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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에 찾은 나의 천직(feat. 남편의 제안)

무작정 해외살이 중 찾은 나의 퍼즐

by 다롬

유럽에 산 지도 1년이 훌쩍 넘었다. 나의 퇴사 이후 남편마저 공무원을 그만두고 해외로 나온 지도 벌써 3년이 넘었고. 어학연수와 워홀과 학생비자 등을 전전하다 지금은 남편의 유럽 취업으로 살짝 안정되어 있는 상태. 워낙 한 곳에 오래 붙어있지 못하는 나와 남편이라, 이 편안한 바르샤바 생활 속에서도 또 다른 살고 싶은 도시를 찾아보고 있긴 하다. 이 어쩔 수 없는 방랑벽!



내가 공무원을 그만 둔 이유는 단순했다. 나와 맞는 일을 찾고 싶었다. 분명 내가 이 세상에, 이 한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내재되어있는 재능이나 천직 따위가 반드시 꼭 하나쯤은 있으리라. 나와 결이 꼭 맞는, 퍼즐 같은 그런 일이 반드시 하나쯤은 있으리라 생각했다.



단호하게 의원면직서를 내고, 그때부터 찾아 해맸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찾은 것 같다. 특히 나 스스로에 관해서라면 그 어느 것에도 쉬이 확신을 하지 못하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이건 분명 내 일이라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이걸 찾은 건, 아주 우연이었다.








나는 해외살이 도전기를 담은 <해외로 도망친 철없는 신혼부부>라는 에세이 책을 한 권 냈고, 연애/결혼/여행 등으로 유료 연재도 몇 플랫폼에 기고했으며, 공무원을 그만뒀을 때부터 나름 성실히 운영하는, 지금도 거의 매일 글을 쓰는 블로그도 하나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계속 무언가를 썼다. 나는 대학도 논술 전형으로 들어갔으니, 어쨌든 '글'이 내 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다.



그런데 문제는, 재미가 없었다.



에세이를 쓸 때는 사실 '재미' 보다는 '출간, 기록, 성취' 이런 결과적 요소들에 초점을 뒀었고. 그 뒤에 에세이를 써보려 했지만 몸이 빠르게 지쳤다.



유료 연재는 더 심했다. "아...마감이야..." 주어진 기회에 매일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매주 이 말을 달고 살았다. 내가 그럴 때마다 남편은 픽 웃으며 등을 토닥였다. "다희. 힘들면 안 해도 돼. 돈은 내가 벌잖아." 라고 말하며. 그러나 계약을 한 이상, 세상이 두쪽나도 마감은 지켜야 했다. 마감 일주일 전부터 세이브 원고 몇 개씩 만들어가며 철저히 시간을 지켜냈다. 하지만 역시 신이 나지는 않았고, 약간 '꾸역꾸역'에 가까웠다.



특히 애정하는 블로그는 물론 재밌긴 하지만, 그래서 매일 쓰고 있지만. 사실 블로그 포스팅이 제대로 된 '글'이냐 물으면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없고. 내 블로그 글은 진지하다기보다는 일상 기록, 유럽 여행 기록을 짧게 짧게, 빠르게 빠르게 쳐내는 내 일기장에 가까우니까.








나는 신나는 일을 찾고 싶었다.



아, 너무너무 재밌어. 너무너무 신나.

눈 뜨고 감을 때까지 이것만 하고 싶어.

나는 이걸 평생 할 거야. 아무도 나를 말릴 수 없어.



이런 일을 찾고 싶었다.



처음 에세이를 쓸 적, 나는 그 일이 '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글쓰기를 지속했다. 그런데 재밌지 않았다. 아무렴 일인데, 그놈의 '재미'만을 찾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하지만 역시 나는 내가 죽고 못 사는 그런 일을 찾고 싶었다. 그것이 애초에 공무원을 그만두고 해외로 나온 최초의 목적이었으니까.



'글이 내 결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때쯤, 그날이 왔다. 생각지도 못한 터닝포인트가 된, 24년 8월의 어느 날이었다.



매일 저녁 함께 걸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우리 부부는 그날도 역시 동네 산책로를 걷던 중이었다. 우리는 매일 산책을 하며 미래 계획이나 각자의 고민 등을 털어놓는데, 그날 나는 다 쓴 에세이를 투고할까 어쩔까 의견을 구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남편에게만 보여주므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남편뿐이었으니. 내 물음에 남편은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다희!
소설을 써 보는 게 어때?


뭐? 소설?



나는 곧장 손사래를 쳤다. 내가 어떻게 소설 같은 걸 쓰냐며. 그건 약간 천재들만의 리그가 아니냐고. 줄곧 에세이류만 써 왔고 내게 그 이상의 능력은 없는 것 같다고 솔직히 말했다. 남편은 나를 지그시 보더니 "아닌데. 내가 볼 때 너는 소설을 써야 돼." 라며 몇 번 더 그런 제안 비스름한 말을 했다.



바르샤바 우리집, 매일 오는 카페 네로



그리고 며칠 후, 나는 피자를 먹는 중 남편에게 선언하듯 손을 번쩍 들었다.



나!
소설을 한번 써보기로 한다!


그렇게 아니라고- 아니라고, 못한다고-못한다고 손을 내저은 지 3일 뒤였다. 그러자 남편은 익숙하다는 듯 씩, 웃으며 그러라 했다. 넌 분명 잘 할 수 있겠다고. 워낙 목표도, 꿈도, 하고 싶은 일도 자주 바뀌었던 와이프라 이번에도 그런 것들 중 하나겠지 했던 걸 테다, 남편은.



그리고 소설, 이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나는 소설을 평생 읽어본 적이 없었다. 결국은 다 허구가 아니냐는 생각에 제대로 몰입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담백한 에세이 혹은 분명 무언가 실질적인 도움이 될 자기계발서만 읽어왔다. 근데 소설을 쓰려니 소설을 읽어야했다. 그래서 무작정 베스트셀러를 검색했고, 바로 나온 <구의 증명>을 급하게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다섯 장만에 눈물이 흘렀다.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기 아까워 내내 꼭꼭 눌러가며 읽었다. 소설은 이런 것이구나, 약간 사랑에 빠진 듯도 했다. 아, 소설은 이런 것이구나. 얼추 형태를 보고, 느낌을 그려보고, 내가 쓸 수 있는 주제와 소재 등에 대해 살살 굴려본 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한글을 띄워놓고, 아련한 분위기 나는 KopubWorld 바탕체, 11폰트로 빈 페이지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으로 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결이 아닌 것 같다며 맛만 보고 금방 내려놓은 다른 일들처럼 이번 것도 역시 하다가 포기할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 걸.



재밌다. 그것도 엄청!



목차부터 골머리 썩어가며 인상 팍 썼던 에세이와도 달랐다. 기획, 인물, 플롯, 순서 등 다 신이 났다. 몸도 지치지 않았다. 체력이 약한 편이라 뭐 하나를 오래 못하는 성질인데도, 여섯 시간 여덟 시간을 내리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래도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단편, 중편, 장편이라는 것들을 몇 개 완성했다. 남편한테 보여줬다.



"어? 재밌는데? 이 봐. 다희 너는 이런 걸 써야 한다니까!"



남편의 호평에 내 이목구비가 활짝 펴지며 곧장 안색이 환해졌다.



"진짜? 진짜지?"



공모전에 냈다.

'자신'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다 떨어졌다.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들을 읽었다. 내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 실로 대단한 문장들이었다. 나는 잠깐 좌절했다. 아, 역시 나는 안 되려나.



그러니까 내 성격에 보통 이쯤되면, 나는 이미 포기를 했어야 마땅하다. 성질도 급하고 인내심도 좋지 않은 내가 가시적인 성과가 도통 나지 않는 이런 일을 붙잡고 있던 적은 없었으니.



근데 이건 달랐다. 나는 마음을 달래려고 계속 동기부여 영상을 찾아 보며 다시 쓰고 다시 쓰고 또 썼다. 비자 문제로 잠깐 나 혼자 한국에 갔을 때도 스터디카페에서 계속 쓰기만 했다. 이게, 분명 허리도 아프고 눈도 뻑뻑해 죽겠고 그런데, 지친다는 느낌이 없었다. 하나 끝낼 때마다 희열이 잔뜩 올라왔고, 내 글을 다시 읽으며 막 혼자 좋아했다.



'아, 나는 소설이라는 걸 계속 써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매일 했다. 뭔 결과가 보이지 않아 매일 좌절하고 또 좌절해도, 매일 쓰면서 계속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건 나랑 너무 잘 맞아. 난 이걸 해야 해. 평생.








그렇게 방구석에서 혼자 소설을 쓰고 있던 나는, 그로부터 몇 달 뒤 공모전 하나를 발견한다. 소설은 아니고, '시나리오'였다. 단막극과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나는 모집 요강을 보며 고민했다. 이거 한 번 해볼까...? 근데 소설이 아니잖아.



하지만 일단 공모전 목록에 추가는 했다. 절대 못 쓸 것 같던 소설도 막상 시작하니 써지는데, 시나리오도 할 수 있지 않겠냐며. 그리고 장편 소설 하나를 마무리 한 어느 날, 고민만 하던 시나리오를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는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했다. 일반 글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시중에 공개되어 있는 단막극, 영화 시나리오 몇 개를 다운받았고, 그걸 보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일단 쓸 건 있었다. 단편으로 썼던 소설 몇 개를 시나리오로 바꾸자, 했었으니.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으니 시나리오는 잘 못 하겠지' 싶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걸.



재밌다. 너무. 소설만큼이나!



남편이 내가 쓴 소설을 읽을 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다희, 대사 좀 치네!" 대사가 맛깔난다는 거였다. 근데 그건 내가 봐도 그랬다(..ㅎ). 내가 소설의 플롯이나 매력적인 소재와 이야기, 빠져드는 인물 같은 것에는 막 그렇게 변별력을 가질 수 없는 듯 보였지만, 대사 하나만큼은 괜찮았다. 근데 시나리오는, 대부분이 대사였다. 지문과 대사. 지문은 현재형으로 간결하게 쓰면 되니, 결국 거진 다 대사라는 말이었다.



남편의 말마따나 대사 좀 치는 나는 시나리오 쓰는 게 천직일까, 싶었다.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막 춤을 추는 것도 같았다. 역시 여섯 시간, 여덟 시간을 앉아있었다. 입가에는 내리 미소 같은 것이 걸려있었다.



나 같은 초보가 역시 영화는 무리야.

거긴 진짜 천재들의 리그니까.

그러니 일단 단막극으로 가본다.



그렇게 단막극이라고 쓰기 시작한 건 갑자기 영화 시나리오가 되었다. 막상 쓰다보니 35매라는 분량이 턱없이 부족해서였다. 그렇게 2주도 안 되어 영화 시나리오 하나를 썼다. 물론, 단막극도 하나 썼다. 남편에게 보여줬다.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직군에 종사하는 남편이라 신빙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어쨌든 그는 재밌다고 했다.



나는 다시 얼굴이 환해졌다.



오로지 성취, 결과에 집착하던 나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뭐, 공모전 안 되면 어때? 지금 이게 너무 재밌는데. 다이어트라는 특정한 목적 외에는 결코 운동을 하지 않았던 내가 갑자기 헬스장에 가기 시작했다. 살을 뺄려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조금만 더 앉아있으려고 그랬다. 허리 근력을 키우려고. 한 자라도 더 쓰고 싶어서. 나로서는 나름 대단한 변화였다.



4년 전, 공무원을 그만둘 때부터 꼭 이런 걸 찾아 해멨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나와 꼭 맞는 퍼즐 같은 일이, 내 천직이 있으리라, 곱씹으며.



남편을 부러워했다. 역시 공무원을 그만두고 선택한 '데이터 분석'이라는 일이 너무 즐겁다고, 희열을 느낀다고 하는 남편을 늘 부러워했다. 그러다 나도 드디어 찾은 것이다. 비록 아직 아무런 성과도 없고, 공모전도 다 떨어지며 앞으로 얼마나 더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걸 찾은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과연 2024년 최고의 성과가 아닐까.



모차르트도 10년은 걸렸대.
내가 너 10년, 20년 먹여살릴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는 그 일만 해.



"진짜 막 5년 이상 걸리면 어쩌지...?"



간절함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재미만 있으면 충분하다고는 하나 그러나 세상에 내 글을 당당히 내보이고 싶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그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조급증을 버리지 못하는 내 말에 남편은 늘 모차르트 얘기를 한다.



그래. 나는 지금 1년도 안 됐고, 큰일에는 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 불안해하지 말고 일단 쓰자. 모차르트도 10년은 걸렸다니까. 근데 아무래도 10년은 조금 길긴 한데...



어쨌든 찾았다.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라 한다.



30대라는 나이에 찾은 나의 천직, 늦은만큼 나는 허리가 부서져라 매일 노트북을 붙잡고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번듯한 작가'를 향한 나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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