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없이 걷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시도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무 생각없이 걷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걷다보면 결국 '아무 생각없이 걸어야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 어릴 때 친구들과 했던 생각에 대한 말장난처럼 말이다.
"생각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것이 생각이므로, 생각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없이 걷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방법은, 뇌에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걱정스런 생각대신 다른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걱정이 생긴 공간(장소)을 벗어나 낯선 곳을 걷다보면 아픈 다리, 뜨거운 햇빛, 바람소리, 물소리에 더 집중하게 된다. 결국 걱정을 다른 걱정으로 돌려막는 거다. 인간은 결국 한 순간에 한 가지 일 밖에 못하는 동물이지 않은가? 인간이 한 번에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다. 아마 사용자(기업가)들은 우리들(노동자)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노동과 희생을 당연히 요구할 것이다.(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없음에 감사하자!)
암튼 걱정거리가 많은 현대인들은 걷는 길을 좋아한다. (얼마나 힘들면 영국의 한 인간은 걱정거리가 없는 염소가 되어 보겠다고 염소분장을 하고 풀을 뜯으며 기어서 알프스를 넘지 않았던가!) 그러다보니 제주 올레길을 시작으로 방방곡곡에 버려졌던 마을길들이 다시 연결되어 지리산 둘레길, 외씨버선길, 해파랑길 등이 만들어졌다. 하물며 800km가 넘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드글거린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지리산에는 물과 나무가 많다.
수많은 걷는 길 중 '지리산둘레길'을 좋아한다. 가장 큰 이유는 숲이 울창하고 맑고 풍부한 계곡물을 사시사철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사주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아내가 내 사주에는 불(화)이 많고, 물(수)이 고립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니 물과 나무가 많은 곳으로 가는 것이 좋댄다. 내가 어릴 때부터 물에서 노는 걸 좋아했던 이유의 비밀이 거기 있었나 보다. 요즘도 깨끗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런 물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지리산이다. 물론 경사가 급한 산을 올라가는 걸 싫어하기에 지리산 천왕봉보다 편한하게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을 더 좋다.
둘레길에 만난 계곡물에 발 담그기
지리산에는 왜 나무들이 많고 계곡에 항상 물이 많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지리산을 구성하는 주요 암석에 힌트가 있다. 설악산, 금강산 등과 같이 큰 바위가 봉우리를 형성한 돌산과는 달리 지리산은 흙이 많은 편이다. 지리산을 주로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편마암(약 40%)인데, 수억년 전에 만들어진 암석이 다시 뜨거운 열과 암력을 받아 성질이 바뀐 것이다(변성암). 가장 흔한 암석이므로 관심만 있다면 주위에서 생각보다 쉽게 볼 수 있다. 쉽게는 아파트나 공원 주위의 정원을 꾸민 검은색과 흰색 줄무늬가 교대로 나타나는 바위를 볼 수 있는데 요놈이 바로 편마암이다.
아파트나 공원 주위의 정원석을 흔하게 쓰이는 편마암, 검음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아름답다
편마암은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맞고 잘게 부수어져(풍화) 영양이 풍부한 비옥한 토양을 형성한다. 따라서 참나무와 같은 낙엽활엽수가 잘 자라고, 떨어진 넓은 잎들이 토양에 영양분을 다시 돌려준다. 특히 편마암이 풍화되어 만든 토양은 입자가 작고 미세하여 물을 지니고 있는 능력(보수력)이 뛰어나다. 이런 흙과 나무들이 물을 지니고 있다가 천천히 흘려 보내는 녹색댐의 역할을 해 지리산 계곡에는 사시사철 물이 많이 흐른다. 전국이 가뭄에 목말라 하는 올해 5월 말에도 뱀사골 계곡에는 물이 풍부했다. 덕유산, 오대산, 소백산, 태백산 등이 유명한 편마암 산들이다. 시원한 계곡물을 즐기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돌산보다 이런 흙산들을 찾아 보자. 그리고 계곡에서 돌맹이 만지며 느껴 보자. 이 돌멩이 하나가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살와 왔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더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나만 그런가? ㅋ)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 주변의 지리산 줄기들. 흙과 나무가 많다.
● 지리산둘레길 3구간 느긋하게 걷기
아침을 겨우 챙겨먹고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8시 20분 백무동행 버스를 타니 인월 시외버스터미널에 12시쯤 도착했다. 터미널 바로 옆에 시장에서 순대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선지가 들어간 피순대인데 3대째 이어온 집이라 그런지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북적인다. 순대국에 부추를 함께 먹는 건 많이 봤는데, 이 지역에서는 순대국에 콩나물을 넣어 먹는 것이 특이하다. 밥은 따로 주지 않고 미리 순대국에 따뜻하게 말아서 나온다. 든든하게 밥을 먹으니 기운이 난다. 이제 길을 나설 시간이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을 둘러싸고 있는 3개도(전남, 전북, 경남)의 120여개 마을을 둥글게 연결하는 285km나 되는 장거리 도보길이다.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둥글게 연결하는 이 길은 모두 22개 구간으로 되어 있다.
이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간은 전라북도 남원 인월에서 경상남도 함양의 금계마을에 이르는 3번째 구간이다. 약 20km에 이르는 이 길은 생각보다 경사가 급하고 길다. 체력이 좋은 분들이면 너끈히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힘들게 걷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여유롭게 인월에서 7km를 걸은 후 산내면사무소가 가까이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루를 묵었다.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인월-금계 * 지리산 둘레길 (http://jirisantrail.kr)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인월-금계의 시작점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지역은 귀농귀촌인구 많은 지역이다. 처음 유명해진 데에는 실상사와 대안학교가 있었다. 기존 사회를 벗어나 대안적인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여느 시골마을과 달리 다양한 소모임과 문화활동이 활발하며 마을 신문까지 발간된다. 생활협동조합, 마을까페 토닥,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청춘식당 살래 등도 벌써 입소문이 났다. 물론 도시의 모습을 상상하고 오신 분들이라면 작은 규모와 조용함에 조금 당황할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기존의 농촌과는 다른 시도들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귀촌을 생각하시는 분들이라면 이곳에서 하루쯤 묵으며 주인장의 스토리를 들어보시길 추천한다.
평일 아무도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혼자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내가 찾은 곳은 남은 둘레길이 아니라 뱀사골이었다. 1시간에 1대 정도 있는 버스를 손을 들어 겨우 잡아타고서야 지리산 뱀사골 입구에 이르를 수 있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만난 노각나무, 서어나무, 물푸레 나무를 쓰다듬으며 인사하고,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다람쥐와 대화도 시도해 본다. 속이 훤히 비쳐보이는 맑고 푸른 물이 흘러가는 이곳에 오면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걱정거리도 잠시 씻겨가는 듯하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이 짧은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간지럽히는 기분이 좋다. 지구(땅)와 나를 철저하게 분리시키던 두꺼운 등산화를 벗고 차가운 계곡물에 맨발을 담그니 그제서야 지구인이 된 듯하다. 물과 시간이 합작해 만든 널찍한 편마암 마당바위 위에서 챙겨온 책을 폼나게 읽고 간식도 먹고 햇볓도 쬐면서 한나절을 보내고 나니 문득 집이 그리워졌다. 결국 매동마을에서 금계마을에 이르는 나머지 둘레길은 다음으로 미루고 짐을 챙겨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다시 이곳에 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언제나 물이 많은 지리산 뱀사골
뱀사골에서는 편마암으로 만들어진 바위들을 쉽게 ㅗㄹ 수 있다.
바위의에서 폼나게 책읽기
뱀사골 계곡에서 보낸 지난해 가족 여름 휴가
● 산내면 게스트 하우스
- 달팽이 한옥게스트하우스 : 주인장이 직접 지은 한옥에서 살아보기. 특히 한식으로 차려주는 정갈하고 정성스런 아침으로 대접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달팽이 게하에서 저녁식사
대접받는 느낌이 드는 정성스러운 식사 - 소소 게스트하우스 : 깨끗하게 지은 집에서 조용하고 편하게 쉬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지리산둘레길 3구간 중간에 있는 소소게스트하우스
● 인월 먹거리
- 인월보리밥 : 보리밥 뷔페 식당, 친절한 할머니들이 준비해주시는 정겨운 식당
뷔페로 먹을 수 있는 인월 보리밥집 - 인월시장순대 : 선지로 만든 피순대가 들어간 순대국, 반찬으로 나오는 콩나물을 넣어 먹더군요.
여행떠나기 전에 든든하게 먹으면 좋다
● 산내면 먹거리
- 살래국수 : 담백하고 깔끔한 국수를 중심으로 한 식당. 둘레길에서 먹을 간단한 빵도 1000원에 판매함.
우리밀 국수인듯한 면발과 건강한 육수로 깔끔하고 저렴하기까지 ~ - 청춘식당 살래 : 4번의 여행중 결국 한번도 못먹오 본 식당. 지리산 청년들이 개발한 다양한 메뉴가 있다 함. 지난번에 방문했을 땐 점심에는 식당을 하고, 저녁에는 술집으로 운염함.
- 마을까페 토탁 : 살레국수 맞은편에 있는 마을 까페 토닥. 주변 학부모들의 아지터이며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 주먹밥도 판매하고 있는데 빨리 품절되는 단점이 있음.
● 책
- 시골생활 : 지리산에 이렇게 살 줄 몰랐지? / 정상순 / 문지푸른책
- 염소가 된 인간 / 토마스 트웨이츠(황성원 옮김) /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