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_ 갈등(葛藤)의 뿌리 (Ⅱ)
아버지의 율법 때문에 잡초들은 그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잃는다. 난 아버지의 세계에 봉사하고 있지만 여느 사제들처럼 귀찮음을 꾸역꾸역 참느라 매사 죽을 맛이다. 이웃 논의 주인도, 그 옆 논의 주인도 모두 자기 이익과 재산에 그런 식으로 봉사하는데, 그렇게 수만 제곱 평방미터가 잡풀 없이 말끔해진다.
잡초에 관한 체계적인 혐오가 기꺼운 수고로움으로 나타난다는 게 참 묘한 일이다.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힘쓰시며 경계근무를 하듯 논과 밭을 돌며 상태를 살피신다. 모든 풀을 없앨 수는 없으니 그 일은 끝이 없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어찌 됐든 그렇게 일상이 뜻깊어지는 것이다. 혐오와 축출은 그저 일일 뿐이다.
크고 억센 잡초는 뽑아서 다시 살 수 없게 포장된 도로에 쌓아놓는데 그곳은 그야말로 풀들의 아우슈비츠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내게 들풀에 관한 특별한 인식이나 이해가, 애정이 있었다면 그리 쉽게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무의미하고 불결한 것들을 분별하는 것, 그것이 혐오의 쓸모다.
아버지가 내게 다른 논에 가서 김을 매라 하시면 그 자리에서 뻘이 묻은 손을 훅훅 털고 일어선다. 그 원정에는 텅 빈 두 손만 있으면 된다. 나는 정벌을 명 받고 허리춤에 우스꽝스러운 금도끼를 찬 장군처럼 어깨를 힘주어 턴다. 마치 요동을 정벌하라 명 받은 조위(曹魏)의 사마의처럼 논 밖으로 나간다.
공손연이 지방 할거세력으로 성장하여 위나라의 변경을 위협했다. 위 명제(明帝)가 묻는다. “공손연이 장차 어떤 계책을 쓰겠는가?” 그러자 사마의가 답한다. “무릇 현명한 자만이 상대와 자신의 역량을 미리 포기할 수 있으나, 이는 공손연에 미치는 바가 아닙니다.” 그는 정벌에 1년이면 족하다 자신한 뒤 출진하다 고향을 들렀다. 그리고 잔치를 열어 베풀었는데, 마을 장로들과 어울려 마시다가 문득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노래엔 이런 구절이 있다. “…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내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그리고는 양평성을 접수한 뒤, 2만여 명을 처형해 ‘경관(京觀)’을 쌓았다. 나도 후끈하고 바삭거리게 달아오른 포장도로에 잡초를 수북이 쌓는다. 뿌리가 위로 들린 채 말라죽어간다.
전에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라는 영화를 아주 재밌게 봤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감독하고 ‘브래드 피트’와 ‘크리스토프 발츠’가 주연한 액션영화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대체역사를 다룬다.
영화는 나치 친위대 대령, ‘한스 란다(Hans Landa)’가 점령지 프랑스의 한 농가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숨어있는 유대인을 색출하라는 지시를 받고 파견된 그는 농부를 능수능란하게 압박하여 결국 숨어있던 유대인들을 사살한다.
란다가 농부에게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독일인들은 매와 같지만, 그들(유대인)은 쥐와 같다 … 자신은 다른 독일군(매)과 달리 그들(쥐)처럼 생각한다.’ 그의 작업은 김을 매는 것과 비슷하다. 파시스트 독일인들의 오와 열을 벗어나 자라고 있는 유대인을 분별할 줄만 알면 된다.
영화 후반, 선전영화 시사회에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왈도 레인’ 중위와 그 부하를 체포한 란다가 갑자기 그들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독일의 패망을 직감하고 미리 탈출하려는 속셈이다. 그는 히틀러 암살을 막지 않을 테니 암살 작전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망명을 허락해 달라 말한다. 그때 중위의 부하가 ‘유대인 사냥꾼’이라 비난하자 불쾌한 오명이라는 듯 반응한다. 란다 자신은 그저 ‘훌륭한 탐정’ 일뿐이라는 것이다.
영화 초반과 달라지는 란다의 반응은 영화의 재밌는 지점 중 하나다. 그는 분명 초반부에서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과 자신의 능력을 뽐냈었다. 그러면서 ‘사형집행자’라는 별명을 싫어한 동료 장교를 헐뜯었다. 그런데 정작 독일이 패망하고 전범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보이니 비겁하고 뻔뻔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혐오란 담당자들에게 그저 일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김을 맸을 뿐인데, 왜 일을 하고 월급이 아닌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상식적인 사람들은 그 정도가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맞다. 그러나 무딘 인간들에겐 아니다. 작고 여린 싹도 잊고 있으면 어느새 큰 나무로 자라 있다. 혐오가 극단에 이르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전범재판에서 보았듯 체계적 혐오는 관성적이다.
공범들은 역할과 지위 뒤에서 무표정으로 그 일을 해치울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는 의식의 짐을 덜어버리고 효율적으로 대상을 취급하기에도 바쁘다. 그러니 경제적이어야 한다. 혐오는 감정조차 혐오한다. 특유의 냉정함은 그 실천이다. 이때 힘의 균형이 깨지고 한쪽이 다른 쪽을 배제할 여건이 되면 일방적 폭력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 걸 이성의 명령이라 포장하는 게 광기다.
어릴 때 우연히 중국 상고시대 설화를 엮은 책을 보았는데 거기엔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 소수민족들은 하나같이 짐승들처럼 생겼는데 말하자면 사지(四肢)만 제자리에 붙어있을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최근엔 중국 상고사(上古史)를 연구한 다른 책을 읽었다. 그 책은 약 3000년 전 당시 중원의 고대인들이 이민족들을 어떻게 사냥해서 공양하고 잡아먹었는지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들의 바비큐 파티에 관한 묘사를 보자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구역질이 난다. 그렇다고 이를 중국 사람들에 대한 편견으로 확대하진 않았다. 우선 당시로서는 인신공양이나 식인이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었고, 인격 말살은 지금도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소수민족을 무슨 토끼나 돼지, 도마뱀, 혹은 승냥이나 도깨비처럼 그렸을지 생각해 본다. 자신들과 그들을 문명과 야만의 인식 구도로 재편한 기저를 곱씹는다. 그 고대인들은 사냥감이 살아있을 땐 몰라도 죽이고 나서는 혐오하지 않았던 모양인데, 이는 제사와 식용에 써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돼지를 손질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어릴 적 고향에선 명절마다 아버지가 돼지를 잡았다. 그런 날은 살아있는 암퇘지가 오물을 뒤집어쓴 채 구린내를 풍기며 화물차에 실려있었다. 뒷다리에 녹이 슨 철사가 감겨 발목을 파고들어 있다. 멱을 따려는 아버지가 슬레지해머를 들고 짐칸으로 올라설 때면 마당에서 뭘 안다고 서서 보고 있는 내가 있다. 아버지는 망치로 돼지의 코를 정확히 명중시킨 뒤 철사를 풀어 짐칸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기다리며 칼을 갈던 삼촌이 발버둥 치는 그것의 목에 구멍을 낸다. 지루해진 나는 방에 들어가 버리고 마당은 털이 타는 누린내로 가득해진다.
혐오의 기저엔 어떤 위생 관념 따위가 있는 것 같다. 온전함을 망치는 모든 것은 불결하고 혐오스럽다. 규범이나 가치에는 서열이 있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혐오하기 쉽다. 사람의 마음은 가장 높은 자리에 이데아를 모신 질서의 신전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깨끗이 잘 정돈된 방과 같은 걸 상상하듯 한다. 그리고 그 청결함을 배반하는 해충 같은 것들을 모조리 쓸어냄으로써 소화불량에 걸린 자신의 세계를 정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어떤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청결함을 망치는 ‘뭇 더러운 것’이 무엇인가?
혹자는 세간에 혐오가 만연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혐오가 만연했는지 아니면 그저 말의 범람인지는 따져보고 싶다. 혐오 대상은 당장에 무슨 해를 가할 게 아니라도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해악이라는 강력한 추정을 받으며, 따라서 구제(驅除)의 대상이지 보복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극단에는 대상의 멸절이 추구된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들 사이를 혐오가 채우고 있다면 갈등은 더 극단적이었어야 한다.
물론 혐오가 무조건 일방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겨자씨와 같다.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뿌리 뽑기 어려워진다. 그것이 자라는 과정은 미묘하고 꾸준해서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그 씨앗을 골라내기란 쭉정이를 골라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인본주의가 목숨의 무게감을 키울수록 세상엔 사람들의 다양성과 가능성이 넘친다. 그런데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전형이 그 다양성을 따라가지 못할 때마다 ‘비인간’은 계속 발생한다. 세계엔 전형에 부합하는 문명과 그렇지 않은 야만이 갈마들며 공존하는데, 그 뿌리는 저 밖 어디가 아닌 바로 내 안에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을 스스로 그 전형에 부합한다고 믿는 사람은 세상을 무지갯빛이라 쓰고 난세라 읽는다. 그렇다면 혐오는 극복되는 게 아니라 세분된 것이다. 혐오를 그저 극단적으로 미워하는 감정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사실 매우 본능적이고 효과적이다. 처음엔 그저 거리감의 일종이지만 결국엔 아주 없애버리고 싶은 정동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암퇘지 한 마리를 도륙하는 일처럼 무감각과 냉정한 기술로 변주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사방에 악당이 있다고들 말한다. 바야흐로 혐오와 갈등의 시대라는 표현도 본 것 같다. 아마 인터넷이라는 공론장이 여러 사례를 한데 모아 보여주기에 가능한 현상이리라. 이제 평생 볼 일도 없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를 돼 먹이며 경험된다. 험담의 본성이 있는 인간들에겐 그야말로 말의 황금시대다.
이제 의혹은 감추는 게 아니라 덮는 것이 된다. 인터넷에는 각종 악당에 대한 소식이 대중매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렇지만 자고로 진정한 악당이라면 그 최첨단 덮개 밑으로 숨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대체로 그 덮개까지 들춰볼 만큼 한가한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즉 여유가 없으니 그런 기만도 제값을 하는 것이다.
고로 인터넷은 세간의 진정한 악을 밝게 드러내지 못한다. 오히려 무분별한 분노와 증오만을 서로에게 난사하며 누구 하나 나락 보내기에만 혈안이다. 그러므로 ‘혐오’가 만연한지 묻는다면 회의적이다. 우리는 확실히 고통과 고독, 그리고 수치스러움에 뒤섞여 살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게 사람 사이에 혐오가 만연했다는 뜻은 아니다. 혐오는 분명 사람에게 투사하기에 조심스러운 감정이다. 본래는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는 반응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선 혐오라는 감정 자체가 윤리적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다.
사실 누굴 미워한다고 하면 그게 증오심인지 혐오감인지를 구별할 실익이 별로 없다. 그저 어릴 때 부모로부터 친구를 미워하면 못쓴다고 들은 게 전부인 사람들에겐 중요한 구분이 아닐지 모른다. 예전엔 내게도 그런 구분이 없었다. 그저 건전한 타성에 의지해 미움을 멀리하려 애썼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혐오를 극복하기 더 어려웠다. 증오하는 대상은 용서할 수 있는데 혐오하는 대상은 용서할 수 없었다. 바퀴벌레를 누가 용서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대상을 혐오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본질적이고 중요하다. 상대방을 나와 동류로 보지 않게 되면 제아무리 악랄한 짓도 거칠 것이 없다.
증오는 피곤한 일이다. 그럼에도 내 어린 시절은 너무도 기운찼다. 하루 종일 누군가나 무언가를 미워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미숙한 미움은 쉬이 티가 나 곧장 반격을 받는다. 그래서 어른으로 자란 미움은 다른 차원으로 변태 한다.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은밀히, 그리고 계산적으로 미워한다.
그러나 혐오는 제아무리 열심히 해도 피곤하지 않다. 나를 보존하려는 본능은 집요하다. 그러니 언제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측면이 윤리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해도 마음은 말을 듣지 않는다. 나 자신을 향한 혐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때는 내가 나를 나로부터 축출한다는 역설 속에 갇힌다. 자아는 분열한다.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불행의 늪으로 던지는데도 묘한 안도감에 빠진다. 세상의 질서가 해명되고 일상은 지속성을 갖는다. 이로써 행복의 본질이 그 불결한 뒤를 내보인다. 사람에겐 그것이 어떤 것이든 뻔한 삶이 필요하다. 내 불행도 그런 뻔한 평화 속에서 계속된다. 그러나 불행은 불행이며, 게다가 나만의 불행마저도 아니다.
불행한 사람은 이웃의 일상에도 결국 불행의 씨앗을 뿌린다. 어리석고 거친 사람은 이웃들을 전율케 한다. 무례한 사람은 더 무례한 이웃을 만든다. 하지만 적당히 행복한 사람은 적어도 이웃들의 일상을 망치진 않는다. 반면 불행한 사람은 악덕 때문이든 불운 때문이든 주변에 불행을 나눈다. 그래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행복할 수 없다. 불행의 씨앗을 뿌리면서 느끼는 쾌감은 이상성욕이나 마찬가지일 뿐이며, 그의 일상은 점차 거친 무뢰배의 옆자리로 옮겨진다.
물론 선량하게 행동한다고 꼭 행복하고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선의가 지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며 심지어 선량한 행위의 진정성 자체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모든 행위는 의지로부터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어 남들은 물론 그 주체조차 본질에 닿기 어렵다. 그래서 위선은 아주 근면하고 참되게 삶을 더럽힌다.
나는 혐오라는 감정이 보통 객체로 삼는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이 말을 남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또한 혐오감을 단순한 윤리적 잣대로 다루는 것도 경계한다. 엄밀히 말해 혐오감은 바퀴벌레나 모기와 같은 해충한테나 써야 할 말이다. 혐오를 말한다는 것은 대상이 지닌 어떤 불결한 특성이 나의 생명이나 위생에 대해 위협이 된다는 진술을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본능적인 동시에 너무도 파괴적이다. 그래서 더 구조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살아간다는 게 사회적 생존까지도 함축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망쳐버릴 수 있을 만한 것들을 향한 이 무차별적 감정은 위험이 소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혐오가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동원되는 것도 그 구조적 특성이다. 그렇게 우리의 건강한 존립을 위하는 본성이 세상을 지옥으로 바꿀 수 있다.
나와 세계의 관계는 주어와 술어의 도식으로 비유할 수 있다. 나는 세계 속에서 그 맥락을 떠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술어인 세계가 잠재적이나 실재하는 위협이 될 때, 나와의 이 도식에서 주체를 보존하려는 열망은 물안개가 끼듯 공동체 저변을 향한 혐오로 잠식해 들어간다. 게다가 생존본능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를 단순히 금지하는 건 실효적이기 어렵다. 따라서 우린 혐오를 단순히 배척할 게 아니라 건전한 형태로 제약해야 한다.
단지 그것이 너무 본능적이라 더욱 당당히 미워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면 반대편에선 가설이었던 타자의 위협이 곧장 현실이 되어 증오와 보복으로 맞서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이 정서는 주체의 온전함에 도전이 된다는 의심만으로도 충분히 발생한다. 벼가 아니라는 점이, 유대인이라는 점이, 무슬림이라는 점이, 이민자라는 점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는 점이, 늙거나 어리다는 점이, 심지어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점이 그 위험 지표로 될 때, 혐오는 남용될 수 있다.
최근 ‘혐오’로 규정된 많은 범죄나 그에 준하는 비도덕적 행태, 정치·사회적 갈등이 뉴스에 자주 노출되는 건 사실이다. 혐오의 논리는 1945년에 피날레를 장식했을 뿐 끝난 것이 아니다. 당장에 그 역사적 피해자라 자처하는 유대인들의 행보도 거기서 시작된다. 몇몇 야심 찬 시온주의자(Zionist)들은 자신들만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확보하기 위한 기묘한 모험을 감행하여, (그들이 보기에 상대적으로 비인간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터전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쓸어버렸다. 그렇다고 혐오가 반드시 힘 있는 자의 전유물이 아닌 건 너무 당연하다. 오히려 자신을 선의의 피해자나 약자로 규정하며 상대방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는 실제로 극단적인 사람들이 써먹던 고전적 수법으로, 혐오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들이 동원할 힘과 역량을 결집하려는 속셈이다.
분명 혐오는 자연스럽고 불가결한 감정이다. 그것은 해로운 것을 피하거나 배제하려는 자기 보존의 명령이다. 그러나 ‘자기 보존’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기준에 따라 혐오는 어떤 것이든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9·11 테러가 일어난 2001년부터 사람들은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모든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내뱉곤 했다. 그런데 그런 류의 ‘테러리스트’란 1930년대 독일에서는 ‘무슬림’이 아닌 ‘공산주의자’였을 것이고,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겐 ‘조선인’들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형편없이 좁은 주관을 가졌고, 사람들은 서로를 자잘한 혐오로 다루어 왔다. 애들은 어떻다느니, 노인들은 어떻다느니, 남자라서 어쩌고, 여자라서 어쩌고 하는 자잘한 소리가 그것이다. 그런 주관성의 엄중함 탓에 사람들은 삶의 조건을 엄격히 따진다. 그런데 자아의 술어는 그것을 수식하는 일상의 맥락이기에, 자신을 평가할 때 도리어 세계와 타자가 현상한다. 우리가 스스로에 관대하지 못할수록 자신에게 표상하는 세계의 순결성도 엄격히 검증하려 든다. 그래서 자기 외부에 현실로 나타나는 타인에게도 관대하기 어렵다.
자기혐오에 깊이 빠진 사람은 세계로부터 자기혐오의 표상을 알아보고 잔뜩 찌푸리며 두려움과 역겨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고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람의 타인들은 자신을 그렇게 대한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증오심의 늪에 빠져든다. 둘은 아주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 이 단계에서 논리나 이성이 중요하겠는가? 이미 혐오 대상이 된 사람들은 자신이 이성을 갖춘 존엄한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취급을 받은 셈이니 그 무뢰배들에게 본때를 보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혐오 대상으로 지목된 이들은 이 땅이 전부 불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기혐오는 이 긴밀한 상호작용의 강력한 매개다.
그래서 자기혐오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혐오감 중 가장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 감정은 자기 자신만 해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도 해악을 가한다.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평가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치는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자기혐오의 끝에서 우린 타인의 존재감도 엮어서 평가한다. 결국 공격의 대상이 자기 자신에서 타자로 옮겨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자기혐오에 빠져있어서 문제시되지 않았다. 자기혐오는 그저 개인의 감정적 짐이나 우울감의 한 현상으로 취급될 뿐이다. 그러고서 서로를 문제시하면서 손가락질하는데, 그런 이들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도 그 누구보다 맹렬히 손가락질하고 있는 셈이다. 그저 삶의 조연에 불과한 타인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일쯤은 예삿일이다. 단지 규범의 여러 명령이 우리의 실제 손가락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조금이라도 익명성의 베일 뒤에 숨을 수 있게 되면 여지없이 그 손가락질이 튀어 나가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설령 누군가의 잘못을 목격하더라도 그들 자신을 혐오하지 않았다면 이웃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굴기 민망했을 것이다. 그들이 당위를 내세워서 누굴 비판할 때 그들은 자신 안에서 수도 없이 이뤄진 자아비판의 얼룩을 상기하면서 그 악당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네가 뭔데 그따위로 행동하느냐고.
그러나 대개 그런 비난은 안 했어도 그만인 쓸데없는 짓이다. 오히려 그 상대방에게 점잖고 솔직하게 타일렀다면 더 효과적으로 악의 뿌리를 뽑을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런 대담무쌍한 일을 벌이기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하기 어려워진 상태에 있다. 자아분열로 만성피로에 시달리면서 그렇게 냉정히 깎고 다듬어 나온 부스러기들을 과거라는 쓰레기장으로 치워버리는 일로 하루를 다 보내는 마당이다. 그러니 남들에게 선량하고 따뜻해지는 일마저 주제넘는 짓이 돼버린다.
그렇다고 누군가 내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할 때면 당최 와닿지 않는다. 자기애니 자존감이니 하는 말들은 공허하고 무책임해 보인다. 누구는 자존감을 자신감과 혼동하고, 누구는 자아상을 지지하고 위무하는 것이라 하며, 누구는 그냥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라 한다. 또는 제발 자기편이 좀 돼보라고 권고하며, 그러면서도 지나친 자기애는 나르시시즘이라 경고한다. 누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하는 게 자존감이라 하는데 이마저도 구체적인 사정을 몰각하는 것 같다.
그런 조언이 당장에 듣는 이의 하루는 살릴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리다. 자기를 긍정하라는 조언은 한결같이 그 자신의 책임자라는 사실만 상기시킬 뿐이며, 그 책임이 다시 문제 되면 갈기갈기 찢긴 그의 세계가 다시금 자기부정으로 부유하게 될 것이다.
실존은 사실의 총체다. 누군가가 ‘나’를 말할 때 그는 주체로서 몸담은 세상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발화는 자기가 주체로서 어떤 서사의 주인공인지를 선언하는 일이며, 이로써 그가 세계를 술어로 삼는 존재로 드러난다. 그래서 나를 긍정한답시고 하는 언행이 내 세계에 대한 긍정과 어울리지 못하여 그 분열을 일으키는 한, 자기부정은 극복되는 게 아니다. 주어인 주체가 술어인 세계와 어울리지 못하므로 우린 완전한 문장, 즉 실존으로 현현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세계는 배제될 수 없다. 비교질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그 위상을 인식하는 도구 이상이 되면 자신을 세계로부터 유리시키기만 할 뿐이다.
떠올려지는 ‘나’는 감각되는 세계를 통해 다듬어진다. 이 빛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타자를 통해 그림자로 드러나는 우리의 자아상을 보자. 만일 그 자아상을 부정한다면 이는 양면적 진술을 하는 셈으로, ‘나’라는 자아상을 부정하는 동시에 그것에 연루된 세계를 부정한다. 다양한 관계에서 자신의 가치가 변주될 것을 생각하면 그 자신에 관한 평가도 유보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이어야 하지만, 자기혐오에 빠져 섣불리 못나고 흉하다고 말할 때 그 주체는 나와 그것을 성형한 세계를 동시에 부정한다. 그리고서 도망칠지, 복수할지, 성형할지에 관한 압력에 시달린다. 그로부터 현재에 머물 수 없는 부유하는 자아가 만들어진다.
혐오 정서 자체도 사실 외부로부터 수혈된 것이다. 주체에게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도 결국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세상과의 관계가 수동적이기만 하다는 뜻이 아니다. 돌아보고, 곱씹고, 따지는 과정은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 대도시에서의 삶은 자신만의 공간을 오롯이 경험하기 어렵게 한다. 마음에 떠오른 것들이 너무 여러 경로로부터 유래해서 개성은 타자의 존재감으로 드러나는 세계에 반발하는 현상으로만 검증된다. 자신이 주변을 충분히 배려하고 부조하고 있다고 믿었던 이웃들에게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쪽이 반대편에 손가락질하면 다른 쪽에서도 고마움을 모른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한쪽은 반대편이 어떤 배려와 부조를 했는지 잘 모른다. 자기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서로를 배려하고 부조했다는 사실이 그저 일방적인 믿음에 불과했는지, 아니면 상대방이 너무 까다롭고 분수를 모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때 몇몇이 나타나 갈등으로 벌어진 공동체의 상처를 봉합하기보다 싸움을 부추긴다. 갈라진 상처의 양쪽에서 서로를 비난하면서 저들 때문에 아물지 못하니 저쪽 살을 완전히 도려내 버리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살을 전부 도려내 버리면 아물기는커녕 과다 출혈로 전체가 죽고 말 것이다. 결국 자신이 무엇을 미워하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세상을 위협한다. 갈라진 틈의 건너편에 있는 살도 우리의 살인 것을. 그렇게 도시인들은 점점 서로를 지긋지긋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