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14
‘신(神)’이란 ‘종교의 대상으로 초인간적, 초자연적 위력을 가지고 인간에게 화와 복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존재’를 뜻한다. 인간보다 우월한 전지전능한 존재이며 세상의 창조와 소멸에 관여하고 불멸의 존재이다. 神(귀신 신)은 원래 번개의 상형자인 申(납 신)이었다. 고대 사람들은 번개를 두려워하며 초월적인 존재와 연관시켜 ‘신령’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 위에 뜻을 보충하기 위해 제단을 본뜬 示(보일 시)를 더한 형태로 ‘귀신(鬼神)’, ‘영혼’, ‘신(神)’을 뜻한다.
인류의 탄생과 함께했을 ‘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전지전능하여 모든 생명체를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존재, 초자연적인 힘을 바탕으로 신격화한 자연인, 딱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 존재, 인간의 모습으로 행동하는 인격화한 존재 등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신자(信者)와 무신자(無信者)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신과 종교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증거는 세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구촌의 수많은 관광지가 종교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고, 영혼에 대한 믿음, 조상 숭배, 신전과 사원 건설 등으로 수십만 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신의 모양은 사람을 닮았거나 사람에 친숙한 형상을 한다. 종교적으로는 사람이 신의 사랑을 받아 신의 형체와 비슷한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역으로 설명한다. 한편 인간이 신을 닮은 건 영혼이며 신에게는 육체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형체를 닮았다고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전지전능하고 영적인 존재인 유일신이나 천사 등에 대해 외모를 거론하지 않고 성별도 없다고 여긴다. 외형이 뚜렷한 신 중 사람의 형상은 미남 미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권위와 힘을 나타내기 위해 사나운 동물의 머리나 신체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신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나아가 인간이 알지 못하는 미래 등을 알고 있다. 종교가 탄생하고 신을 창조한 목적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니 인간보다 초월적인 힘을 갖고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은 당연한 것이다. 나아가 매우 강력한 신은 세상 전체를 만들어 내는 천지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었던 자연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을 등장시켰고, 신의 섭리로 이해했다. 또한, 신은 ‘완전하다’라는 함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기도할 때 ‘전지전능하신~’으로 이어지는 것만 봐도 완전함의 대상에게 올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완전함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을 최초에 창조한 신이 있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운동 및 창조 등의 최초 원인 뒤에는 신이 있다는 논리다. 최초의 원인을 일으키는 원동자는 신밖에 없다.
원시 종교인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에서 나타난 동물이나 괴물 형태의 다양한 신을 양산하여 다신론적 성향이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서로 다른 신을 믿는 종교 집단의 이합집산을 통하여 신의 강약이 분류되고 결국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으로 나뉘는 이신론(二神論)이 등장했으며 힘이 없는 신들은 점점 사라졌다. 그 결과 야훼를 믿는 유대교 같은 유일신 사상이 생겨났다. 더욱 고도화된 일신교 신앙은 예수의 그리스도교, 무함마드의 이슬람교 창설로 이어져 오늘까지 이른다. 일신교 신앙의 고도화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이러한 유일신 사상에서 특이한 점은 악(惡)의 개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선에서 악으로 가는 타락, 또는 선의 결핍을 인정하지만 ‘순수 악’은 없다는 것이다. 선한 유일신은 악을 창조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하여튼 모든 행위와 선택은 좋은 것이고, 좋음을 목표로 하고 추구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있으니, 방향은 극히 바르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어느 신이든 복을 비는 기복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유일신 개념이 희박하고 신의 수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가미(神)’인데 그 숫자가 팔백만이라 한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매우 많다는 것이며, 지금도 가미의 수효는 계속 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물에는 그것과 상관있는 가미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범신론이다.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는 본인은 ‘신’이라 칭하지 않았지만, 사후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신격화되어 ‘부처’라는 신을 모시는 종교적 성격을 갖췄다.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명 충돌은 본질상 종교 충돌이다. 종교 충돌은 ‘신들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적지 않는 전쟁도 신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있다. 인간이 신을 위해 죽는다. 대체 이렇게 인간이 종속되어 있는 신은 무엇이고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인 믿음의 고민이라면 괜찮겠지만, 사회적 국가적으로 표출하는 신에 대한 질문에는 전쟁과 평화가, 국제 분쟁의 요소가 숨어 있다.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많다. 같은 편과 다른 편을 가르는 잣대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 질문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완벽히 답할 수 있는 신앙체계는 아직 없으므로 질문 자체가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은 현실에서 오직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이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러나 현생 뒤의 내세, 사후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좀 더 윤리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이 인간의 삶을 실천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평화와 번영케 한다면 신이 있든 없든 종교의 기능은 위대한 것이다. 다만 종교는 신의 믿음으로 형성되는 문화체계, 신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문화체계이기에 나만의 신을 믿는다.
각종 자연물, 인물로 초자연적 존재의 형태를 만들거나, 또는 그것을 상징하는 형태로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우상숭배(偶像崇拜)’ 하는데, 현대에 와서는 ‘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내가 믿지 않는 신, 내가 믿는 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도 우상숭배다.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내가 믿는 신이 문명의 파괴보다는 건설, 전쟁과 폭력보다는 평화와 번영의 신을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인가.
‘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답을 찾기보다 믿음 속에 인류 평화와 번영의 전지전능한 신이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