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20
‘백수(白手)’는 ‘백수건달(白手乾達)’의 줄임말로 ‘한 푼도 없는 처지에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백수(白手)’라는 말은 ‘일을 안 해서 손(手)이 하얗다(白)’라는 의미와 ‘일이 없어 손(手)에 가진 게 없다(白)’라는 뜻이기도 하다. 白(흰/아뢸 백)은 촛불의 심지가 타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촛불이 밝다는 의미에서 확장되어 ‘희다’, ‘깨끗하다’, ‘명백(明白)하다’, ‘설명하다’, ‘아뢰다’ 등의 여러 뜻이 있다. 手(손 수)는 당연히 손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 글자로 ‘손’, ‘재주’, ‘수단’, ‘사람’ 등의 뜻을 나타낸다. 백수(白手)는 맨손이라는 말로 별다른 직업이 없는 실업자(失業者)를 뜻하는 말이다. 차별 또는 비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잘 이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백수(白手)는 만 19세 이상인 성인이면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을 뜻하고, 근로 능력이 있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는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가진 재산에 따라 ‘돈 많은 백수’, ‘니트족’ 등으로 나뉜다. ‘니트족’이란 백수중에도 취업 의사가 전혀 없는 경우로, 무직 상태이면서 취업을 위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도, 혹은 그 외 학문을 공부하고 있지도 않는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한편 ‘경계선 백수’도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백수가 아니지만 사회생활 문제로 탈수급을 하지 않고 기초 생활 수급자 신분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돈이 없음과 있음의 경계에 서 있다는 뜻이다.
보통 방송에서는 실업자라는 말로 통일하여 사용되지만, 옛날부터 백수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로 한량, 건달, 기둥서방(기생집에 방을 얻어 뒤를 봐주고 놀고먹는 사람, 여기서 ‘기둥’의 뜻은 두 가지 – 독자가 헤아리시길), 룸펜(남루/초라함 -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나 실업자), 잉여 인간, 백조(여자 백수) 등이 있었던 것을 보면, 예부터 놀고먹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요즘은 좀 부드럽게 ‘취업 준비생’이라 부른다.
요즘 젊은이들의 최대 로망이 ‘오렌지족’(부모의 부를 바탕으로 서울 강남 일대에서 퇴폐적인 소비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이나 ‘건물주’다. 집안에 돈이 많거나 유산 상속을 받아 특별히 일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사는 백수다. 한마디로 ‘돈 많고 빽 좋은 백수’로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세태를 반영한 신조어들이다. 이 밖에도 취업 시장을 반영한 백수 신조어들도 많이 있다. 대표적인 말이 ‘이십 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이다. 21세기 저성장 시대에 들어서며 청년실업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생긴 말이다. 실제 ‘인문대학 졸업자의 구십 퍼센트는 논다.’라고 해서 ‘인구론’,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문송’이란 말도 생겼다. 실제 고등학생들이 문과보다 이과를 2배가량 더 많이 지원하는 ‘이과 쏠림’ 현상이 발생하고, 학생들 사이에 ‘문과 쓰레기는 답이 없다.’라는 ‘문레기 노답’이라는 말까지 유행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학생들을 문과와 이과를 분리해서 가르치는 유일하고 이상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문과와 이과를 갈라놓아 취업의 장벽 높이를 다르게 하는 결과만 낳았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학문은 인문학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문(文)은 없고 취업에 필요한 이(理)만 있는 꼴이다. 차라리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학생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 자유롭게 갈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초등학교부터 의대에 진학하기 위한 사설 특별반이 생기는 ‘의사가 만사’ 현상도 청년들이 취업 시장에서 지향하고 있는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의대 입학 정원이 대한민국 교육을 휘어잡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장미족(장기간 미취업 졸업생), 청백전(청년 백수 전성시대), 삼일절(31세까지 취업 못 하면 절망), 삼팔선(38세까지 회사에서 버티면 선방), 체온 퇴직(퇴직 연령이 36.5세), 사오정(45세에 정년퇴직), 사필귀정(40대에는 반드시 정년퇴직),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 신(新) 기러기족(직장인들이 뒤늦게 지방의 의대·약대·한의대 등으로 진학하는 경우) 등 정말 취업 백수 신조어 전성시대다. 이러한 비관 신조어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백수 문제는 결코 개인 문제가 아닌 무시할 수 없는 사회 문제다.
백수가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젊은이는 취업을 못 해서 일이 없고 나이 들면 퇴직해서 일이 없다. 먼저 청년실업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갖기가 쉽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어렵게 취직해도 3년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결정하는 비율이 50% 정도라니 청년 백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더하여 높은 생활비, 주거비 등은 청년들을 N포세대로 만드는 주요인이다. 서울의 집값은 청년들이 취업해서 30년을 벌어 모아도 사지 못할 만큼 비싸다. 비 가리고 살 곳이 없는데 결혼은 어찌하며, 하물며 아이는 어떻게 낳아 기르겠는가. 세계 최하위 출산율은 당연한 결과다.
노인 백수도 문제다.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해 자식 키우고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나니, 내 손에 남은 것이 없다. 다시 일하러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노령인구가 기초연금만으로 생활이 부족하니 취업 시장에 뛰어든다. 청년들과 경쟁할 수는 없고 저임금 질 낮은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도 여의찮다.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 속에 숨겨진 진실은 노인 빈곤이다. 사회적 보장이 부족하고,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없으니(자식도 부모를 모실 생각도 없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의 노인들이 수두룩하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들이다. 청년이나 노인 모두 백수 상태의 고립과 외로움은 고독사, 극단적 선택, 묻지 마 범죄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백수들이 가장 꺼리는 일이 대낮에 야외활동을 하는 것이다. 낮에 돌아다니면 ‘백수 인증’이라는 인식이 작용해 몸과 마음이 위축되고, 아예 바깥출입을 안 하게 된다. 사실 요즘은 회사에서 교대 근무나 유연 근무제가 많아 일정하게 근무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직종도 많다. 아침에도 근무를 마치고 나와 식당에서 회식할 수 있다. 낮에는 꼭 일없는 사람만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하긴 평일 점심때 식당에 가면 주부들이나 나이 든 사람들의 모임이 대부분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만 당당하면 그만 아닌가. 또한 백수라는 공백 시기를 기죽기보다 다음을 준비하기 위한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으면 된다. 다른 직장의 탐색과 준비, 자기 계발 등의 시간으로 활용한다면 분명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올 것이다. 주변에서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을 무시하고 무소의 뿔처럼 용감하게 내 길을 찾아가는 뚝심이 필요하다.
언젠가 생활의 달인에 몸을 최소한으로 움직이며 생활하는 백수의 달인이 등장한 적이 있다. 누워서 리모컨을 잠자리채로 가져오는 기술, 식빵을 토스터에 던져 넣은 기술, 빨래 건조대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누워 보는 기술, 잠자기 전 휴지를 던져 전등 스위치를 끄는 기술 등 이건 백수이기 이전에 생활의 소소한 일을 예술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미래에 진정한 백수의 달인이 될 자격을 갖춘 청춘 맞다.
진짜 이도 저도 못 하는 백수로 지내는 청춘들은 욕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백수 예찬론자이다. 40년이란 세월을 일했으니 더 일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모든 짐 내려놓고 나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다. 가끔 여럿이 모이는 장소에 가서 인사를 할 때도 ‘백수로 너무 잘살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식구들은 싫어한다. 왜 ‘백수’라는 단어를 쓰냐는 불만이다. 백수라는 단어에 담긴 부정적 의미 때문이리라. 난 정말 백수가 좋은데~ 다음부터는 ‘연금 생활자입니다.’라고 인사말을 바꿔볼까, 생각 중이다.
백수가 제일 좋은 점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자고 싶은 시간에 자는 것, 저녁에 잠이 오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는다. 오늘 늦게 자면 내일 늦잠 자면 된다. 잠이 안 오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니 잠이 더 잘 온다. 두 번째는 자유로운 일정 운영이다. 휴일이나 공휴일을 기다리지 않고 일정 운영을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니 너무 좋다. 365일이 휴일이다. 시골에 가서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가 온다.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는 둘이 살며 실컷 보고 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과 운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좋다. 다른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으냐고 묻지만, 백수는 돈 쓸 일도 많지 않다. 혼자 노는 데 무슨 돈이 그리 들겠는가. 다만 혼자 노는 방법(오전 도서관 출근하기)을 개발하고 건강(오후 2시간 헬스)을 챙길 수만 있다면, 한마디로 무엇을 하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백수가 난 좋다.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이라는 백수의 사전적 뜻도 멋지지만,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면서 충분히 빈둥거리며 놀고 여유롭게 먹는 건강한 자립형 주체’라는 어디선가 읽었던 매우 긍정적인 백수의 정의가 더 맘에 든다. 딱 그 정의에 맞는 백수가 되고 싶은 것이다. 가끔 ‘이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의식주 해결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나?’라는 생각도 든다. 일을 갖고 싶어 하는 백수님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생각과 함께.
확실한 것은 앞으로 백수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인공 지능을 비롯한 기계가 발달하여 사람의 일자리를 대신하고, 사라지는 직업 못지않게 새로 생겨나는 직업이 있겠지만, 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일자리는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또한 경제도 저성장의 시대에 접어들어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일자리로 채우는 경향이 뚜렷하다. 정규직으로 입사하려면 적어도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혹시 지금의 일본처럼 저출산 시대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기업에서 일할 사람이 모자라지 않을까.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걱정이지만, 청년들이 취업하기는 쉬운 시대라도 왔으면 좋겠다.
이제 평생 직업의 개념이 사라지고 살아가면서 여러 번 직업을 바꿀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온다. 어쩔 수 없는 백수 시기를 더 밝은 미래를 준비하고, 더 역동적인 삶을 찾아가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