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닻

제3장 _ 갈등(葛藤)의 뿌리 (Ⅲ)

by 노하윤

나는 요즘 자꾸 남쪽에 눈이 간다. 향수(鄕愁) 때문이라기보다 뭔가 다시 돌아가는 것이 나답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내가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니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때 난 그저 주차할 곳이 없다고만 답했다. 말하고도 뭐 이런 대답이 다 있나 싶다. 그러나 나도 이것저것 따지다가 그렇게 답한 것이다. 나름 사실이기도 하고.

난 아버지가 점점 부러워졌다. 당신은 그 넓은 논밭에서 자신이 얼마나 필연적인 존재인지 느끼며 사는 듯했다. 언제든 갈아엎거나 그 안에서 자라는 것들을 쥐어뜯고 베어 묻어버릴 수 있는, 처분 가능한 세계. 물론 진짜 부러운 것인지 깊이 곱씹어보아야 한다. 일상 구석구석에 스며드는 타자의 존재감에 숨이 막힐 때마다 하는 과장이 아닐까?

타인은 지옥일까? 물론 출퇴근 때마다 그 생각을 하는 건 지극히 정상이라 장담한다. 하루는 한창 달리던 지옥철에 전동휠체어가 밀고 들어왔다. 물론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다만 서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내 옆에서 문 앞에 거의 찌그러질 듯 끼어있는 여자가 눈으로 분명 아주 험악한 욕을 퍼부으며 휠체어 주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요하고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애써 시선을 휴대전화에 고정한다. 아, “몸을 갈아 넣어 임해도 뭐 하나 되는 게 없고, 그저 일로 지쳐 고달픈데 머리를 뉘어 쉴 데도 없으니, 이 얼마나 애처로운가?” 논밭에 심어진 작물도 제가 뻗을 여지는 있는데 그 지하철 안은 아니다.

존재감을 내뿜으며 영역을 다투어 붙어있다 보니 어느새 서로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을 따름이다. 칡과 등나무는 그저 우연히 이웃해서 자랄 뿐이나, 둘은 그 다른 본성 탓에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다. 늦은 퇴근길에 이미 불금을 맛보고 구토를 하는 사람을 흘겨보며 사르트르를 곱씹는다.

아버지의 논밭이 부럽다는 것은 당신이 실존하는 세계의 널찍함이 부럽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진짜 어른들만 경영할 수 있는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내가 딛고 선 곳은 아버지의 것에 비하면 좁고 불결하지만 비싸기까지 한데, 어떤 때는 내 몸을 감싼 옷 말고는 이웃과의 경계를 나눌 담이 없는 지경이다.

나는 종종 아무런 이질감 없이 남들과 그 얇은 벽을 나눠 쓰는 대도시의 삶을 동경하는 이들이 신기했다. 그 포대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아무것도 광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내 주변에서 광야로 나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말하자면 탕아가 되느니 남의 품에 안길 기회를 더 오래 붙잡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세상이 너무 좋아진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잊어버린 것일까?

그런데 사람이 성장할수록 자신의 권능이 더 실제적인 것이 되어 눈이 가는 곳마다 자기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낄 즈음이면, 주차 공간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안이 나의 거의 유일한 도피처가 될 테니까.

미움은 사랑만큼 복잡하지만 더 근원적이다. 고독이 좋다고 말하는 이 하나 없어도 거의 같은 모양의 독방이 줄지은 저 열차를 보라. 서로를 얇은 벽 너머로 노려보고 불평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실제로 내가 마음에서 벌이는 일을 들여다본다. 나는 풍선처럼 밖에서 불어온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풍선이 비대해질수록 갑갑하기만 할 뿐이다. 안팎의 압력으로 시름하는 내게 타인은 그 바람의 근원이면서도 겸손과 다이어트를 요구하는 시선이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나와 내 세계를 미워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그 마음으로 정확히 무얼 배제하고 싶은 것인가? 그 풍선의 바람을 빼면 아무리 좁은 곳이라도 괜찮을 텐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이러니 넓은 집과 큰 차에서 인심이 나오는 것이다.

이웃들이 자기 안으로 불어닥치는 남들의 바람을 증오하며 홀로 서 있다. 일단 자신만의 피난처로 도망치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다.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그 빵빵한 풍선을 터트려버리겠다고 윽박지를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나 고독도 우리네 본성에 어울리진 않는다. 완전히 무던해지고 닫힌 마음으로 약쟁이처럼 공허하고 붕 뜬 눈을 하고서 적응했다고 자위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조심스레 그 해법을 따져본다. 나는 더 넓은 집을 바라면서도 내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고요를 두려워한다. 고독이란 그런 것이다. 끝없는 혐오 끝에, 나를 마주해야만 하는 두 번째 방.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조금이라도 조화롭게 만드는 과정에서 나는 일종의 입법자와 같은 책임을 어깨에 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예전엔 너무 사소해 보여 무시했던 것들이 나의 현재를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도 조금 더 선명히 보인다. 이때도 결국 나는 의미를 만드는 과정에 있는 셈이다. 사실 혼자가 되는 일은 조망할 거리를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다.

내가 현재의 일부를 점유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숙고해 보면 홀로 되는 일이야말로 이루기 어려운 목표다. 타자의 흔적은 늘 내 곁을 가득 메우고 있다. 다만 내가 인간적으로 갈망하는 관계가 적을 뿐이다. 교감은 생각보다 본질적인 현상이 아닐까? 내 마음에 꼭 맞는 존재야 본래부터 별로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생각을 뒤집어볼 일이다. 나 자신을 직접, 마치 데이트를 완성하는 작은 보석과 같이 되도록 다듬고 가꾸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타자나 집단을 상정한 노력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한다.

진정성은 부족한데 자아만 너무 비대해진 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본인 삶의 병풍이나 다름없는 허명(虛名)을 좇는다. 그걸 낮잡아보는 건 아니다. 이는 사실 대단히 현실적인 태도다. 요즘같이 빠른 시대에 성급한 사람들을 속여 돈을 버는 데 그만한 게 없다. 이런 세태에선 판단을 유보하며 신중해지는 일조차 비용으로 여기니까. 그렇다고 모두가 그 일에 성공하진 않는다. 게다가 성급함을 직관적인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한편에는 광장으로 나서서 허구한 날 비방할 대상을 찾아 삿대질하는 일로 자기 존재를 꾸역꾸역 입증하려는 이들도 많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영향력과 존재감을 확인하려 목청을 높여야 할 만큼 눈과 귀가 닫혀 있다. 그들이 실제로 무슨 거창한 철학을 지녀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님을 장담할 수 있다. 그저 자신들의 외로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유의미한 과업을 찾지 못했거나 오직 집단 속에서만 의미를 수혈받는 이들이다.

과거에 누군가도 대중이 소속감으로 삶의 공허감을 메우려는 심리를 선동의 자산으로 삼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그러한 패거리 속에서만 삶의 의미를 느꼈고, 또 다른 이들은 그 흐름에서 생길 변화에 편승해 이익을 얻을 궁리뿐이었다. 그런데 그 흐름이 실제로 사람들을 전쟁의 삼각주로 끌고 간 것이다. 나는 1930년대 독일 국민이 주체적인 일원으로서 독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신념에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라고 장담한다. 그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이 그 무게를 떠맡아준다는 사기꾼에게 주권의 집문서를 넘겨버린 것일 뿐이다.

그 시기 독일 엘리트들은 헤겔과 피히테의 이름을 빌려 공동체 강성의 논리를 정당화하려 했겠지만, 정작 독일 공동체를 위한다고 철저하게 믿었던 몇몇 광신도가 그 주역이라는 불편한 진실은 소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광기는 역사에 관한 거대 담론 속에서가 아니라 작고 여린 개인들이 모여 벌이는 소꿉장난에서 만들어진다. 작은 것들이 지닌 변화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만일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외롭다면 당장에 자신의 삶이라는 공장에서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 나설 때다. 그게 어렵다면 주변에 도움을 줄 만한 일이라도 찾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혹시 모른다. 책상 앞에서 기계적으로 결재만 반복하던 아이히만처럼 될지 누가 아는가? 자기규정에 실패한 이가 혼자서 만들어낼 소외의 망상으로부터 자유롭기란 매우 어렵다.

고독을 건전하게 향유하려면 자신의 삶이 의미를 창출하는 장(場)이라야 한다. 그러지 못한 이들은 저 덩어리 진 타자, 즉 세계를 두고 자신을 파괴하려는 가해자로, 그리고 자신은 그저 약자이자 선량한 피해자로 보는 시선을 거둘 수 없으리라. 즉 자기 삶의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과업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매사추세츠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에서 약 2년을 살며 사람들이 일상에 바치는 고행, 사회적 허영심 때문에 집착하는 라이프 스타일로부터 비판적 거리 두기를 실험한다. 그는 호숫가에서 작은 오두막을 지어, 사람 대신 자연이 자신의 문을 두드리고 말을 걸어오는 것을 체험하고 기록했다. 그의 책은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작은 이웃들과의 일로 가득하다. 오두막이 새들과 다람쥐에게 호숫가의 여느 바위들처럼 여겨지기 시작하자 무수한 동물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소로우는 그런 일상으로부터 어떤 유추에 도달한 나머지 마음으로 세계를 횡단하고는 어떤 일관되고 조리 있는 시선을 세간에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난 조화에 관한 그의 특별한 시선 탓에 자국의 침략전쟁에 관해 비판적일 수 있었다고 이해한다. 그의 책은 그저 숲 속 생활의 낭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마음속 타자의 자리가 절대 공석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 이웃이 사라지자 그의 마음이 ‘사람의 말’이 아닌 새와 다람쥐의 언어로 채워졌다. 그런데 이는 그들이 진짜로 말했다기보다 소로우의 의미로 환원된 것으로, 고독한 공존으로 자아가 실현되는 경험에서 주권을 추출한 셈이다. 그로부터 국가의 역할과 시민의 주권에 관한 그만의 생각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그가 그 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월든 호숫가의 작은 오두막을 초월한 삶의 의미를 추출하는 과정이야말로 그가 내게 준 보배였다. 내게 자유의지가 있는지는 아직도 여러 견해와 엉켜 체념의 소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적어도 윤리적 존재가 된다는 건 자율성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그것은 실천이성이 자신을 가라앉히는 힘들로부터 부단히 일어나 자기본위를 관철하려는 덕이다.

나는 고독에 관해 진지해지기 전까지 그런 삶의 소리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관계가 주는 선택의 제약들은 내가 남 탓을 일삼고도 허물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누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버리면 모든 핑계가 완성된다. 그런데 내 주체성과 책임을 탈락시키는 비겁함은 실제로도 삶의 주도권을 잃게 만들고 말았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과 내 생각, 입장, 태도와의 관계를 반추하지 않은 채 게을리 넘겨버린 결과, 그 일들은 내 지혜가 되지 못하고 실수로 누적돼 내 목을 조여 왔다.

자기혐오가 책임감의 일부가 아닌 이유도 그렇다. 일견 자기를 비난함으로써 스스로 겸허히 낮추며 소임을 다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실천이성의 팔다리를 자르면서 자신을 도출한 세계를 부정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는 스스로 무기력해지거나 자신의 흔적이 투사되는 모든 것을 소각하려는 마음으로 기울 따름이다. 그때부턴 나와 연루된 세계가 스스로 저주받았다는 신호 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본래부터 늘 내 마음에 타자의 소리를 담을 그릇이 있었다는 것. 어쩌면 나 자신이 그릇 자체였다는 생각도 든다. 마음에 떠오르는 것에서 세계로부터 건너온 필연성이 엿보인다. 마치 손님의 예방(禮訪)을 염두에 두어 미리 준비된 느낌이다. 고독할 때 난 그 소리에 더 민감히 반응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이 그리움이나 소외감으로만 보이며 나를 힘들게도 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찾아와 연이어 흔들었다. 거나하게 차렸으나 응답 없는 제단 앞에 선 카인처럼 서운하고 분한 마음에 홀로 떨었을지 모른다. 처음엔 무수히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 과정을 훼방 놓는 것들이 세상엔 참 많다. 사람들의 관심에 대한 유아기적 욕구를 끄집어내어 마구 간질이는 커뮤니티나 SNS(Social Network Service), 인스턴트 동영상 플랫폼이 그 대세를 이룬다. 인정투쟁의 본능은 그런 매체에 대한 탐닉을 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그것들은 연결의 편의를 제공한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자기 존재의 위상을 잊고 가상 속에 부유하며 자신과 세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통곡의 벽을 쌓게 할 뿐이다. 그 덕에 남들이 자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는지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세상의 상대평가와 줄 세우기로 이리저리 치이며 회의감에 젖어간다. 사람들은 점점 부표 그 자체가 되어간다. 그리고 자기부정으로 나아가며 방황한다.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너무 소중해서 희생하고 헌신한다. 그러니 어디에서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얻을 수 없는 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세계에 벽을 치며 누구를 위하겠는가? 허접한 짐승은 거울 속에서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외로움은 분명 버겁다. 사람들이 자기 존엄의 절대성을 알고 있더라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자신 안에 항상 준비된 그 그릇을 채우고 싶은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서라 본다. 그리고 타자의 그림자인 세계로 도배된 내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면 안 된다는 편식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진짜 유아기적인 것이다.

그리움을 해소하려고 나서는 순간 소외감은 이미 도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구와 만날 것인가? 이때부터 머릿속에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자기 가치를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난 당신에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줄 만한 사람인가?’ 그 순간은 일종의 경매와 같다. 때론 머릿속이 경매장이 아니라 법정이 될 때도 있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느냐를 묻는 데서 끝내지 않고 청문까지 하여 죄를 샅샅이 파헤치고 낱낱이 열거한다. 그러면 누굴 만나겠다는 생각은 접고 다시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가서는 몸에 해로운 외로움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요컨대 이런 건전치 못한 외로움은 두 가지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자신만의 과업을 찾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자신에 대한 진지하고 제대로 된 해석을 갖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남들에게서 거저 얻는 평판과 분명히 다르다.

요즘엔 그런 평판마저 기성품이 되어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태가 순전히 가축품평회나 다를 것 없다는 사실로부터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품평회의 특징은 구경꾼들까지도 그 가축 중 하나가 되고 만다는 데 있다. 이때의 개성이란 엄밀한 고유성이 아니라 젊은이의 첫 새치에 가깝다. 결국 무대의 가축들처럼 대가리나 옆구리에 찍을 점 하나가 없어서 종일 기분을 망치고 마는 것이다.

쉬이 일반화하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범주(範疇)라는 말의 어의가 보여주듯 개념에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지시하기보다는 뭉뚱그리는 게 편하다. 일상에서 그런 게으름이 용납되는 까닭은 예측 가능성이 공동체에 주는 이점 때문이 아닐까? 어떤 판단을 선취(先取)하는 데 있어 선입견은 분명 유용하다. 아님 말고 아니겠는가?

그건 애매모호한 무지의 상태를 견디기 어려운 우리의 본성과 사물을 연좌로 다스리는 편의의 힘을 잘 보여준다. 충분히 배웠다는 사람도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데, 이는 빈대를 일일이 잡기 어려우니 초가삼간을 통째로 태우듯 타자를 다루려는 심산이다. 마음에도 경제가 작동하는 셈이다.

그런데 개인이란 본래 주관이라는 바늘구멍을 처음부터 벗어날 수 없는 여건에 있다. 애초에 내가 생존하는 동안 다른 이의 시점으로 단 1초라도 살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그러니 서로에게 자기 객관화를 권면하는 게 교만이나 자기기만은 아닐지 의문이다. 이는 관용어의 남발이 아닐까? 아니면 자신이 속한 울타리가 좀 더 보편적이라고 시위하려는 변호의 화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권면이 자신에게 할 땐 검열이 된다. 물론 줄곧 말했듯 과도함을 경계하는 것이다. 공정한 해석 없이 자신을 함부로 평가하길 더욱 조심하고 싶어서다.

자기본위를 철저히 지켰던 소로우도 일찍이 자신에 대해 평가하는 일을 주의하라고 말해주었다. 남이 내게 하는 평가는 ‘나약한 폭군’에 불과하며, 오직 자기에 대해 자신이 내리는 평가야말로 삶의 의미와 방향을 결정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공정하다고 자부할수록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박한 이들도 여럿 본다. 게다가 언제든 내 안에 도래하는 타인의 시선이 그 평가를 더욱 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는 자기 검열의 목적이 본래 순전히 선(善)이나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짓엔 분명 손익계산서가 딸려있다. 천국 문을 지키는 베드로와의 멋진 거래를 꿈꾸는 것이랄까?

그게 잘못됐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닌지 되물어보자는 것이다. 우린 이미 타인이 절실한 존재로 태어났다. 그래서 원래라면 서로의 거리를 적당히 벌리는 게 나았음에도 오히려 밀착해 살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고려할 게 너무 많아졌다. 사람들이 자기 평가의 기준을 점점 외주화 한다. 따르고 신경 쓸 전범(典範)이 너무 여럿인데, 어떤 기준들은 심지어 서로 양립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타인을 뭉뚱그릴 때와는 달리 사람들 사이의 협곡이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모두가 서로 안 맞는 부분을 끼워 맞추느라 마모되고 있다.

이 협곡의 깊이를 응시하는 내 눈에 비친 어둠, 외로움은 그 심연의 감정이다. 위태롭고 불안하며 허전하고 두렵다. 그것의 깊이는 아마 제각각이라 모두가 다른 언어로 외로움을 말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외롭다는 표현에 아무 공감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더러는 누가 봐도 고립된 상태임에도 그런 표현조차 없다.

난 감정, 특히 심리적 고통을 함부로 비교하곤 했다. 그저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 가장 고생했다고 호소하는 짓을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버릇 삼은 것이다. 그러다가 간혹 누구는 더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의 여정이 조금 덜 고생스러운 것처럼 보이며 스스로 행복에 겨운 줄도 모르는 놈인가 하며 뜨끔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생각에서마저도 조금 멀어졌다. 그것이 비견될 수 있다는 착각이야말로 주관성의 엄중함이란 생각에서다. 신의 형벌을 받은 듯 그 좁은 시야를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마저 망각해 버린 기분이다.

그렇지만 주관성의 엄중함을 알기에 더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내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어느 정도 미지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으니 남의 입장을 헤아리는 상상에 감행한다는 자체가 무지에 고개 숙이는 일이다. 제아무리 뻔해 보이는 타자의 속내도 실은 내 인식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니다. 상상한 바가 타자의 마음과 일치하는 건 우연에 불과하다. 이를 뒤집어 나 자신에게도 적용해 본다. 자기 고독의 깊이와 그 상흔에 대해 나 자신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게 ‘객관화’될 수 있는 것일까?

직접 물어보진 못했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이라면 외로움을 종족 보존이나 자기 보존을 위한 본성으로 규정할지도 잘 모르겠다. 분명 외로움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정확히는 사람마다 그 감정에 응하는 방식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에겐 산들바람처럼 자신이 살아있음을 뜻할 뿐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파멸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 내 가족이나 이웃, 친구나 동료들의 그것과 과연 같을까? 어쩌면 모두는 혼자일 때 외로움을 말하면서도 다른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같다고 말한다면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

내가 모두의 외로움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는 까닭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내리는 판단마다 미세하게라도 다르기 때문이다.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나와 다른 몸의 역사로, 다른 자리에서 세상을 직면하고 있다. 다 같은 사람이라는 동종성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달리 보고 있을 것이다. 당장에 ‘내 곁에 누군가가 있다’라고 말할 때조차 발화 주체와 그 상황, 서 있는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인지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타자의 인접성이 달리 판정될 수 있는 까닭에 통신매체와 인터넷의 발달이 우리들 사이를 멀게 했다는 말이 그 반론만큼이나 참이다.

나이와 경험까지 개입되면 외로움은 더욱 애매모호해지고 만다. 노인의 외로움은 아이의 그것과 같을까? 내 경험의 협소한 시야에서도 과거에 외롭다고 느낀 순간의 질감과 심상이 현재와 달라 보인다. 단지 무뎌졌다기보다는 내용이 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고독과 그것이 주는 쓸쓸함 사이에 제법 거리감이 생기면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고 아주 진정성 있게 일상을 꾸려나간다는 의미가 내 고독에 서리지 않을까?

그렇다고 혼자 있는 걸 예찬하는 게 아니다. 인연에 대한 집착이 진정한 관계에 도움이 되는 걸로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다만 결국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그럼에도 자신의 과업에 충실하다 보면 그것이야말로 불가결한 게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권능에 속한 것만을 바라길. 그러나 인연은 그것에 속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손님맞이처럼 책임은 크고 기쁨은 잠시이며, 언젠가 그들도 떠나가고 빈집과 같은 일상만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난 남들의 처지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지켜볼 뿐이다. 섣불리 동정하지 않은 채 열려있기로.

사람들의 속마음은 대개 묻지 않는 편이 나은 것들로 가득하리라. 어떤 일이든 복잡하고 다층적이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면 관계의 윤리도 변화를 맞는다. 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이 바뀌니 남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는 것이다. 그 간절한 울부짖음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하나의 목소리 같아도 실제로는 여럿이 한 데 어울린 것이다. 몸은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계와 타자를 예정한 채 생겨났다. 그것들은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세계와 매 순간 공명한다. 그래서 외로움은 타자를 예정한 그 기능들이 적절히 공명하지 못함으로써 겪는 효용의 부재, 즉 존재의 무의미함을 체험하는 고통이다.

물론 내 몸의 여러 기능이 항상 타인과의 특수한 관계를 예정하진 않는다. 내 감수성은 바깥으로 열려서 상쾌한 공기와 따스한 햇빛, 한 잔 커피나 훌륭한 글귀를 위해서도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관계에 국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칸트의 유산 중 하나는 그의 이성 비판을 통해 현상하는 세계를 세계 자체에서 구분해 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체험이란 결국 내가 어떻게 세계에 대하여 작동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타인은 인간인 우리 육신의 기능이 감응할 세계로 도래한다. 기능이 나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바로 실존적 위기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내 외로움은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한 경고신호였던 셈이다. 말라죽어가는 일부가 전부를 향하여 보내는 신호지만 우리가 욕구나 욕망이라 대충 부르는 것보다는 복잡하다.

모든 개체는 고유하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단일한 범주에서도 이렇게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왜 다를까? 그것도 어쩜 이리 오밀조밀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다른가? 각자의 자리가 다르니 보이는 세계도 다르게 그려진다. 이론과 편견은 보이는 차이를 메우려 끊임없이 유사성이나 동질성에 주목하지만, 오직 고유성만이 모두에게 동등히 부여된 자격이다.

바야흐로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작금에 누군가는 국가나 민족, 언어와 같은 문화적 유사성의 실존적 기저를 끌어올려 모두에게 배급함으로써 그것을 미봉하려 한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모두에겐 같음보다 다름이 훨씬 직관적이다. 그래서 갈등이란 오히려 똑같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짓 때문으로 보인다. 이편에만 당연한 것을 저편에 애써 주장하는 동안 결국 사이만 나빠지는 것이다. 그러한 동일성에 대한 독선적 예단은 타인에 대한 도전이 되고 만다. 그러니 우리가 디딘 이 세계의 구조로부터 난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진다. 이 세상을 어울려 채우는 방식은 다 제각각이라고. 사람들 사이에 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절대적이고, 그 협곡은 유사성으로 메워질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정상상태 때문에 갈등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고 미봉하려다 갈등한다.

우리가 모두 다 같은 인간의 범주이긴 해도 그 땅은 다시 잘게 구획되어 한 개체에 이른다. 그 고유성은 침훼(侵毁)되지 못하여 그 자신은 타자의 그것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어떤 개체든 시간적·공간적으로 완전히 고유한 점유권을 행사하고 있고 그 상태는 상대화되지 않는다. 모든 이는 필연이다.

그 필연성은 다시금 그것을 연역해 낸 전체에 속하는 관계를 함축하므로 고유성의 이면엔 전체성이 등을 맞대고 있다. 그러니 기능은 세계에 대하여 예정된 것이다. 세상에 실제로 밀접하게 감응하고 나아가 성형하는 실존적 관계다.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은 그저 우리의 성격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이 우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 좌표를 알려주는 표지다. 한편으로 이 개성이 번뇌와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우리의 본질이다. 그래서 만일 나의 일부분이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작동함에도 내 기능이 작동될 여지가 없어지면 기능을 상실한 것과 거의 동일한 정도의 위기로 여겨질 것이다. 이는 실존적 위기를 연역한다. 그 위기감이 외로움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외로움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소멸의 감각이니까. 신체의 기능이 한 종류라도 사람마다 그것을 체험하는 양상이 모두 다른 것은 어떤 판단이나 해석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마다 ‘혼자라는 느낌’이 무엇인지가 같지 않다. 이는 그 주체가 현실적으로 혼자인지를 넘어선 문제라 여겨진다.

현대엔 외로움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현대인이 함께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는 이유가 이런 사정과 관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좁아진 세상에서 주변에 내게 맞는 조각이 없다는 느낌. 바야흐로 복잡해진 세계에 몸은 더 많은 것을 예정했지만, 그에 감응할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생기는 위기감, 그리고 불안감. 그것이 현대인의 외로움이다.

내가 세계에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느낌, 그 포괄적 체험은 기능의 층위와 판단의 층위로 구분된다. 이 중 판단의 층위에서 홀로 된 상황에 대해 의의를 판별하지 못할 때 실존적 무의미성인 외로움만 남는다. 그러나 의미를 창출하기 위한 홀로 됨은 일상에 다른 해석을 낳아 고독을 기껍게 여기도록 만든다. 즉 내 몸과 마음을 다해 임하는 어떤 작업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실존을 미래로 내던지며 의미를 해석하고 만드는 과정으로 고립될 때, 세계는 오히려 나에 대하여 일체를 이루며 고독을 승화시킨다.

나는 나로 찌그러져 있다. 그리고 연루된 무수한 요소들과 공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성이 자율성은 아니다. 나는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에 제사 지내는 사제에 가깝다. 그들이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애쓰듯 나도 그것을 해석하려 매일 머리를 싸매는 것이다. 그 일에 정답은 없다. 순전히 각자의 과업인 셈이다. 그래서 ‘개성이 강하다’는 표현이 굉장히 어색하게 들린다. 고유성에는 정도가 없지 않을까? 우리의 키나 몸무게를 재는 게 아니라면 내면의 깊이를 재면서 더 다르고 덜 다르다는 말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가 믿는 유사성은 인지적 편의가 아닐까?

물론 이를 사회적 혹은 규범적 언어 관습으로 봐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규범이나 관습은 삶의 형식을 일반화하는 기술(技術)로써 타자에게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는 믿음의 언어로 쓰인다. 다만 이러한 사회·규범적 기술이 실제로는 진정한 갈등의 씨앗일 수도 있다. 사회적 전형에 자신이 얼마나 합치되는지를 검열하게 만듦으로써 실존에서 유리(遊離)되는 ‘존재 탈락’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우리의 외로움을 강화하는 요소다. 그 누구에게도 일치하지 않는 표준, 모두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그 이데아가 되려 수범자의 내면에서 자신과 세계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건 전형적인 자기혐오의 도식이다. 자신이 그 전형으로부터 멀다고 느끼는 사람은 멀쩡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보며 더 큰 소외감을 느낄 터이고, 그로부터 자신의 가치가 열등하다는 판단으로 나아가기 쉬워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외로운 싸움이다. 자기 자신과 씨름하느라 주변을 느긋하게 돌아볼 여력도 없어져 고립과 기능의 무력감에 시달리며 완전히 고갈되어 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타자는 자기혐오를 도리어 분노로 바꾸어놓는다.

우리의 흔한 환상 중 하나는 나와 같은, 혹은 잘 맞는 타인이 지상 어딘가에 존재하리라는 것일지 모른다. 확실히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는 일은 엄존하는 차이를 애써 등지려는 시도와 같다. 함께 하는 동안 차이로 생기는 문제에 매번 대응하거나 미봉할 결심이 서야 하기 때문이다. 잘하든 못하든 사회인이면 누구나 하는 일이다. 다만 결국 개성을 무시하기 위한 고행의 일종으로, 본래 남이 아닌 자기의 구원을 위한 것일 뿐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혼자되게 하지 않는 것이라지만 그것도 경우라는 게 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더라도 외로움은 그것과 양립할 수 있다. 그 둘이 모순관계는 아니며, 오히려 사랑은 고독에 대한 우리의 역량을 시험할 것이다. 내가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관한.

그래서 사랑의 과업이 되레 고독한 여정일지 모른다. 어쩌면 평범한 삶에서 우리를 잡아 뜯는 힘이다. 이웃들에 대해, 세계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사랑하는 일에 대한 숙제가 고독을 요구한다. 그러나 당장 거창하게 생각하진 말자. 그런 문제를 생각해 봤든 아니든 세계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아무런 거리가 없으므로, 늦든 빠르든 밀린 방학 숙제를 하듯 자기 방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시리게 푸른 궁륭에 점점이 새하얀 조각구름이 뜬 추수철, 다 자란 벼들이 콤바인에 빨려 들어가며 풋내를 풍긴다. 고향 마을 전체가 베어진 풀 냄새로 가득해진다. 어째서 그곳에 가면 내일이 그리 막막하진 않은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지나친 광대함이 날 외롭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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