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대 Mar 08. 2021

또 하나의 학생 의거

1960년 3·8 민주의거의 기념 풍경

솔직히 잘 몰랐던 사건이다. 1960년 최초 학생의거로 대구의 2·28 민주운동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대전의 3·8 민주의거가 있었다. 2019년에 지정되었으니 비교적 최근에야 인정된 학생의거다.     


3·8 민주의거는 1960년 3월 8일과 10일 사이에 대전의 몇 고등학교 학생들이 독재정권에 항거한 학생운동이다. 자료에 의하면, 그때 대전고 1, 2학년 학생 1천여 명이 대전 시내에서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 또 ‘학원에서의 선거운동을 배격한다 ‘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다는 것이다. 2·28에서 3·15와 4·19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2006년 대전 시가지에 이를 위한 기념탑이 우뚝 섰다.

 3·8 민주의거 기념탑

3·8 민주의거 기념탑은 장방형 평지의 공원 중심에 있다. 

여기에서는 기념탑이 광장이나 공원의 중심부 넓은 공간에 자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럴 경우 그만큼 시선도 끌고 위상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셈이다. 당연히 크고 높아야 제 역할을 한다. 또 앞뒤 구분 없이 사방으로 열려야 한다.


공원 녹지 속에 주탑과 몇 구성물로써 장소를 이루었다. 높이가 25m나 되는 탑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북측 변만은 수직이다. 마치 원점을 찍은 컴퍼스 같기도 하고, 솟아오른 봉화대 같기도 하다. 작은 차이 같지만, 효과적인 기법이다. 수직성이 강조되니 더욱 희게 빛난다. 탑신 아랫부분에 새겨진 크지 않은 부조는 항거하는 학생들 모습이다. 형태가 절제되어있다. 반 구상으로 새겼으니 상상력을 자극한다. 꼭대기에는 불꽃 상이 버티고 있다. 탑 주변에 사방으로 펼쳐진 계단은 오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내려오기 위한 듯하다.

 

그런데 지름이 거의 2.4m가 넘는 석구, 즉 큰 돌덩이가 작은 제단 위에 올려져 있다. 전체 균형을 잡는다. 대전시 당국을 통해 들으니, 구는 “자유와 민주의 큰 열매”를 의미한다고 한다. 수직체인 탑보다 더 무게감을 준다. 3·8 민주의거는 그 자체가 하나의 결실로 볼 수도 있고 혹은 3·8 민주의거 덕분에 이제 결실을 보게 되었다고 이해할만하다. 아니 아직도 포란 중인지.


결실이라는 의미 자체가 구체적인 형태로 보이게끔 한 방식이 흥미롭다. 대중의 이해를 얻기 위함인지. 누구든 궁금해할 테니까 말이다.


탑과 구가 하나의 큰 그림으로 구성된 효과가 크다. 이곳에서 기하학적 구성, 수직, 사각, 원 등의 원형들의 구성으로 큰 공간체를 이루고 있다. 과연 이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3·8 민주의거의 가치에 얼마나 접근하는지.

3·8 민주의거 기념탑의 하단부 서측 부분

전면의 작은 알림 비문에서 “… 자랑스러운 이 정신을 길이 선양하고 전승하기 위한 간절한 뜻을 여기 고귀한 생명의 돌 하나에 새긴다.” 바로 이 돌인가? 


헌시: 증언의 얼굴

… 검은 장막을 뚫고

저 눈부신 하늘 향해

증언의 얼굴로 탑이 서다


그렇다. 3·8 민주의거 기념탑은 당시를 알리는 기회이다


이제 당시 참여하였던 고교의 기념지 두 곳을 돌아보자.


대전고는 유래가 깊다. 개교 100년이 넘었다 한다. 교내 잔디화단에 몇 비·탑이 모여있다. 역사를 보여주는 작은 기념 전시장 같다. 그중 돋보이는 형상이 있다. 현정 탑이다. 1962년에 건립되었다.

대전고의 현정 탑

현정(顯正)은 올바른 법리를 나타내어 보인다는 뜻이다. 탑은 3·8 의거와 4·19 의거의 대전고 동문들의 정의를 갈구하였던 의거와 희생을 되새기고 있다. 탑 형태가 독특하다. 크지 않은데도 나름 힘을 보여준다. 기개를 펼치는 자세인지 큰 삼각 형상을 갖춘 콘크리트 조형물 위에 탑명을 새긴 작은 비석을 올렸다. 학생 3인의 모습도 보인다. 시간의 흔적도 나타난다.


전면 비문, 대고의  얼:

"내일을 向()해 힘차게 일어선

우리는 永遠(영원)한 횃불

여기 大稜(대능)에 치솟는 喊聲(함성)은

슬기로 뭉쳐 義(의)를 세운 證言(증언)

빛나는 눈이어라. 勇氣(용기)이어라.

大高(대고)는 無限(무한)한 祖國(조국)의 보람 "   


바로 옆에 3·8 의거 기념비가 섰다. 높이 2m 정도의 자연석이다. 평범하다. 흥미로운 점은 작은 돌 하나를 보탰다. 선배 돌이 후배 돌과 함께 한 듯 보이기도 하고, 열매 같기도 하다.  


비문의 일부:

"1960년 3월 8일 순정한 정의의 함성이

침묵하던 시대와 강산을 흔들어 깨워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그날의 용기를 되새겨

항상 깨어 있어라."

대전고 3·8 민주의거 기념비, 우송고 3·10 민주의거 기념비

한편 당시 대전상업고등학교의 후신인 우석고의 3·10 민주의거 기념비는 높이 3m나 되는 돌로 세웠다. 전면 아래에 작게 새긴 “선배 존경 후배 사랑” 문구가 재치 있다.


후면에 새긴 건립 문의 일부:

 "새벽을 밟고 등교하여 달빛을 등에 지고 하교하면서 靑苑(청원) 배움의 전당에서 우리는 勉學(면학)에 힘썼다. … 그날 청원의 불꽃을 잊을 수 없어 졸업 60주년에 여기 기념비를 세운다." 

솔직하다. 인체 형상처럼 돌은 바로 서있다. 꿋꿋하다.


그런데 왜 명칭이 "3·10" 인지? 의거 일이 그러한 탓이다. 공식적인 명칭이 3·8 민주의거인데.... 부득이한가. 기념비·탑부터 3월 8일과 3월 10일로 나뉘어 있다. 물리적인 것이 더 신중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한번 만들면 바꾸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내다 보면 자꾸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굳이 비교하면, 다른 의거보다 3·8 민주의거는 사건의 규모가 적은 편인데, 이마저 둘로 나뉜 꼴이니 그 영향력이 분산될까 염려스럽다. 짐작하건대 당사자들로서는 그만큼 의의가 명확해서 부득이한지 모른다. 나름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문제도 있으니 미묘하다. 더 큰 문제는 바깥에서 보는 시각이다. 


3·8 민주의거 기념탑의 탑신 양면의 부조가 대응적이다. 그저 양방향일 뿐이지만, 얼핏 8일과 10일의 두 거사로 나뉜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의거는 하나로 시작해서 하나로 승화해야 하지 않을까.

3·8 민주의거 기념탑의 양면


관련 기념지(건립 순)

1. 현정 탑: 1962년 5월 건립,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로 110 대전고등학교, 글: 김영덕, 지헌영, 글씨: 정진칠, 설계: 김철호

2. 3·8 민주의거 기념탑: 2006년 7월 건립,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 956, 3.8 의거 둔지미공원, 헌시: 김용재, 글씨: 정태희, 조각: 박병희, 시공: 경기 석재, 태종 미술 주조

3. 3·8 민주 기념비: 2013년 3월 8일 건립,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로 110 대전고등학교, 글: 김정남, 글씨: 정태희 비석

4. 3·10 민주의거 기념비: 2020년 3월 10일 건립, 대전광역시 동구 동대전로 131번 길 53 우송고등학교, 글: 박헌오, 글씨: 송승헌 


작가의 이전글 대표적인 기념탑 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