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37
‘공평(公平)’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고름’의 뜻으로 어떤 사안을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경우를 똑같은 비율로 다루는 것이다. 公(공평할 공)은 사사로운〔厶〕 것을 공평하게 나눈〔八〕다는 데서 ‘공평(公平)하다’, ‘공식적(公式的)이다’를 뜻한다. 平(평평할 평)은 저울 모양을 나타낸 글자로, 평평하게 균형을 맞춘다는 ‘평평하다’, ‘고르다’, ‘정리되다’ 등의 뜻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공정과 공평, 그리고 평등은 비슷한 뜻이라 생각하여 구태여 구분하여 사용하려 하지 않지만, 그 안에 포함된 뜻의 차이는 구분하지 않고 쓸 만큼 적지 않다. 공정(公正)은 공평(公平)과 평등(平等)의 개념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공정은 옳고 그름이라는 윤리적 측면에 중심을 둔 말로 공정한 보상, 공정한 판결 등과 같이 사용되고, 공평은 물질적 측면에 중심을 둔 말로 금전이나 재물 등의 공평한 분배 등과 같이 사용한다. 공정은 과정과 절차의 평등, 공평은 기회의 평등, 평등은 결과의 평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넓은 의미의 공정은 과정이 투명하고 절차가 모두에게 똑같이 하면 된다. 하지만 공평의 기회 평등은 완전하게 이루기 좀 더 어렵다. 우리들이 기회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경쟁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경쟁을 공평하게 하려면 사람마다 가진 능력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제비뽑기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공평은 가능성의 성공 확률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배분하는 것이다. 반면 공정은 능력 있는 사람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것이고, 평등은 모두에게 결과를 똑같이 배분하는 것이다. 공정이 능력의 차이를 긍정한다면 공평은 능력이나 가능성의 차이를 부정하고 결과의 차이를 긍정한다. 평등은 결과의 차이도 부정한다. 예를 들어 네 명이 사과 3개를 가지고 어떤 능력을 중심으로 경쟁하여 3명은 먹고 한 명은 못 먹는 것은 공정, 제비뽑기나 가위바위보를 실시하여 3명은 먹고 한 명은 못 먹는 것은 공평, 사과 1개를 4조각씩 12조각으로 나누어 한 사람이 3조각씩 먹거나 아무도 못 먹는 것은 평등이다. 여기서 공정과 공평의 결과는 같지만, 공정은 능력의 차이, 공평은 운의 차이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공정을 기반으로 한다면, 공산주의는 평등을 기반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공정은 능력이 뛰어난 강자들의 가치다. 반면 공평은 운에 맡기는 경향이므로 보통 사람들의 가치고, 평등은 약자들의 가치다. 부자나 정치인 등 같은 기득권이 공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강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아무도 다른 사람과 차이 나거나 부자가 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평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이유도 같다. 천운으로 복권이나 당첨되어야 부자가 될 수 있는 평범한 보통의 가치가 공평이다. 사회적으로 공정한 경쟁을 엄청나게 강조하는데, 그 속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을 보통 사람들은 알기나 하는 것일까. 공정과 공평, 평등의 뜻을 짚다 보니 좀 서글픈 생각마저 드는 것은 왜일까? 우리가 공정한 사회에서 능력이 없다면, 공평한 사회에서 운이 없다면 당신은 영원히 부자나 권력자 등의 기득권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기죽지 마라. 공정은 능력의 차이에 의한 경쟁을 통해 결과를 즐기는 것이고, 공평은 운의 차이를 통해 결과를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평등은 어떤 차이도 즐기지 못하고 모든 차이를 부정한다. 어찌 되었든 공정과 공평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는 흥하고, 평등을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는 쇠하고 있지 않은가. 공정과 공평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은 되는 셈이다. 또한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차이를 부정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이를 없앨수록 계속 새로운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 세상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즐기면서 사는 것이 지혜다.
모든 사람의 삶이 공평한 지위와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태어날 때부터 귀하고 공평하게 대접받는 삶을 산다고 볼 수 없다. 구급 헬기를 타고 이동해 최상의 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는 삶도 있지만, 구급차에서 치료 순서를 기다리다 병원 앞에서 마감하는 삶도 있다. 사람이란 타고난 재능과 계발된 능력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 능력에 따라 귀천이 분명한 직업을 선택하여 빈부의 격차를 실감하며 살아간다. 개개인이 품을 수 있는 꿈과 희망 또한 여러 조건에 의해 한계 또한 정해져 있다. 세상엔 감춰지고 불편한 진실이 수두룩한데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싫어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듯이 인간의 능력 또한 평등하고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항상 공평하지도,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같지도, 모든 사람이 내가 옳다고 믿는 말과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공평은 자연의 법칙에 가깝지, 인간 세상의 법칙은 아니다. 만인에게 주어지는 공기, 만인에게 흐르는 세월, 생명 있는 것들은 지상을 떠나야 한다는 죽음 등은 잔인하리만큼 공평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며, 많은 경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 세상과 다른 사람에게 공평에 관해 ‘이건 이래야만 해’, ‘저건 저래야만 해’라며 비현실적인 기대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분노만 느끼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으며, 자연 발생적인 불공평은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현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지혜다.
신은 인간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주었다.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이, 부모는 부모의 일이, 학생은 학생의 일이, 선생은 선생의 일이 있다. 이렇게 사회적 역할에 따라 주어지는 일이 불공평하다고 하여 불평하지 않는다. 현대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주어지는 일이 다양화되어 마땅히 해야 할 일도 더욱 증가하여 불공평이 발생하고, 이 불평등에 대한 다양한 불만이 발생하게 된다. 최근에 접하는 ‘아빠찬스’, ‘수저론’ 등이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과 무관한 불공평에 대한 대표적 용어이다. 하지만 이런 자연 발생에 가까운 불공평은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공평보다 공정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평은 자연법칙이고 공정은 인간 법칙이라 자연엔 공정이 없으며 인간은 공정할 수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불공평보다 불공정에 분노하고 참지 못한다. 공평한 분배를 주장한 공산주의가 그 많은 피를 흘렸음에도 공정을 기반으로 한 자유 민주주의에 패배했다. 자연의 공평함을 인간에게 적용한 부작용이라 분석한다면 너무 나간 것인가.
인간이 공평을 바라는 것은 비교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어도 똑같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에 가깝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비교하지 않는다면 모두 잘 살 수 있지만, 비교하는 순간 불공평해지고 불행해진다. 이렇게 인간 사회가 완벽하게 실현하기 불가능한 공평과 평등에 너무 매몰되어 있으면 이상향만 꿈꾸는 꼴이다. 실현할 수 있는 곳에 집중하여 조금씩 공평하고 평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최선이다.
공평한 공산주의보다 공정한 자유 민주주의로~!
공평한 사회보다 공정한 사회로~!
공평의 제비뽑기보다 약자를 배려하는 공정의 선별적 능력 경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