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21] 시뮬레이션 과잉
D-421. Sentence
시뮬레이션 과잉
오늘 저녁은 친정엄마의 생일을 함께하는 날이다. 어제 둘째아들은 다이소에서 할머니께 드릴 슬리핑 마스크와 할머니의 최애 화장품, 바세린을 골랐고, 첫째는 할머니를 위한 디저트를 사겠다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망원동 미니도너츠를 선택했다. 돈은 할부로 갚겠다는 약속만 남긴 채 결제도 내가 하고, 매장에 가서 픽업하는 일도 내가 하는 이 아이러니한 선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를 생각했다’는 그 마음 하나만은 온전히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망원동에 왔다. 도너츠를 픽업하고 작업을 위해 오랜만에 들른 루아르 망원, 여전히 책 한 장을 커피받침으로 사용하는 그 익숙한 풍경 속에서 오늘의 커피받침이 된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시대예보>. 반가운 이름이었다.
책에서는 실제 경험보다 SNS 속 이미지가, 사실보다 편집된 정보가, 본질보다 연출된 모습이 더 강하게 소비되는 이 시대를 ‘시뮬레이션 과잉’이라 말하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현실처럼 설계된 장면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생각해보니 인스타그램 피드만 보아도 모두가 행복해 보이고, 모두가 잘 살아가는 것 같고,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세상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 장면들이 진짜일까. 어쩌면 그럴듯하게 편집된 장면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진짜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드러내지 않으면 안전하고, 숨기면 상처받지 않을 것 같다는 착각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이 곪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또한 드러내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어떤 피해도 받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태도로 살아온 사람. 이기적이지만 않으면 괜찮은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나의 행동과 선택을 스스로 합리화해왔던 시간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만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진짜를 드러내지 않으면, 결국 무엇이 진짜로 남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나의 진심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까. 조금만 더 깊이 말하면 무거워지고, 그렇다고 가볍게 말하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들 사이에서 오늘도 나는 번민한다.
특히 일을 하며 나와 팀원의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말해야 나의 진짜가 왜곡되지 않고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다시 붙잡게 되는 하나의 기준. 일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것. 일이 명확하게 잘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일을 하는 이유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놓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껍데기만 남은 가짜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시뮬레이션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결국 진짜가 아니다. 그래서 요즘 나는 가짜가 아닌 진짜를, 조금은 서툴더라도 진솔하게 드러내고 나누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고,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적어도 무엇이 진짜인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늘의 나를 조금은 믿어보기로 한다.
내 안의 한 줄
진짜는 감추는 순간 사라지고, 드러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