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도망친 철없는 신혼부부 시즌2_유럽 편
현재 우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다. 그리고 폴란드는 비영어권 국가이다. 여느 나라처럼 특히 도심에는, 영어 잘하는 젊은 분들이 꽤 많아 여행하기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처럼 몇 년 간, 그것도 시티가 아닌 약간 외곽에서 살아야 할 때는 영어만 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온 지 두 달이 조금 안 된 지금, 나는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무작정 해외로 도망친 21년 이후 비영어권 국가는 처음이라 입국 전에도 고민이 꽤 많았었고, 지금도 그렇다.
폴란드어는 어렵기로 소문난 언어이다. 한국에서는 특수언어로 분류될 정도로 그 수요도 적어 들을 만한 강의도 거의 없다. 폴란드행이 확정되고 나는 한국에서 폴어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바르샤바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폴란드어를 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없어서 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말이다. 공부에 성실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로 인해,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내가 아는 폴어는 Dzien dobry(안녕하세요)와 Dziękuję(감사합니다) 뿐이었다.
입국 심사에서 봤던 출입국 심사관 폴란드 언니. 나보다 어리신 것 같긴 했지만 예쁘면 일단 언니라고 하자. 폴어를 못하지만 인사정도는 하고 싶어서 웃으며 Dzien dobry라고 했다. 그랬더니 눈부신 미모의 심사관님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보고 폴란드어를 할 줄 아냐고 물으셨고 난 바로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짧고 간단한 입국심사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아쉽다. 참 아쉬웠다. 내가 폴란드어를 할 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일단, 여기는 영어 사용률이 한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여행객이 영어로 무언가를 물어보면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익숙하게 대답하거나 짧게라도 소통이 되고, 조금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거의 영어를 안 하신다. 이렇듯 폴란드처럼 한국과 비슷하게 실제 영어 사용률이 높지 않은 나라에서는 현지어를 모른다면 아쉬운 점이 꽤 많이 생긴다.
바르샤바에서 자주 가는 곳 중 하나인 카페와 레스토랑, 편의점. 그곳의 직원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는 젊은 분들이라 그나마 괜찮지만, 편의점이나 마트, 아파트 관리인 분처럼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내가 영어를 쓰더라도 폴란드어로 답하신다. 딱 봐도 폴어를 못할 것 같은 외국인인 나를 보고 1차적으로 곤란해하는 얼굴에 괜히 죄송스럽다. 내가 자신 있게 폴란드어를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는 것이라고는 온갖 버전의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뿐. 커피 주문하는 것조차 발음이 어려워서 아직 시도해보지 못했다. 애매한 폴란드어로 주문하면 더 곤란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한 번은 아파트 정기점검 때문에 관리인이 오셨다. 벨이 눌리고 문을 열고 나를 보자마자 그분은 주춤하시더니 '얘 폴란드어 할 줄 아나?' 하는 표정으로 "Dzien dobry..?"라고 하셨다. 그 순간 내가 Dzien dobry라고 받았다간 폴어를 할 줄 안다고 오해하실 것 같아 영어로 답했는데, 그것 또한 참 아쉬웠다.
한 번은 어떤 아저씨가 나가는 문을 잡아주셔서 Dziękuję bardzo(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는데, 호쾌한 표정으로 어떤 답을 하셨다. 우슈! 비슷한 발음의 어떤 단어. 문맥의 흐름 상 분명 천만에요 같은 뜻일 텐데 후에 찾아본 천만에요의 폴란드어는 단어가 꽤 길어서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래도 인사말 정도는 최대한 쓰려고 노력 중이다. Dzien dobry와 Dziękuję, Do zobaczenia, Tak, Nie... 우리도 왜 한국에서 외국인이 어설프게나마 안녕하세요나 감사합니다를 말씀하시면 괜히 기분이 좋지 않나. 나보다 폴란드어를 더 자주 헷갈리는 남편은 피자 주문을 하고 난 뒤 받을 때 갑자기 Dzien dobry(안녕하세요)를 써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귀엽게 봐주신다.
이전에 있었던 아일랜드, 호주, 말레이시아는 모두 영어권이었어서 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다. 카페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들렸고, 일을 할 때도 영어를 쓰며 현지인과 대화를 했기에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는 아니다. 내가 영어로 무언가를 물어보지 않는 한 영어는 들리지 않고, 빠르게 지나가는 폴란드어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야말로 완벽한 이방인이다.
나야, 사실 어느 곳에 뚝 떨어진 외계인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을 좋아하기에 이렇게 바르샤바의 완벽한 이방인이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래도 꼭 폴란드어를 배우고 싶은 것은, 친절한 폴란드 사람들 때문이다. 두 달 즈음이 되었는데도 나쁜 기억 하나 없는 이 폴란드에서, 이방인에게 특히 친절한 폴란드 사람들과 당당히 그들의 언어로 대화를 하고 싶다. 폴란드어를 익혀 폴란드를 잔뜩 사랑하고 싶다.
지금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완벽한 이방인인 우리. 잠깐씩 있었던 앞의 나라들과는 달리 최소 몇 년은 살 예정이기도 하고, 고작 두 달 있었는데도 평생 연이 닿고 싶은 곳이라는 느낌이 드는 폴란드. 하필 특수언어로 분류될 정도로 배우기가 쉽지 않은 언어의 나라이지만, 뭐 어쩌겠나. 이렇게 멋진 나라이니 머리 터지도록 공부하는 수밖에. 2025년 즈음에는 폴란드에서 아무 연극을 보러 가도 다 알아듣는 수준이 되어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