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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롬 Feb 04. 2024

떠나기 전, 남편은 카레를 끓였다.

만약, 공무원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남편이 또 출장을 간다.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카레스트라는 곳으로. 나는 아직 가보지 못한 루마니아는 뱀파이어가 산다는 곳이 아닌가. 산타든 뱀파이어든 마법사든 인간과 다른 종족의 존재를 굳게 믿는 나로서는, 남편의 출장지를 듣고 그것부터 떠올랐다.


출장은 보통 최소 5일인데, 이번에는 딱 주중의 5일. 저번에는 2주 가까이도 갔었으니 이번엔 짧은 편이다. 출장이 꽤 잦을 것이라는 말에 폴란드 오기 전에는 조금 걱정하기도 했었다. 남편이 출장 간 유럽의 빈집에서 과연 나 혼자 잘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역시 기우였다. 결혼 5년쯤 된 유부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매우 알차게 쓸 수 있으니 말이다. 허허.



남편은 일주일 전부터 선언했다.


"출장 가기 전에 너 먹을 카레 많이 끓여놓고 갈 거야. 그래야 네가 나 없어도 그나마 챙겨 먹을 것 같아서.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만둣국도 해서 얼려놓을게. 나 없는 동안 굶지 말고, 꼭 먹어야 해!"



그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집 부엌요정인 남편이 집을 비우거나 회식 등으로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나는 거의 굶는다. 배고파서 비척비척 냉장고까지 걸어가 문을 열고 한참을 쳐다본 뒤 그냥 다시 문을 닫고 만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저 날것의 재료들을 자르고 지지고 볶고 한 다음 먹고 설거지까지 할 자신이 없기 때문. 이럴 때마다 남편은 어찌 매번 끼니를 그리 잘 차려내는지 의문이다. 그의 대단함을 그의 부재마다 느끼게 된다. 아무튼, 그런 나를 잘 알기에 남편은 '요리'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놓고 가겠다는 것이다.


출장 가기 하루 전인 오늘. 일요일에는 문을 잘 열지 않는 폴란드의 마트 특성상 우린 전날인 토요일에 냉장고가 터질 듯이 한가득 장을 봐왔었다.


폴란드 마트에서


그리고 그 잔뜩 끓여놓겠다는 대망의 오늘, 일요일. 오늘 계획에는 '요리'가 따로 있을 정도로 그는 아내 굶주림 방지 프로젝트에 진심이었다. 본격적으로 만들기 전에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오케이!"를 외치며 나왔다. 남편의 그 오케이는 '요리의 재료와 구성과 순서 배치가 머릿속으로 모두 끝났다'는 뜻이다.


폴란드 우리 집의 부엌은 그리 작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부엌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좁아보이는데, 아마 그것은 입을 앙다물고 허리에 손을 착 올리고는 '모든 요리를 빠르게 끝내겠어' 하는 남편의 다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도와줄 거 있으면 얘기해!" 어차피 남편은 나를 부엌에 못 들어오게 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일단 던진다.


그는 온갖 재료를 지지고 볶고 끓이고 삶고 하더니 거의 5일 치 카레와 만둣국을 만들어냈다. 카레는 내 입맛에 맞춰 조금 맵게, 만둣국은 닭육수로 아주 감칠맛 나게. 새해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식단 관리 해야 하는데 이것 참 큰일인걸.






남편은 음식을 식힌 뒤, 소분해서 차곡차곡 넣어놨다. 그러고는 드디어 출장 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유럽으로 출장을 다니는 남편을 보자니 마음이 울렁거린다. 물론, 기분 좋은 울렁임이다. 나는 그가 몇 년 전, 지방직 9급 공무원을 하던 시절. 꽤 자주 그의 멱살을 잡고 그만두라 했었다. 물론, 공무원도 장점이 많은 직업이긴 하지만, 그래서 우리도 1년을 공부해 얻은 것이었지만, 막상 되고 보니 남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도 나지만, 남편은 정말 도저히 아니었다.


공무원이 인기 있는 사회일수록 침체된다고 하지 않나. 젊은이들이 공무원 같은 안정적인 직업에 매달리기보단 모두가 스티브잡스를 꿈꾸며 무언가를 창출해야 한다고. 청년들이 그런 것들에 눈을 빛내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나는 남편이 저 민원대를 당장 뛰쳐나가야 한다 생각했다. 내가 봐 온 이 멋진 남자는 스티브잡스든 주커버그든 이 세상 그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그만두고 남편에게도 의원면직을 권했다. 안 맞는 일에 발을 잘못 들였어도, 인생 이렇게 긴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빠져나와서 다시 하면 되지 않나. 그런데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음에도 쉽게 결정을 하지 못했다.


난 본래 '누가 뭐라든 내 멋대로 한다' 성격에  바로 관뒀지만, 남편은 결혼까지 했으니 관두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나완 달리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어른이어서 그랬다. 물론, 환경 자체도 공무원 의원면직이 어렵긴 했다. 지금이야 젊은 공무원들의 퇴사가 유행과 같다지만 우리 때, 그러니까 2019, 2020년만 해도 그냥 신규 공무원이 질병 같은 사유가 아니고서야 그냥! 그만두는 것은 '대체 왜?' 질문을 수없이 받는 미친 짓에 가까웠다. 주변에서 그 누구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기도 했고.


그래도 '함께 해외로 가자' 결심 후 퇴사날까지 겨우 정했었다. 근데 하필 코로나로 자동차 세계여행 계획이 무산되어 남편이 겨우 결정했던 의원면직 또 실행하지 못했을 때. 나는 그때 거의 처음으로 땅을 치며 울면서 후회했다.


애초에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지 말았어야 했어.

결혼을 안 했더라면 남편이 그만둘 수 있었을까?


이 정도의 생각까지도 했었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남편은 힘들다거나 하기 싫다거나 내색하진 않았다. 그저 이직하고 싶은 데이터 분야로의 개인 공부를 출근 전 새벽에도, 출근 후 밤에도 묵묵히 했을 뿐. 그 모습을 보고 더 이 남자의 시간이 아깝다 생각했다. 당장 민원대를 뛰쳐나가자, 우린 할 수 있다고 백번은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해외로 무사히 도망쳐 나왔고, 우리는 여러 도시에 살며 버킷리스트들을 채우는 중인 데다 그 덕에 난 책도 썼으며, 남편은 생경한 도시들로 출장을 다니는 멋진 유럽직장인이 되었다.



만약 그때, 공무원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가정을 아주 가끔씩 해보곤 하는데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1초 만에 절레절레한다. 아냐 절대 아니지. 이게 맞지. 훨씬 재밌지.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너랑 나한텐 이 삶이 딱 맞아. 물론 계속했었어도 그만의 재미를 찾으며 살았겠지만 아무래도 역시 지금 유럽에서의 이 하루들이 딱 맞다…


우리네 인생,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서 더 즐겁다. 그저 꼬마 같던 남편은 유럽에서 유럽으로 출장을 다니고, 난 이곳에서 매일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쓰고 있으니.


애니웨이, 이번 출장도 잘 다녀오시길,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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