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

[D-420] 당신은 매우 잘 성장하고 있다.

by Mooon

D-420. Sentence

당신은 매우 잘 성장하고 있다.


IMG_4889.jpg @gamsung.letter_

아, 습관은 무섭다. 매일 글을 쓰다가 한 번 놓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이상하리만큼 쉽게 글쓰기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어제도 그랬다. 쓰다 만 문장을 붙잡고 있다가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자리를 떴고, 정신없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결국 또 쓰지 못했다. 별일 아닌 듯 지나갈 수도 있는 하루였지만, 나에게는 그런 하루가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는다. 쓰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쓰고 싶었던 마음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는 감각이 더 선명하게 남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중장년을 위한 리트릿을 준비하고 있다. 3월 초에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을 만들고, 천천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이 여정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가 홍보 마감일이었다. 나는 내심 걱정이 많았다. 이 기획이 정말 누군가에게 필요할까.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는 이 질문들이 정말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도 닿을까.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지는 않을까. 그런 불안이 홍보를 시작한 날부터 마감 직전까지 내내 마음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10명만 선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질 만큼 많은 분들이 지원해주셨다. 숫자 자체도 놀라웠지만, 더 크게 다가온 것은 그 안에 담긴 결이었다. 제2의 인생에 대한 갈망, 막연한 불안, 이제는 정말 나를 돌아보고 싶다는 마음, 그냥 버티는 삶이 아니라 조금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조용한 절박함. 그런 것들이 신청서 답변에 배어 있었다. 이 나라에는 지금, 삶의 다음 문장을 고민하는 중장년이 이렇게 많구나. 이미 충분히 살아냈다고 여겨지는 나이에도, 여전히 사람은 흔들리고, 여전히 사람은 자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구나.


그 사실이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했다. 우리의 기획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은 분명 있었지만, 동시에 이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마주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오래 해온 일을 내려놓은 뒤 자신의 쓸모를 다시 묻고 있었고, 누군가는 가족과 역할 속에서 살아오느라 정작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린 듯했다. 또 누군가는 앞으로의 시간이 두렵다고, 하지만 이대로 멈추고 싶지는 않다고 적어주었다. 그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몇 번이나 화면을 멈춰 보게 되었다. 지원서라는 형식 안에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 고백에 가까웠다.


팀 멤버들과 함께 자정이 넘도록 신청자 리스트를 보고 또 보았다. 리트릿에 참가하고 싶은 이유, 지금의 나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리트릿 이후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길 바라는지, 기록에 대한 갈증은 무엇인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답변들만으로도 삶의 질감이 전해졌다. 단정하게 쓴 사람도 있었고, 울컥한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사람도 있었고, 무심한 듯 짧게 적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남는 답변도 있었다.


신기했다. 텍스트만으로도 사람의 시간이 느껴진다는 것이. 어떤 사람은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보였고, 어떤 사람은 아직 말로 다 정리되지 않은 혼란이 보였다. 문장이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덜 다듬어진 문장일수록 더 진짜 같았다. 꾸미지 않은 문장 속에 그 사람이 버텨온 시간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결코 헛으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분명해졌다. 잘 기획된 일정표나 보기 좋은 홍보물로 끝나는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아주 미세하더라도 삶의 방향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거창한 변화를 약속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만져볼 수 있는 시간. ‘나에게도 아직 다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아주 조금이라도 품고 돌아갈 수 있는 시간. 그 정도의 온도는 반드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문득,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되었다.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나는 내 길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흔들림은 있었지만, 큰 방향은 이미 그려져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삶은 늘 생각보다 조용하게 방향을 틀어버린다. 나는 새로운 길에 들어섰고, 지금은 실제로 리트릿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자리에 와 있다. 아직도 가끔은 이 장면이 낯설다. 정말 내가 여기까지 왔나 싶고, 정말 이 일을 내가 해내고 있나 싶다.


돌아보면, 혼자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수없이 많은 이들에게 거절당했고, 설명해야 했고, 설득해야 했고, 어떤 날은 내 확신보다 상대의 무관심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괜찮은 척했지만 불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애써 담담하려 했지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확신이 넘쳐서가 아니라, 멈추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 한 걸음씩 내딛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 이 장면은, 어쩌면 대단한 성취라기보다 무너지지 않고 계속 걸어온 시간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을 조금 믿어보고 싶다. 나는 나름 잘 성장하고 있다고. 아주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을지라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자라고 있다고. 예전의 나라면 두려움 때문에 시작하지 못했을 일들을 지금의 나는 시작하고 있고, 누군가의 삶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자리에 서 있다. 그것만으로도 분명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다. 나의 방식일 것이다. 뜨겁게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사람. 요란하게 감동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남는 마음을 건네고 싶은 사람. 이번 리트릿도, 지금의 나도, 어쩌면 바로 그런 결 위에서 자라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내 안의 한 줄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