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17
‘본질(本質)’의 기본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가지고 있는 원래 성질’ 또는 ‘사물과 현상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최초의 실재(實在)’이다. 좀 더 철학적 의미로는 ‘한 사물이나 과정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보편적이고 변함없는 요소들의 총체’라 표현한다. 本(근본/밑 본)은 木(나무 목)의 아랫부분에 一을 그어, 나무의 뿌리를 나타내는 한자로 ‘근본’을 뜻한다. 質(바탕 질)은 斤(도끼 근) 2개와 貝(조개 패)로 이루어진 한자로 본래 뜻은 ‘저당잡다’이다. 인질(人質)에 그 뜻이 남아있고 ‘소질’, ‘바탕’, ‘묻다[問]’, ‘질박(質樸)하다’의 뜻이 있다. ‘본성(本性)’이라는 말은 ‘사람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성질’을 나타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은 무엇인가?’가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질문이라 했다. 본질은 사물의 실체, 즉 사물의 종(從)에 속하는 공통성이 개개 사물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그 사물의 존재를 구성한다. 철학적으로 본질은 유(類)와 종(種)의 차이에 따라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질은 ‘인간성’이며 그것은 ‘이성적 동물’이란 뜻이다. 사물에서는 이들이 구별되고 각각은 사물 고유의 본질을 가지며, 여기에 ‘존재’의 작용이 부여되어 현실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본질과 존재의 구별은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원천 중 하나이며 쉽지 않다.
실존주의(實存主義)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라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말이다. 실존주의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선택에 대한 불안감은 있지만 그 선택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싹튼 본질주의(Essentialism)는 이 세상의 모든 개체가 그 개체로 구분되기 위한, 즉, 그 개체로 불릴 수 있게 하는 특정한 속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본질주의는 세상을 단순한 공식으로 축소하는 결정론적 경향이 있어 상대주의적 유연성과 융통성이 부족하다. 일단 ‘이게 본질이다.’라는 판단이 서면 고집스럽게 그걸 고수하려고 든다. 물론 본질주의의 좋은 점도 있다. 본질이 있는 것에서 본질을 찾아내 집중하면 막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주제의 본질에 집중하는 건 꼭 필요하거니와 바람직하지만, 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론이든 동전의 양면이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그것들의 존재를 믿는다. 사실 현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본질에 대한 관념에는 변함이 없어야 옳다. 그러나 인간은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데도 보이는 것만 믿는다. 우리 주변에는 마땅히 그러해야 할 본질이 왜곡되고, 즉 사물의 현상이 가진 원래의 의미와 속성, 형태가 상실되고 퇴색된 것들이 모든 사회 분야에서 부지기수다. 가만히 지켜보면 본질을 잊은 채 행해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교육은 어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올바른 인간을 기르고 있는가. 아니다. 입시에 맞는 시험 인간, 취업에 맞는 회사 인간을 만들고 있다. 정치는 어떤가? 국민의 뜻을 받들고, 국민을 위하고 있는가. 아니다. 국민의 뜻을 빙자한 자기들만의 운동장에서 너무 잘 놀고 있다. 종교는 어떤가? 인간을 긍휼히 여기고 구원하고 있는가. 아니다. 나만의 기복 종교로 천국행이 목적이고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갈등을 일으켜 폭력과 전쟁을 일삼고 있다. 사랑은 어떤가? 주는 사랑만으로 기쁘고 행복해하는가? 아니다. 더 받지 못해 아쉬워하고 안달하며 불화의 원인이 된다. 결혼은 어떤가? 둘이 함께 하고픈 사랑만으로 결혼하는가? 아니다. 수많은 조건이 만족하는지로 거래하는 결혼을 한다. 사랑을 포장한 장삿속이다. 더 열거해서 무엇하리. 참으로 열거하기조차 부끄러운 사회다. 이 모든 것이 본질과 기본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초등학교 바른생활처럼 쉽고 간단하다. 존재를 판단하기가 그리 어렵고 복잡할 이유가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본질을 몰라서 못 보고, 안 보여서 안보는 사람은 없다. 너무 쉽지만, 본질을 보려 하지 않고 벗어나니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가 없는 사회는 없다. 문제가 있으면 답을 찾아 나서야 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본질은 존재의 명확한 이유이고 벗어나지 않고 온전히 집중해야 할 중심인 것이다. 이렇게 본질을 파악하는 일은 모든 일을 시작하는 데 있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회의나 일을 하다가 본질을 벗어나는 사람을 보고, “손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느냐?”라는 달마대사의 말을 자주 한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 많으면 사공이 많은 배가 되기 십상이디.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라는 속담도 같은 뜻이다.
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손가락이나 잿밥처럼 부수적인 것에 마음이 쏠릴까? 왜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까? 왜 본질을 벗어나는 것일까? 원인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채워지지 않고 채울 수도 없는 결핍, 욕심 등 세속에 물든 마음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취하고 싶은 욕심에 마음이 쏠리면, 본질을 바라보지 못한다. 본질이 보여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욕심이다. 뉴스에 오르는 비리를 저지른 고위 공직자들을 보면,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나도 보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아니면 자신만의 거짓 정당성을 부여해 스스로 타인을 위한 것이라 포장한다. 착각하든 포장하든 욕심이 화를 자초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존경을 받아야 할 위치의 사람들이 그보다 더 큰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만다.
결핍도 욕심과 마찬가지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마음은 욕심일 수도 있지만 결핍의 마음이 크다. 옛날 제삿날 제사상 위에 놓였던 쌀밥 한 그릇을 먹고 싶어 늦은 밤 제사가 끝날 때까지 눈 비비며 기다린 경험은, 그 결핍의 시절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련한 추억이다. 지금은 꼭 없어서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많아도 결핍의 마음은 있다. 욕심과 결핍은 채워질 수 없는 것임을 수많은 성인이나 선지자들이 깨우쳐도 소용없다. 근원은 욕심이나 결핍이 본질을 보는 눈을 가리고 있으니. 이럴 때 ‘초심으로 돌아가라’라는 말한다. 초심이 무엇이겠는가. 처음의 순수한 마음, 본질에 충실한 자세 아니겠는가.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나만 돌아가려니 억울하고 슬픈 생각마저 들겠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길은 본질을 찾아가는 길뿐이다.
본질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로, 아무리 상황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아니 바뀌어서는 안 되는 속성이다.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를 품고 있어야 한다. 본질이 바뀐다는 건, 곧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요즘 여러 분야에서 본질을 강조하고 기본을 중요시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운동할 때 기초 체력을 제일 먼저 다진다. 기초 체력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술이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운동의 기본은 기초 체력이고, 기본을 차분히 다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오랜 인내의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의 노력이 구체적 성과로 돌아오지 않아 힘들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참아내는 게 쉽지 않지만, 그 어려운 걸 해내야 한다. 그래야 기본을 잘 다질 수 있고, 본질을 흩트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본질은, 근본 이유다.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을 하는 이유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공부하는 근본 이유가 있다. 좋은 대학이나 시험에 합격하는 건, 하나의 과정이지 근본 이유가 될 수 없다. 최종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걸 최종 목적지로 생각해서, 그 이후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도 있다. 어떤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하는 근본 이유가 있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닌, 내가 그 일을 하는 이유 말이다. 공익적인 기여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근본 이유가 있다. 찾지 않아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현상은 복잡하지만, 법칙은 단순하다. 단순한 법칙이 본질에 가깝다. 본질을 발견하려는 노력과 본질이 아닌 것을 과감하게 폐기하는 용기가 있어야 진흙탕 세상에 빠지지 않는다. 결국 내 삶의 본질을 내 실력으로 추구하며 가야 한다. 현상을 보고 그 본질이나 본질적인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은 아무나 쉽게 갖출 수 없는 부러운 능력이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린다. 그리고 대개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간파하는 통찰력이 지혜이다.
쉽게 말해 시간의 본질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이며, 인간관계의 본질은 소통 아닌가. 늘 변화무쌍한 현상을 보고 현혹되어 어지러워하지 말고, 변하지 않는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음을 명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