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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석연 Jul 18. 2023

101. ‘선악(善惡)’의 의미

삶은 의미다  - 101

‘선악(善惡)’선과 악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종교, 윤리학, 철학, 심리학에서 ‘선과 악(善惡)’은 매우 일반적인 이분법이다. 善(착할 선)은 羊(양 양)과 言(말씀 언)이 합쳐진 한자로, 처음에는 羊 밑에 言 두 개가 있는 모양(譱)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로 줄어든 형태(善)로 ‘착하다’, ‘좋다’ 등을 뜻한다. 惡(악할 악, 미워할 오)는 뜻을 나타내는 心(마음 심)과 소리를 나타내는 亞(버금 아)가 합쳐진 한자로 ‘악(惡)하다’, ‘나쁘다’, ‘미워하다’를 뜻한다.

먼저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금단의 열매 선악과에 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 에덴에 있는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미리 경고한다. 그러나 아담은 에덴의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와와 함께 선악과를 따 먹는다. 하느님은 명을 어긴 둘에 대한 분노와, 이대로라면 생명의 열매까지 먹어 죄인인 채로 영생할 수 있겠다는 우려로 인해 두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다. 이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선악을 알게 되고, 더 이상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노동과 출산의 고통이 주어지는 등 고생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선악과의 정체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지만, 정작 성경 원문에는 어떠한 과일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가톨릭을 포함하는 서방 교회에서는 사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 등에서 사과를 신성한 과일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배척한 가톨릭에서 사과를 악의 근원이 되는 선악과로 폄훼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또한 유대인의 고향 팔레스타인 지역의 가장 흔한 과일이었던 무화과라는 견해도 있다. 특히 무화과는 전통적으로 성욕의 상징이기도 하고,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가린 것이 무화과 잎이라는 점에서 유대교에서는 무화과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가장 유력했던 가설은 포도이다. 에녹서에서 “나무 모양은 캐롬 나무와 비슷한데 열매는 포도와 비슷하다”라고 묘사했고, 벼룩 묵시록 4장 8절에서도 역시 선악과를 포도로 해석했다. 이는 포도와 포도주를 동일시하고, 사람을 지혜롭게도 하지만, 반대로 죄를 범하게도 하는 술의 속성을 빗댄 것으로 보인다. 다른 과일이라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실제 신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이 여호와를 배신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물로만 생각할 뿐, 실존하는 특정 나무의 열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아니면 성장하면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가 등의 고민을 하게 된다. 딱히 어떤 것이 맞는다고 결론지을 수 없을 만큼 그 논의는 분분하고, 또한 세상을 살펴봐도 전쟁, 범죄 등의 수많은 악행이 있는가 하면 그에 못지않게 희생과 봉사 등의 선행도 넘쳐난다. 악한 사람, 선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현실이기에 어느 한쪽으로 단언하기에는 어렵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시각을 크게 세 가지다.

인간의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주장하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본성은 악하다고 주장하는 순자의 ‘성악설(性惡說)’, 둘 다 아닌 인간은 백지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 상태라고 주장하는 고자의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이 있다.

성선설에 대해 일반인들의 가장 큰 오해는 인간은 선한 존재 그 자체라 생각이다. 하지만 맹자는 인간을 선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품은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일반인들은 단편적으로 “선하니까 계속 선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맹자는 “사람은 원래 선한데 환경이 그를 악하게 만든다.”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나 세상이 이기적이고 악하지 않으면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을 악하게 만들므로 사회나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교육제도와 법률제도로 본래 악한 사람을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 차이가 있다. 결국 성악설이든 성선설이든 지금 돌아가는 세상이 정상이 아님을 인정하면서, 그 악의 근원이 개인 내면에 있으면 성악설, 악의 근원이 돌아가는 세상 그 자체에 있으면 성선설로 나뉜 것이다. 본래 인간이 선하고 세상이 악하면 성선설, 인간이 악하고 세상이 선하면 성악설이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루소는 성선설에, 홉스는 성악설에 가까운 이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종교에 따라 초기 기독교는 원죄론으로 성악설에 가깝고, 후기 기독교에서 원죄론을 부정하고 인간은 타락하여 간다는 것을 보면 성선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교는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나 깨끗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성선설에 가깝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관점의 성악설(性惡說)에 대한 일반인의 오해도 성선설의 오해와 비슷하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라고 믿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악하다가 아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라는 말이 맞는다. 악으로 기울지 않기 위해 올바르고 질서 있으며 공평하게 다듬어진 규범으로 자신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다. 즉 법과 규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장한 것이 성악설이다.

현재까지 성악설을 지지하는 중요한 근거 중에 하나로, 인간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인간에 비해 더 많은 권리와 부를 누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인간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재화와 재물이 많아지는 등 환경이 좋게 변하더라도 항상 소수의 사람이 그 결과를 누렸으며, 그 반대가 존재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기에 인간의 본성이 절대로 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규범과 법이 없는 공간에서 인간의 본성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실적인 많은 증거들을 보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할만한 점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성악설을 거들고 있다. 좀 그럴듯하게 성악설에 설득되지 않는가. 성선설에서 본성이 선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대가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행하는 선행을 예로 드는 것에 비해, 성악설에서는 다양한 인간의 부조리함을 예로 든다. 하지만 성악설도 근본적으로 교화를 통해 개선이 가능하다는 견해인 것은 다행이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성무선악설이든 현대의 과학적 이론으로 보면 모두 한때 자신들의 학문적, 종교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주장했던 것에 불과하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부모의 유전자를 갖고 세상에 나온다. 아버지 유전자 반, 어머니 유전자 반을 받은 DNA 정보는 버릴 수 없다. 당연히 백지상태가 아닌 부모의 성향에 따라 그 집안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성향이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선과 악의 개념은 사회성 동물에게만 있으며, 관계나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을 악하다고만 할 수 있는가? 사람이 소와 돼지를 잡아 고기로 먹는 것을 악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을 포함해 모든 동물은 자기의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이 최대의 생존 목표다. 그러나 대부분 동물의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행위들, 즉, 유전자를 번식시키는 행위들은 생존의 본질이지만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도 생존하기 위해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고, 그 모습은 대부분 이기적이다. 이렇게 생멸(生滅)의 수준에서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행동들을 선과 악의 개념으로만 파악해 선하냐 악하냐를 얘기하는 것을 무리가 있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남을 밀어내고 내 것을 챙기는 것이 최고의 성공전략이지만, 계속 그런 행동을 하게 되면 다수로부터 배척당하여 결국엔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적당히 남을 도와 가면서 내 이득을 챙기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 되고, 안전하게 내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이 대체로 유리할 것 같지만, 가끔은 나한테 손해가 되더라도 남을 돕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아가더라는 사실을 학습하게 된다. 이것이 이기적이다가도 이타적으로 되는 이유다.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쟁이 수없이 긴 세월 동안 이어오고 있지만 아직도 결론에 이르지 못했고,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선악의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한 일과 악한 일이 있을 때,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는 나쁘고 악한 일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세상에 착하고 좋은 일이 악하고 나쁜 일보다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개판이고 요지경 세상으로 보이는 것이리라. 어찌 되었든 많은 악조건 속에서도 살만한 세상으로 발전하고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보면,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떤 경향이 있느냐보다 어떻게 변해가고 있느냐에 초점을 두는 것이 객관성이 있고 미래지향적이다.


‘타고난 천성은 바꾸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도 누굴 닮겠는가. 부모 닮지 않으면 큰일 나는 세상에 부모를 닮아야지. 하지만 한 부모 아래서 태어난 자식도 다 다른 것을 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유일한 존재가 맞다. 그 유일한 존재를 선하냐 악하냐의 이분법으로 나눈다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나만의 본성으로 태어나 유일하게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여 험한 세상에 선한 존재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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