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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대 Mar 07. 2021

대표적인 기념탑 둘

1919년 3·1 운동의 기념 풍경 Ⅱ

최초 “아담한 3·1 운동 순국 기념탑”이 제암리에 건립된 이후, 3.1 의거와 관련하여 곳곳에 수많은 기념시설이 조성되었다. 그중에 우리나라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서대문 독립공원의 3·1 독립선언 기념탑과 서울 남산의 3·1 독립운동기념탑을 들 수 있다.


제암리 것이 순국 영령을 추념한 데 비하여, 그보다 4년 후인 1963년 탑골공원에 건립된 3.1 독립선언 기념탑은 3.1 운동 전체를 기념한 것이다. 그런데, 1990년 철거되고 만다. 공원정비사업 명분이다만, 아무리 정비한다 해도 이렇게 중요한 탑을 걷어치웠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명확하지 않다.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992년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겨우 옮겼으니, 큰 고초를 겪은 셈이다.


3·1 독립선언 기념탑

기념시설로서 그 형식을 제대로 갖추었다.

3.1 독립선언 기념탑

그런데 제대로 된 기념지의 형식은 위치, 접근성, 공간의 위계, 구심점, 성역화, 기림의 주제 연출 등이 적절해야 한다.


즉 먼저 남향으로 평지 또는 완만한 경사지 지형에 자리 잡는다. 접근로에서 큰 축을 이루어 시선을 집중시키고 나아가게 만드는 방향성을 강조한다. 그 정점에 동상이나 탑 같은 주된 기념물을 중심으로 세우고, 그 배경이 되는 조형 벽을 세워서 주변을 에워싸는 공간 구성 형식이다.


3·1 독립선언 기념탑도 이렇듯 크고 작은 기념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가운데 넓은 공간을 중심으로 독립문과 큰 축을 이루어 마주 보는 형식이다. 두 요소가 함께 하니 의미를 더한 기념성을 갖춘 셈이다. 큰 기념 풍경을 이루었다. 다만 진·출입의 구분이 약하니, 공간의 위계 즉 일상적인 공간에서 점차 상징적인 기념공간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아쉽다. 그렇긴 해도 달리 보면 친근하다고 할 수 있다.

3·1 독립선언 기념탑 동상

동상 군은 높이가 4.2m 정도이니 큰 부담감을 주지 않는다. 기단 그 자체부터 단정하다. 짙은 빛의 여러 인물 동상은 당시 상황과 그 속사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표정과 몸짓에 비장함이 엿보인다. 비통한 울분을 삭이며 만세를 외치는 것일까. 안타까움도 찾아볼 수 있다. 상투적인 열광이 아니다. 절박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기에 진정성에 다가간다. 


동상이 몇 명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그게 묘미다. 더 많은 듯 상상력을 자극한다. 기단 뒤로 서성이며 올려다보면 애석함까지 더해진다.



3·1 독립선언 기념탑의 독립선언문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

뒤 조형 벽에 독립선언문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을 새긴 긴 오석판이 돋보인다. 마치 병풍처럼 지그재그 각지게 꺾인 뒷벽에서부터 돌출하여서 그 존재감을 더해준다. 테두리 무늬를 새기어 전통성도 더한다. 

그 좌우 끝의 두 부조는 그 면적이 크지 않고 형상이 원만하고 단정하다. 좌우에 각각 행동하는 군중과 아이 중심의 가족을 새겼다. 부담을 주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균형과 주종의 구성 형식을 갖추었다. 고루하지도 않다.      

3·1 독립선언 기념탑의 부조 좌·우

이 탑이 갖춘 기념공간의 구성 형식을 계기로 한국의 기념탑 형식을 제대로 정립하였다고 생각한다. 무려 58년 전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후 기념탑 형식이 제대로 전개되었는지.



3·1 독립운동기념탑

남산의 언저리 숲을 배경으로 북향으로 자리 잡았다. 1999년 3·1절 80주년을 맞아 제막하였으니 큰 노력을 기울인 기념물이다.      


언덕을 오르게 되니, 현실에서 벗어나 중요한 곳으로 다가가는 접근성은 확보한 셈이다. 그런데 한낮이다 보니 역광에 눈부시다. 덕분에 기념탑을 더 드높고 권위 있게 보이는 효과도 있긴 하다. 우러러보는 것은 기념에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태도의 하나 아닌가.      


3·1 독립운동기념탑 역시 크고 작은 기념 형식을 제대로 취하고 있다. 초점이 되는 주탑, 스토리를 새긴 조형벽, 기림 공간 등을 갖추었다. 특히 자연경관 속에서 기념 풍경의 효과가 더 크다.


큼직한 기단부에 독립선언문을 새긴 오석판을 끼웠는데 그 원문에 더하여 한글판과 영문판까지 보탰다. 뒷면에는 건립취지문도 같이 새겼다. 마치 기초를 다지고 그 위로 탑이 오르는 방식이다.

3·1 독립운동 기념탑

탑신은 곡선으로 된 벽체 기둥이 세 갈래가 되어 하나로 만나는데, 3의 숫자에 의미를 주고 있다. 즉 천·지·인 그리고 3개 종교인 천도교, 불교, 기독교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 상륜부 즉, 탑 꼭대기에는 우주를 나타내는 삼태극을 원구로 만들었다. 그 위에 동서남북 네 갈래 방위를 표현하였다고 한다. “우주로 힘차게 비상하는 민족 웅비의 상”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념탑의 높이는 19m 19㎝로서 1919년을 의미한다고 한다.


부조 군상을 새긴 조형 벽은 약 3m 높이에 길이는 22m가 넘는다. 좌우를 좌대 형식으로 더 높여서 환조 군상을 올렸다. 좌측 환조는 “민족 수난과 투쟁”, 우측 환조는 “평화와 민족 영광”의 상을 각각 설치하였다.     

3·1 독립운동기념탑의 좌우 환조

기념탑 전체의 형식에서 과거의 사건에 매이지만 않고, 더하여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의도를 알 수 있다. 이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고 형상화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제작 의도를 금방 알아챌 수 없다. 특히 사건 연도에서 온 19.19가 과연 이 탑의 높이를 합리화시킬 수 있을지?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수를 활용하는 기법은 흔하다. 다만 모든 형태는 나름대로 조형 완성을 위한 알맞은 크기가 존재한다고 본다. 물론 사건과 관련한 수의 의미를 드높이기 위해, 기왕이면 창작의 실마리로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칫 자기 합리화의 함정에 빠질 우려도 없지 않다.   


이곳 부조는 거대한 서사시 한편을 보는 듯하다. 국난 극복의 영웅전인 셈이다. 수많은 인물이 입체적으로 표현된 종교화 느낌을 준다. 그리고 탑 꼭대기의 원구는 그 삼태극 탓에 마치 축구공 같은 느낌이 든다면 나의 우매한 반응일지?     


3·1 독립운동 기념탑의 항거 상황 부조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민족 수난과 투쟁의 상 환조, 우측에는 평화와 민족 영광의 상 환조

3·1 독립운동기념탑의 기념 풍경은 좀 과하다는 느낌을 준다. 많이 가르치려 하고, 많이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미가 많다 보니 너무 풍부하고도 화려해진다. 시대가 그러했던가.      


이런 느낌이 과연 3·1 의거의 진수인가 싶다. 자칫 교훈적 기념 풍경이 될 뿐이다.     


두 기념탑을 비교해보았다. 한 곳은 탑이라기보다 형식을 갖춘 조형물에 가깝고, 다른 곳은 많은 의미를 부여한 탑이다. 명칭은 겨우 "선언"과 "운동"이 다를 뿐이다. 어떠하든 중요한 점은 3·1 정신을 제대로 되새기고 기릴 수 있는 기념 풍경인가 하는 점이다.


3·1 독립운동 기념탑 상륜부

관련 기념지(건립 순)

1. 3·1 독립선언 기념탑: 1963년 8월 15일 탑골공원 건립, 1990년 철거, 1992년 8월 15일 이전 건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서대문 독립공원, 조각: 김종영

2.  3·1 독립운동 기념탑: 199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제50주년 착공, 1999년 3월 1일 3.1 독립운동 80주년 기념일에 건립,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 산 14-82, 조각: 김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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