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07
‘노출(露出)’은 ‘보거나 알 수 있도록 드러나거나 드러냄’,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 부닥치는 것’이란 뜻이다. 露(이슬 로)는 뜻을 나타내는 雨(비 우)와 소리를 나타내는 路(길 로)가 합쳐진 한자로 명사로는 ‘이슬’, 동사로는 ‘드러나다’, ‘드러내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소주의 대명사로 알려진 ‘참이슬’이 ‘진로(眞露)’를 한글로 풀어서 쓴 것을 술꾼들은 알고 마시는가. ‘뼈까지 드러낼 만큼 깊은 속내를 드러낼 정도’의 뜻인 ‘노골적(露骨的’과 ‘노출(露出)’이란 말이 ‘로(露)’가 ‘드러내다’의 의미로 사용된 대표적 예다. 出(날 출)은 山(메 산)을 위아래로 합친 듯한 모양이지만 山과는 관계가 없다. 발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인 止(그칠 지)와 U자 모양으로 꺾인 도형으로 이루어져, ‘어느 지점에서 발을 내딛어 나간다.’에서 ‘나가다’, ‘나오다’라는 의미이다. ‘入(들 입)’과 함께 쓰여 ‘출입(出入)’이나 ‘입출(入出)’이 쓰이는데, 사람이나 사물 등이 드나들 때는 出이 앞에 오고, 금액이나 자료 등이 드나들 때는 出이 뒤에 온다.
노출은 신체 부위를 의복 따위로 가리지 않고 일부, 또는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로 더 많이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노출도라는 개념으로 맨살을 드러내는 정도를 나타내지만 수치화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고 의미가 없다. 드러내는 정도보다 어느 부위를 노출하느냐가 더 눈길을 사로잡는 요인이 된다. 일반적으로 동양에서는 하의실종 같은 다리 노출에 관대하고 어깨 노출을 꺼리지만, 서양에서는 어깨, 가슴골 노출에 관대하고 다리 노출을 더 선정적인 차림으로 본다.
노출을 부르는 가장 큰 요인은 날씨다. 사계절 중 여름이 노출의 계절이고, 겨울도 온난화로 인하여 그리 춥지 않으니 맨살을 드러내는 노출 패션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얇은 옷 입는 기간이 길어지고 더 시원한 옷차림과 노출이 일상화됐다. 아무래도 일상에서의 노출은 여름에 자주 볼 수 있고, 노출의 가장 큰 목적은 더위를 피하기 위함이다. 더위를 피하기 위한 노출이 아니더라도 필요 이상의 심한 노출이나 추운 겨울에 노출하는 심리는 무엇인가? 성적 어필과 자기만족을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적 어필과 자기만족이 따로 인 것이 아니라 둘 다인 경우가 많다. 열심히 가꾼 몸매를 노출함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으며, 노출 패션을 소화할 수 있는 자기의 모습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노출 패션을 적절히 잘 소화할 줄 알면 큰 매력이 될 수 있다. 또한 진화론적으로 보면 성적 어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그 자체가 최대의 자기만족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단련된 몸을 드러내 상대를 기죽이거나 자랑하고 싶어서 노출하는 경우도 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극도로 화가 난 상태나 흥분한 상태를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로 옷을 벗는 일도 있다. 싸움을 시작하려면 가장 먼저 옷을 벗어 던지는 것(영화에서 많이 본 모습), 경찰서에 붙잡혀 와 옷을 벗어 던지는 사람, 가수의 공연에 흥분하여 옷을 벗어 던지는 사람 등이 있기도 하다. 그래도 겉옷까지는 봐줄 만한 데, 속옷까지 훌러덩 벗어 던지는 모습을 꼴불견이 아닌가.
몸을 보호한다는 옷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도 몸의 노출 원인 중 하나다. 과거엔 옷이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대통령이 입는 옷이나 내가 입는 옷이 별 차이가 없다. 옛날에는 가난하면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고, 부와 신분을 과시하려면 좋은 옷을 입었다. 귀족들은 옷을 입고 또 입었다. 그러나 지금은 브랜드가 부를 상징한다. 어떤 상표의 옷을 입었느냐가 중요하지만, 그것도 시들해졌다. 자동차, 핸드백 등의 부를 상징할 다른 물건이 많아졌다.
일반인의 노출에 가장 큰 영향은 대중매체와 문화일 것이다. 맨 처음 걸그룹이 뜨게 된 연유가 선정적 노출 패션과 춤이 한몫했다면 과한 이야기일까. 요즘 K팝 걸그룹의 공연이나 방송을 보면 최소한만 가린 패션으로 춤추고 노래한다. 영화는 또 어떤가. 노출 장면이 없으면 관객이 없다. 오죽하면 노출 장면을 찍기 위해 몸에 자국 없이 매끈하도록 며칠 전부터 속옷을 입지 않고 생활하고, 노출 신을 하지 않으면 뜨지 못한다는 말까지 있다. 소설이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창작물은 또 어떤가. 노출은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특급 요소로 쓰인다. 온 세상이 벗기 위해 경쟁하는 것 같다. 벗겨도 너무 벗긴다는 생각이 안 드는가. 방송이 벗기고, 영화가 벗기고, 연극이 벗기고, 쇼도 벗기고, 광고가 벗기고, 만화가 벗기고, 심지어 책도 벗긴다. 벗겨야 장사가 되니 그러는 것이겠지만, 벗기는 저들인 문제인가. 벗기지 않으면 흥미를 못 느끼는 우리가 문제인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노출 패션의 원인을 ‘주목에 대한 열망’에서 찾는 학자도 있다. 수많은 경쟁자 가운데 주목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비교적 과감한 옷차림의 유행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현대사회가 ‘주목 사회’라는 점이 깔려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눈총받고 감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오늘날에서 오히려 남들이 주목해주지 않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하의실종을 비롯한 노출 패션이 유행하는 것은 남들의 눈길을 끌고,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한 여러 방법의 하나라는 것이다.
노출은 많은 사람이 결국 사회가 강요하는 미적 기준에 따라가는 현상이며, 유행에 대응하지 못하면 부정적인 낙인을 피하려고 더 노출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게 된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가장 빠르게 상품사회로 진입하면서 전통적 가치가 빠르게 붕괴한 면이 있다. 노출 문화가 선택된 원인은 몸 자체가 교환이 가능한 개인의 ‘자원’ 개념으로 변질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방증이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을 불러온다는 것이 부정적 측면이다.
‘노출 효과(露出效果)’는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로버트 자이언스(Robert Zajonc)가 정립한 이론으로, ‘특정 대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인 감정을 품거나 혹은 싫더라도 계속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지면 그 대상에 대한 호감도, 친근감이 상승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래서 친숙성의 원리라고도 한다. 파리의 에펠탑이 처음 건립될 당시에는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20년 후에 철거하기로 약속하고 건립했지만, 건립 후 자주 보게 되니 호감을 느끼게 되어 20년 후에 철거하려 하니 이제는 파리의 명물을 해체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어 철거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처음에는 관심도 없거나 혹은 싫어하던 대상도 계속해서 마주치면 나중에는 친근해져서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을 ‘에펠탑 효과(Eiffle Tower Effect)’라고도 한다.
가장 큰 노출 효과는 반복으로 인한 익숙함의 증가다. 우리는 더 익숙한 것에 대해서 더 긍정적 태고를 가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노출 효과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곳이 마케팅, 광고, 공부의 반복 학습 등이다. 오래 자주 본 사람이 편하고, 자주 등장하는 광고에 친숙해지고 긍정적으로 변해 결국 그 상품을 구매하게 되는 이유다. 학창 시절 공부 잘하는 비법 중의 하나인 복습이 반복적인 노출 경험으로 학습에 대한 태도나 선호도가 긍정적으로 변화되고 익숙해지므로 기억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 학습하게 됨으로써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의 반복 학습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의해 가장 많이 잊어버리는 시기에 맞추어 3번 복습을 해라. 잊어버리기 시작하는 쉬는 시간에 한 번, 배운 것의 반 이상을 잊어버리는 다음날에 한 번, 그리고 1주일 후에 한 번, 이렇게 세 번만 복습하면 공부한 내용을 잘 기억할 수 있어, 누구나 공부 잘 할 수 있다고 강조한 말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학습에서 복습한다는 것은 자주 노출한다는 의미와 같다.
노출은 자기 몸 자체를 과시하는 효과도 있다.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오랜 기간 어렵게 몸을 만들지 않아도 성형수술을 통하여 날씬한 몸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다. 풍만한 가슴은 기본이고 보형물은 넣은 애플힙, 지방흡입술로 날씬한 팔과 다리를 만든다. 심지어 팔․다리 근육을 뜯어내는 일도 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만든 몸매를 옷 속에 숨겨놓기는 아깝지 않겠는가. 몸매를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 부자가 성형외과에서 몸을 만든다면, 돈이 없으면 피트니스센터에서 땀 흘리면 가능한 일이다. 조금 불평등하지만, 결과는 같지 않은가.
사회적 노출이든 육체의 노출이든 많이 친숙해진 노출 사회가 되었다. 광고 노출에 현혹되어 패가망신하지 말고, 이성의 노출에 유혹당하여 대한민국을 살리고 번창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