있음'이 느껴지지만... 아무튼 수많은 사람들이 경기와 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하며 경기장에 모여드는 광경은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진다.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축구로 대화를 하는데, 즐겁지 않을 수가 있나?  


브...브이아이피...익스피리언스...?


 아까도 말했듯이 무리를 해서 본 경기이지만 티켓을 받고는 다시 한번 돈의 힘을 느꼈다. 살다 살다 맨유한테 VIP 대접을 받아볼 줄이야.. 영국 가서 한 어떤 경험보다도 호화로웠다. 역시 큰 클럽이라 장사 하나는 참 잘한다.


퍼기 경!


 퍼거슨 경은 아무나 입장시켜주지 않는다. 사진에 보이는 퍼거슨 동상 아래 입구로 들어가 Red Cafe라는 경기장 내부의 식당에서 3코스 식사.. 를 하고 모인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경기를 보는 코스였다. 생각보다 식사와 서비스 모두 정말 괜찮아서 특별한 기분을 즐기며 싫어하는 팀의 VIP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TV에서 리버풀과 노리치의 경기를 중계해주었는데, 우리 테이블에 서빙을 해주는 윌리엄이라는 웨이터가 뭔가 계속 TV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움찔움찔하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해서 너 리버풀 팬? 이냐고 물어봤더니 조심스럽게 맞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 자리에서 바로 내 정체를 밝히고, 그때부터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둘만의 조심스러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필 또 그날 경기에서 9골이 나오는 바람에 몇 번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둘이 난리를 피우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은 기억이 있다. 역시 이상과 현실은 다른 모양이었다. 리버풀 팬이 맨유 식당에서, 그것도 알렉스 퍼거슨 스탠드 안의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있다니...


 거의 잡은 경기였지만 추가시간에 동점골을 먹히고 4:4로 경기가 끝날 것 같아 둘 다 아쉬운 표정으로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추가시간 마지막에 리버풀이 골을 다시 집어넣어 경기를 이겼다. 정말 눈치 보지 않고 윌리엄과 둘이 얼싸안고 기뻐했었다. 그렇게 정말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이제 경기를 보러 갈 준비를 하는데, 윌리엄이 다가오더니 이겼으니 기쁜 표정으로 다시 사진을 찍자며 활짝 웃으며 다가와 사진을 다시 찍었다. 끝까지 유쾌한 경험이었다. 영국에서 만난 사람들 중 다이앤 다음으로 기억나는 사람이 윌리엄이다. 두시간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심지어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축구라는 공통분모만 가지고 진심 어린 아쉬움과 기쁨을 모두 공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순간 윌리엄은 나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윌리엄이 즐거웠다고, 친구 잘 가라고 인사해주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친구다. 윌리엄 정말 즐거웠어요. 언젠가 안필드에서 봐요!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 리버풀의 승리만큼 달콤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행운을 뒤로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경기를 보기 위해 입장했다. 역시 올드 트래포드는 규모가 대단했다. 그전에 가봤던 경기장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규모가 커 주변에 사람들, 정확히는 맨유팬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따라서 마음속으로는 사우스햄튼을 응원하면서도 자리에 앉아서는 삼대째 맨유팬이 되어 경기를 즐겼다. 한창 반할 감독이 삽질하던 시절이라 분위기가 좋지만은 않았지만 (하프타임 때랑 끝나고 야유가 나왔었다. 본인들 팀한테...) 맨유 팬들은 기대만큼 열정적이고 멋진 모습이었다.


그동안 봤던 경기중 가장 멀리서 관람했다. 크다.


  경기는 지리멸렬했고 측면에서 혼자 날아다니던 마네(이때 경기 보고 반해서 리버풀로 이적할 때 혼자서 끝까지 잘할 거라고 싸게 데려온 거라고 우겼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나 이적 후 데뷔전 데뷔골을 성공시킨 오스틴, 당시 맨유에서 혼자 축구하던 데 헤아 말고는 볼거리가 없다시피 했다. 심지어 경기도 맨유가 0:1로 패배하여(5 연속 프리미어리그 홈팀 무득점 0:1 패배... 토토를 했어야 했다.) 경기를 마치고는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비마저 내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경기 끝나고 리버풀로 돌아가 새 숙소에 도착할 때 까지가 여행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내가 이 경기가 소중했던 이유가 있다. 경기 전에는 윌리엄이 있었고, 경기 중에는 타디치가 있었다. EPL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선수인 타디치는 네덜란드 트벤테 시절부터 쭉 지켜봐 왔던 선수인데, 성실하고 묵묵하면서도 때때로 보여주는 날카로운 플레이(와 멋진 이름. Tadic이라니!)에 반해서 좋아하게 된 선수이다. 이 선수 유니폼을 구하고자 온 런던을 뒤지기도 했었던 만큼 이날 경기에 선발로 나와주길 바랬는데 다행히 선발 출전해 주었다. 이날 경기에서 특출 난 플레이를 보여주거나 골을 넣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타디치를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도 행복했다. 좋아하던 배우나 가수를 실제로 만난 것 같은 느낌? 경기 중반 타디치가 교체될 때 사우스햄튼에 쿠만 감독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아쉬웠다. 타디치 본인은 이 먼 땅에 자기 팬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찾아간다면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지금도 주말마다 사우스햄튼의 경기를 중계해주고, 타디치가 경기에 나오면 늘 챙겨보며 속으로 응원하곤 한다. 오래오래 EPL에서 볼 수 있길!  


Saints!


 그렇게 영국에서의 5번째 경기 관람을 마치고 축구 여행으로는 마지막 일정을 위해 다시 리버풀로 향했다. 숙소를 찾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너무 피곤해서 하루가 또 지났다는 아쉬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열네 번째 날. 축구 여행의 마무리를 위해 부산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많이 돌아다녔다고 익숙하게 경기장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타고, (실은 런던이 아니라면 경기가 있는 날은 구글맵도 필요 없다. 시간 넉넉하게 나와 머플러를 두르고 있거나 기사 아저씨께 스타디움? 이라고 물어보며 어벙한 표정을 지으면 타야 할 버스가 알아서 타라고 해 준다. 쉽게 사는 법을 배운 2주였다.) 구디슨 파크를 다시 찾아 경기를 기다렸다. 이날은 에버튼과 스완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였는데, 기성용을 보겠다는 확실한 의지가 있던 터라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어디로 나오는지 조사를 하고 다녔다. 그중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통로가 있어 가서 한번 기다려봤는데, 홈팀 선수들이 입장하는 통로였다. 데울로페우, 피에나르, 바클리, 코네 등 많은 선수들을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에버튼은 특이하게도 선수 입장 통로에 어린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구역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선수와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을 수 있게 해 두었었다. 유독 에버튼이 지역사회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미래의 팬층인 아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심어주고자 하는 시도가 많이 보였고, 각종 자선 사업과 같은 행사도 많이 진행하였다.


 축구팀은 팬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팬이 없다면 수익도 낼 수 없지만, 팬들이 없는 경기장에서 뛰고 싶어 할 선수는 아무도 없다. 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들, 그뿐만 아니라 팀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축구팀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에버튼은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자신들의 규모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적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경기 외적인 부분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올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Gerard Deulofeu.
Steven Pienaar.


 그렇게 에버튼 선수들을 영접하고, 관리인에게 살짝 물어보니 원정팀은 경기장 반대편의 입구를 쓴다고 해 경기장 반대편으로 돌아가 우리가 들어갈 입구를 찾고, 반대편 관리인에게 또 물어봐 선수들이 경기 후에 나온 통로를 알아냈다. 그리고 경기장에 입장하려는 찰나, 친구가 내 손을 잡아끌며 '저 사람 익숙하지 않냐.' 고 물었다. 그쪽을 보니 왠 익숙한 남자가 담배를 태우며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친구와 곰곰이 누군지 머리를 굴리다 둘 다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이 있어 황급히 찾아보니, 당시 스완지에 새로 부임한 감독이었던 프란시스코 귀돌린 감독이었다. 대충 담배를 다 피워가시는 감독님께 조심스레 찾아가 스완지 매니저가 아니냐고 물어보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데뷔전도 치르지 않은 감독이 경기장 뒤편에서 담배 피우는 걸 찾아내다니.. 정말 여행의 끝까지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사진 촬영을 부탁하고, Ki를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남긴 채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기마경찰. 말님들이 생각보다 크고 무서워서 저절로 피하게 된다.  


 구디슨파크 내부 분위기는 생각보다는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구조나 매점이나 특히 화장실은 세월의 흔적이 보이긴 했지만, 여느 경기장처럼 깔끔한 느낌이었고 또 전체적으로 진한 파란색의 분위기가 잔디와 어우러져 시원한 인상을 주었다. 마침 자리도 꽤나 좋은 자리였었기 때문에 (물론 에버튼 팬들 사이에서 봤으므로 이번에는 삼대째 에버튼 팬이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이라는 기분을 한껏 즐기며 경기를 봤던 것 같다.


Goodison Park.


 경기는 영국에 와서 본 경기중 가장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박진감이 넘쳤다. 스완지의 선제골, 에버튼의 만회골, 다시 스완지의 골로 1:2로 스완지가 승리하였다. (이로써 5경기 연속 EPL 홈팀 배패라는 진기록을 세우고 돌아가게 되었다.) 에버튼이 팀 분위기가 한창 좋지 못할 때였고 스완지도 14-15시즌만큼의 폭발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을 때였지만, 두 팀다 저력 있는 팀이어서 역시 확실한 색깔의 축구를 보여주었다. 사실 팀 분위기상 에버튼 팬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경기 자체는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게 즐겼다. 내가 주말마다 보던 EPL이 이런 거였지 싶었으니까. 후반 에버튼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스완지의 모습에 응원하는 팀이 있고 없고를 떠나 수준 높은 축구를 보는 희열을 느꼈었다.


NO.4 KI.S.Y.


 사실 이 경기를 보러 리버풀까지 온 이유는 에버튼도 있었지만, 기성용이 뛰는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꽤 크게 작용했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기성용은 선발 출장하여 풀타임을 소화해 주었다. 이날이 기성용 선수의 생일이기도 해 나름 기대를 하고 갔던 우리가 더 큰 선물을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성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축구를 잘했다. '느리다', '뛰지 않는다'는 항간의 평가와는 달리 90분 내내 헌신적으로, 하지만 영리하게 그라운드 곳곳을 누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팀에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날은 주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가 아닌 측면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전체적인 볼 전개나 공격 과정에 있어 기성용을 거쳐야 원활한 플레이가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팀과 함께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충분히 더 큰 팀, 큰 무대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한다. 기성용 선수 늘 응원하고 있으니 힘내시라.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건진 골장면이다. 시구르드손의 PK 선제골 장면이다. SNS 같은데 보면 '[직캠]외질 골 직관 현장 영상' 이런 거 돌아다니길래.. 분위기라도 느껴보십사 하고 준비했다.


Swansea City.


 경기가 끝나갈수록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2주 동안 6경기, 16 경기장, 6개 도시라는 강행군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경기가 끝나가자 피로가 슬슬 몰려오기 시작했다. 몸도 여행을 마무리하려 한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경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아까 알아놨던 원정팀 출입구로 향했다.


 버스와 출입구 사이 구단 경비원들이 만들어 준 작은 틈으로 기성용 선수를 기다렸다. 경비원들은 한눈에 봐도 낯선 데다가 원정팀 버스를 기다리겠다고 설치고 있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 한국 하면 손흥민이지 않느냐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그렇게 기다리던 중 선수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명이라도 놓칠까 긴장하며 기다리던 우리에게, 경비원이 Ki가 왔다는 이야기를 해주고는 조그만 틈을 내어줬다. 황급히 기성용 선수!! 를 외치던 우리에게 결국 Ki가 다가왔고, 영국 사람들과는 짧은 영어로 그렇게 넉살 좋게 말하던 나도 긴장한 나머지 겨우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 건네고 겨우 사진을 찍었다. 짧았던 만남이지만 이날 기성용의 플레이를 보고 워낙 감탄을 해서 그런지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순간이다. 영국에 다녀온 것을 자랑할 때 가장 많이 꺼내 든 사진이기도 하고..


Goodbye Blues!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가 숙소로 향한 뒤, 런던으로 가는 짐을 쌓다. 어쩌다 보니 여행기간 중 세 번이나 찾아 정이 든 리버풀을 떠나자니 많이 아쉬웠다. 하루나 이틀 머문 도시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떠나니 미련이 크게 남지 않지만, 리버풀은 이제 슬슬 가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이 생기는 도시였기 때문에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이 진하게 남았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날   런던아이를 예매해두었기 때문에.. 런던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에도 가야 했고.  


Goodbye Liverpool!


 다음날 런던 시내 관광을 하고 그다음 날 출국을 했으나 축구와 관련된 여행은 구디슨 파크를 나서며 마무리되었다. 여행 입국 날과 출국 전날, 출국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경기장을 구경하거나 경기를 봤으니 축구는 정말 질리도록 보고 온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이 이야깃거리 많고 독특한 나라의 한쪽 면만은 제대로 보았으니까. 지금 다시 저 일정으로 저렇게 다녀오라면 자신이 없다. 그만큼 저 당시에는 다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이었고, 힘들었던 현실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마음의 짐을 덜고 오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게, 뭐 대단한 경기를 봤다거나 선수들을 만났을 때의 감동보다는 그냥 친구와 축구 얘기나 하면서 점심 저녁 먹었던 곳이나 경기장 가는 지하철 안, 거리 이런 소소한 것들이다. 길 위에서 평화를 찾았다고 해야 하나..


 여행의 마무리는 늘 힘들고 감성에 젖게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정확히 1년 전에 여행을 끝마쳤지만 스스로 완벽히 여행을 마무리했다는 생각을 일종의 두려움에 선지 차마 하지 못했고, 결국 어떻게든 기록에 남겨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여행을 스스로 마무리하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했다. 생각대로 써진 글은 아니지만 글을 쓰는 동안 나름대로 고민도 많이 하고 추억에 빠지기도 하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러니 이제는 2016년 1월의 쌀쌀했던 런던, 맨체스터, 리버풀을 보내주고자 한다. 가끔 꺼내볼 수 있는 편지 같은 기억으로 남기고, 이제 (저 당시보다는 나에게 훨씬 협조적인) 현실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언제까지 꿈속을 거닐었던 기분에 만족하고 살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래도 이 15일은 스무 살의 나를 수없이 일어나게 해 주었고, 평생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 같아 다행스럽다. 그럼.. 끝!


(* 결론은 '영국'여행기이니 여행을 준비하시는데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얼마든 질문해 주세요. 축구 쪽으로는 자신 있게, 그 외적으로는 경험을 바탕으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 사진은... 혹시 아주 매우 호옥시 마음에 드신다면 편하게 쓰셔도 됩니다.. 출처만 한번 밝혀주세요. 발로 찍었지만 그래도 자식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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