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15 의거의 기념 풍경
부정선거에 항거한 역사를 기념하는 일은 그 용기에 감사하고 그 희생을 위령하는 것이다. 더하여 스스로 돌아보게끔 하는 것이다. 추념과 교훈이 함께 해야 한다. 물론 허식이나 강요는 곤란하다.
1960년 부정선거를 규탄한 3·15 의거의 기념 자리는 옛 마산 시가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남원 땅이다.
어수선한 도로 사이 작은 삼각지에 자리하였다. 오목한 삼각 형태의 평면에서 12m 높이로 화강석재를 견실히 쌓았다. 입면 자체는 단순하게 사각형이지만, 은근히 이루어진 곡면이 의미심장하다. “아니다!”라며 거부하는 손바닥 같기도 하고, 거친 풍파를 거르는 채 같기도 하다. 혹시 맞서는 되울림의 방어벽인가. 지나는 운전자에게는 그저 조금 여유를 주는 랜드마크일지도.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등신대보다 조금 큰 성인 남자와 남녀 학생 동상은 항의하며 나아가는 자세이다. 성인은 좌우 학생보다 뒤에 섰다. 의거의 대표적 군중 상징이다.
탑신 아래에 끼워진 청동 부조는 그때 상황을 웅변한다. 절규하고 저항한다.
3·15 의거 기념탑의 형상은 단순하고 겸손하다. 그리고 함축적이다. 얼핏 보이는 탑 끝 곡선이 푸른 하늘빛에 대비하여 드높아지듯 아름답다. 그러기에 문뜩 담담해진다.
드넓고 완만한 비탈면에 조성된 묘지 중앙에 민주의 문이 우뚝 섰다. “열린 두 개의 문은… 그날의 뜨거운 정신인 정의와 민주를 나타내는 조형물”이다.
높이 17m, 엇각의 큰 문틀이 기하학적 구성을 이루었다. 90°로 열린 두 문이 꺾어져 있으니, 정의와 민주가 별개가 아니고 하나로 통한다. 전후도 아니다. 이 문을 지나야 한다. 거리낌이 없어야 가능하다. 그런 통과의례는 절실한 시대 아닌가. 민주의 문은 당당하다. 당당해야 맞다.
이 문의 큰 묘미는 양면성이다. 참배단을 향하는 전면에서 보면 화강석의 문이지만, 통과한 뒤 남측 시가지를 향해서 보면 반사되는 금속판의 문이다. 저세상과 현실 경계이다. 그런데 현실을 쳐다봐도 저세상이 되비친다. 함께 있다는 것인지. 저쪽에서는 문은 장애는커녕 경계도 못 되는 듯하다.
민주의 문 바로 아래 정의의 상은 어깨동무하고 막 문을 나서는 형국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첫 문을 연 기세. 무겁고도 담대하다. 만일 이 시대 우리가 부족하거나 헷갈리는 판국이면, 언제든 문을 열고 다가올 태세 아닌가. 그런 부끄러워질 상황은 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두툼한 책 6권에 10편의 시를 새기어 펼쳤다. 세운 책은 그 형태가 율동감을 갖추었다. 마치 악보 보는 듯하다. 흥미로운 점 또 하나는 여백이 남아있어 앞으로 더 수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 채우기를 바라며 남겨진 여지. 그러나 더 채울 일이 없기를 바라야 하지 않을까.
바로 앞에 짓밟힌 듯 구두 자국이 처절한 교과서와 학생모가 뒹구는 듯하다.
열사의 묘지 앞, 텅 빈 광장은 스산하다. 그 가운데 열사 상이 호젓하다. 황동 빛이 어색할 정도이다. 그런데 의외로 표정은 담담하다. 광한루 주차장 입구의 녹지 속 흉상도 마찬가지다. 참혹한 사진에 물든 탓인가. 이렇게 곱고 차분한 모습인데. 바른 눈빛이 더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여기에서 조형성 운운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의거 발원지인 옛 민주당 마산시 당부가 있던 건물 앞 인도 한가운데 바닥에 표지 동판과 안내물이 있다. 부정선거를 소리치는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건물 뒷면에 관련 조형물이 뒤섞여 채우고 있다. 마치 의거의 상황판 같다. 정의의 상 축소판도 있다. 비록 어수선하나 더 공감이 간다. 유흥가 골목길의 이 발원지 조형파사드는 바깥 세상의 형식을 비웃는 듯하다.
조형물은 안내하듯 친절히 당시 최루탄과 상황을 보여준다. 작은 불꽃 형상 원판에 박힌 폭탄은 너무 다듬어져서 마치 장난감 같고 또 장식품 같다.
우연이지만, 멀리 입구 쪽 김주열 열사 벽화의 모습과 겹쳐지니. 이럴 수가!
2021년 3월 초 다시 찾은 인양 지는 기념행사를 대비하는 듯 정비공사 중이다. 새로 노천 무대도 만들고 포장도 바꾸고 있다. 벽은 사라지고 열사의 얼굴 벽 하나만 남았다. 이 또한 곧 사라지는가?
앞바다는 시리도록 퍼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