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49
‘수학(數學)’이란 ‘수량이나 공간의 구조와 성질, 변화, 논리 등의 원리를 숫자와 기호를 통해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數(셈 수)는 뜻을 나타내는 攴(칠 복)과 소리를 나타내는 婁(끌 루)가 합쳐진 한자로 ‘셈’, ‘수(數)’ 등을 뜻한다. ‘삭’으로 읽으면 ‘자주’를, ‘촉’으로 읽으면 ‘촘촘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學(배울 학)은 爻(점괘 효)와 그 양옆에 臼(절구 구), 그 밑에 冖(민갓머리)와 子(아들 자)로 구성된 한자로 방에서 아이가 교재(爻-자는 산가지 따위)를 가지고 학습하는 모습으로, 원래는 ‘학당’, ‘서당’ 따위의 장소를 뜻하였으나, ‘배우다’, ‘공부하다’,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일반적인 과학이 대상을 관찰한 결과로 이론을 집대성한 학문이라면, 수학은 인간의 두뇌로부터 사고하여 만들어진 추상적인 이론들을 ‘수(數)’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이다.
수(數)의 역사는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자가 없던 시절이라 정확한 기록물은 없지만, 숫자 대신 그림(짐승, 물고기, 별자리 등)을 통한 추상적 수 개념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동굴 벽화나 유물 등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다.
수학은 생각하고 풀이와 증명이란 실행이 복합된 과정으로 생각하는 힘의 근원이며, 수(數)는 강력하고 매혹적인 생각의 도구다. 원리와 마찬가지로 수도 자연이 합리적인 패턴으로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수가 없이는 우리의 정상적인 사고도 언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배움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 생활하다 보면 수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깨닫기 힘들다. 어렴풋이 산수의 셈만 정확하게 해도 불편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를 통해 사고하고 대화하며 매 순간 온통 수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단지 공기가 그렇듯이 느끼지 못할 뿐이다. 예컨대 수는 오늘이 언제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해가 언제 뜨고 언제 지는지, 날씨가 어떨지를 알려준다. 수는 병원에서 의사들이 질병을 찾아내거나 치료하게 하고, 건축가들이 빌딩을 짓게 하며, 컴퓨터, 자동차, 비행기, TV, 핸드폰을 만드는 것을 도와준다. 어디 그뿐인가. 통신, 검색, 쇼핑과 같은 우리의 일상적 경제활동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부터 우주를 여행하고 화성과 목성으로 탐사선을 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모두 수와 수학이다.
그러니 만일 인류가 수라는 생각의 도구를 개발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인문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학문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극히 제한되었을 것이며, 현대 문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수는 문명을 떠받쳐 온 하나의 거대한 기둥이다. “수학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도구보다도 더 강력한 지적 도구”라는 데카르트의 말이다.
수학의 개발로 인해 인간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수로 표현되어 논리적으로 기록할 수 있게끔 정리되었으며, 이는 자연과 사회 현상에 대한 복잡하고 정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하여 인류 문명의 체계적인 발전을 촉진하였다. 현대 과학자들은 수학을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경제학 · 공학 · 의학 등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을 풀어나가기 위한 핵심적인 도구로 사용한다. 수학은 이공 계열 및 경제학, 의학 등 과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라고 볼 수 있다. 수학은 철학과 함께, 응용의 범위가 모든 것이라고 할 만큼 가장 큰 학문 중 하나이다.
수학은 그 자체가 확립된 하나의 학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다른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데 필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각종 정의나 원리, 법칙 등을 서술하는 언어로 사용한다. 특히 자연과학이나 공학에서 다루는 각종 원리나 법칙들은 일상 언어를 가지고는 설명하고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상들을 엄밀하게 정의된 수식을 이용해 간단하고 쉽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다.
수학이란 자연의 원리 또는 신의 진리를 발견해내는 도구이고,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우리가 발명해낸 도구이기도 하다. 수학은 어느 정도는 자연의 본성이고. 어느 정도는 인간의 본성일 수 있다. 수학 가운데 일부는 발견되기도 하고 일부는 발명되기도 한다는 말이며, 자연의 본성이자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수와 수학은 만물의 궁극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수학을 숫자나 계산만 다루는 학문(算數)이라고 오해하거나 일상생활과 자연에 대한 수학의 놀라운 효용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377 등으로 앞의 두 수를 합해서 이루어지는 피보나치수열 이야기다. 그런데 이 숫자가 세상의 모든 꽃의 꽃잎 수가 3, 5, 8, 13, 21, 34, 53, 89 등과 같은 피보나치 수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리스, 아네모네의 꽃잎은 3개다. 미나리아재비, 들장미, 패랭이꽃은 5개이고, 코스모스, 참재비 고깔은 8개, 금잔화, 시네리아는 13개, 애스터, 치커리, 해바라기는 21개, 제층국 몇몇 데이지는 34개, 갓개미취, 국화과 식물들은 일반적으로 55개나 89개의 꽃잎을 갖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소나무, 전나무 등의 솔방울에 나선형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나선의 개수가 5개이거나 8개, 또는 13개로 피보나치 수다. 해바라기의 머리에 들어 있는 씨앗들은 자라날수록 다양한 나선형 패턴들이 나타나는데 그 나선들의 개수 역시 피보나치 수를 따른다. 다중 잎사귀를 갖고 있거나 나선형을 이루는 식물들 가운데 92% 정도가 피보나치 수를 따른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달팽이와 앵무조개의 껍데기에 나타난 나선 모양이 피보나치 수가 만들어내는 황금 나선이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코스모스 꽃잎이 8장인 것은 알겠는데, 지금 당장 밖에 나가 다른 꽃잎을 세어 확인해보고 싶어지지 않는가?
수학을 이야기하면서 수학 과목을 포기한 이들을 일컫는 단어인 ‘수포자’를 빼놓을 수 없다. 주로 학창 시절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성인도 학창 시절부터 수학을 포기하거나 그 뒤로도 쭉 수학 포기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학창 시절부터 수포자가 많이 생기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첫 번째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고등학교 문과와 이과의 계열을 분리하는 교육제도이다. 문과는 당연히 수포자가 가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고, 이과 학생 중에도 절반은 수포자라는 얘기도 있다. 국가에서 수포자를 줄이기 위해 교과 내용을 대폭 삭감하고 수능 범위를 줄였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 변별력 있게 출제하려다 보니 오히려 수능 수학은 더 어려워지면서 수포자는 더욱 늘어나는 역효과를 야기하고 있다. 수포자가 생기는 두 번째 이유는 공부 방법에서 오는 수학 과목의 특성이다. 수학은 다른 과목과는 배우는 과정에서 큰 차이가 존재한다. 다른 과목은 초등이나 중학교에서 실력이 부족했어도 고등학교 때 공부를 통해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하지만, 수학은 초등이나 중학교 때 한 번 따라가지 못하면 중간에 절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과목이다. 한마디로 단계도 많고 그 많은 단계를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알고 있어야 상위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과목이다. 정확히는 다른 과목에 비해 단계가 워낙 많고, 배울 때마다 전에 배웠던 것을 다시 설명해줄 틈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과목에 비해 학업 난이도가 상당히 어려운 편이다. 전(前) 과정이 기억이 안 나면 전 과정의 책들을 다시 펼치는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중간에 뛰어들어 순위를 제칠 수 있는 과목이 아니다 보니, 학년이 높아질수록 수포자는 계속 쌓일 수밖에 없다. 여러 이유로 수없이 양산되는 수포자~! 인생 포기자는 되지 않기를~!
자연의 수량화를 통해 근대인들이 얻은 것은 자연을 물리적 탐구의 대상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수량화는 우리에게 정밀하고 확실한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만일 이 같은 수량화가 없었더라면 현대 문명 전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처럼 수량화의 이면도 존재한다. 자연의 수량화를 통해 우리가 잃은 것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이자 ‘정복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오늘날 개발과 자연 파괴로 문제가 되는 온갖 비극적 사건의 실마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로 계량된 자연은 양적 대상일 뿐 더 이상 아름답고 신성한 대상이 아니고, 수로 계량하는 인간은 자신의 탐욕을 양적으로 실현하는 존재일 뿐 더 이상 검소하고 신중하며, 타인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배려, 생명과 자연보호 등을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깨어지고 함께 병들어가고 있다. 수량화와 인간의 탐욕이 결합한 결과이다.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하는 것은 수를 통한 자연의 정복이 아니라 수에 의한 자연과의 조화가 우선이다.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인 수학적 알고리즘도 인간보다 공정하며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한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부, 기업, 사회에 도입된 데이터 기반의 수학적 알고리즘 모형들은 사법, 교육, 노동, 보험 등, 사회 곳곳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인종차별, 빈부격차, 지역 차별 등 인간의 편견과 차별, 오만을 수량화해 불평등을 확대하고 심지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도 손에 쥐고 있는 폰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곳이 어딘지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싹하지 않은가?
수학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물리적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최고의 도구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학 덕분에 존재하게 된 위대한 문명 속에서 살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인류의 위대한 수학이 인간 욕망의 수량화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연과 사회 그리고 예술을 탐구하는 도구로 활용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