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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롬 Dec 24. 2023

해외에서 무력감에 빠질 때

남편에게 얹혀살고 있다니

3박 4일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여행에서 얻은 것. 화려한 부다페스트의 야경과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 풍경, 그리고 지독한 목감기. 거의 1년 만에 걸린 감기라 그런지 바르샤바에 돌아와서 5일이 지났는데도 낫지 않고 있다. 그 5일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도 이제 하루를 살아볼까, 해서 일어나면 심해지는 콧물과 두통에 다시 침대에 풀썩 엎드리기만 몇 번.



'일어났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고 있어. 약 먹고 푹 자'



남편의 배려 섞인 메시지에 어쩐지 더 힘이 빠져서는 노래를 틀었다. 조금만 시끄러워도 머리가 울리니 최대한 잔잔한 것으로. 약을 먹고 자려고 했는데 잠도 오지 않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드는 생각들. 대부분 자책 비슷한 것들.



남편이 취업한 덕분에 올 수 있었던 바르샤바에서 나는, 그에게 얹혀살고 있다는 미안함을 늘 안고 있었다. 그래도 내 할 일을 찾아 열심히 살고 있었다. 비영어권에 취업 비자도 없어 누구든 쉽게 일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며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잔뜩 늘어놓으며. 그런데 아파서 나름 알차게 살고 있던 그마저도 못하게 되니 죄책감을 덜어줄 합리화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침대에 엎어져서는 코를 팽팽 풀며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아주 원초적인 질문부터 하게 되더라.



나는 무엇인가.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이렇게 무력하게 있어도 되는 건가. 남편은 나보다 돈도 훨씬 많이 벌고 출근도 하는데 심지어 내가 아파서 집안일도 다 그가 한다. 결혼한 사이이긴 하지만 솔직히 동갑인 남편이 나를 부양하거나 할 의무가 있다고 볼 수는 없잖아. 유럽에 취업한 남편을 위해 같이 와준 것도 아니고, 내가 유럽에 살고 싶어서 잔뜩 신이나서 따라온 것인데. 한국에 가서 폴란드 취업 비자를 다시 받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나도 여기서 취업을 시도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나 혼자 영어권에 가서 열심히 벌어야 할까. 아니야 그러면 남편이랑 떨어져 있게 되고 그럼 아무 소용없는 것이잖아. 근데 그럼 나는 여기서 언제까지 무력하게 있을 것인가.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나는 무엇인가.



자책에 자책에 자책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남편이 이런 모습을 보면 "정신 차려!" 하며 엉덩이를 찰싹 때렸을 것이다. 머리가 지끈지끈 이상으로 아픈 탓에 근 일주일간 아무것도 못해 일도 많이 밀렸다. 어쩌면 감기를 핑계로 너무 누워있어서 이렇게 우울에 가까운 무력감을 느끼는가 싶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서 씻으러 갔다. 분명 씻을 때는 개운했는데, 샤워실에서 나오니 더 어질어질해졌다. 거의 바닥에 누워서 머리를 겨우 말리고 다시 소파에 엎어졌다. 감기는 참 무서운 것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카페 네로



해외에서 살면 종종 이런 무력감이 올 때가 있다. 이렇게 아플 때도, 아프지는 않지만 그냥 그럴 때도 있고. 그럴 때면 내내 나를 괴롭히던 커다란 문제가 둥둥 떠올라서 더 커진다. 폴란드에 사는 지금의 나에게는 아마 그 문제덩어리가 일정한 '수입'이었나 보다. 내가 쉬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아일랜드나 호주에서는, 그러니까 친구 같은 남편에게 얹혀산다는 생각을 안 할 때는, 무력감이 왕왕 들었어도 이런 부정적이기만 한 형태로는 아니었다. 그땐 '몸이 안 좋으니 일을 쉬어도 되겠지' 였다면, 여기선 '아이고 그나마 하고 있던 일도 못하게 생겼네! 감기는 왜 걸리고 난리야' 하는 느낌.



5일이 지나도 도저히 낫지 않자 어제는 또 밥먹다 말고 남편 앞에서 헛소리를 했다.



"있잖아. 나 혼자 영어권 워킹홀리데이 가서 일단 일을 할까. 요즘은 떨어져 사는 부부도 되게 많대."

"다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몸부터 낫자. 너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내가 늘 말하지만 넌 돈 많이 안 벌어도 되니까 그냥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행복하게 재밌게만 살아."



그래. 일단 감기부터 낫자. 멎지 않는 콧물과 지끈한 두통이 없어져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할 때, 그때 다시 생각해 보는 거야.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여기서만 만들 수 있는 일상들과 남편과 함께 재밌게 살면서도 이 친구만큼 수입을 늘릴 수 있을 방법을. 지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것도 못하겠는 건 다 이놈의 감기 때문이야. 아무렴, 다 감기 때문이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다 낫기만 하면 각성한다, 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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