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랑켄슈타인]
영화 [프랑켄슈타인]
설민
그동안 내가 경험한 프랑켄슈타인이라는 프레임은 기괴하고 난폭한 괴물의 이미지다. 결코, 따뜻하게 다가가기 어려운 대상인데, 여기 반전의 이야기가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펼쳐진다. 괴물이라는 창조자를 만든 이의 상처도, 그렇게 태어난 피조물의 마음도 짠하게 속을 파고든다.
똑똑하지만 이기적인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기이한 실험 이후, 결국에는 창조자인 자기 자신과 그 비극적 창조물에 파멸을 초래하는 이야기. 결국, 누구에게도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 생명은 피어나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여린 새싹이 되어버린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생명을 창조하였으나, 정작 눈앞에 나타난 자신의 자식이 기대했던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추한 존재라는 사실에 깊이 절망한다. 빅터는 그 실망을 혐오로 치환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한다. 아들에게 실망한, 너무 가혹한 아버지. 아들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알아줬을까? 시체 쪼가리를 이어 다시 태어난 사실을 알고 절망한 프랑켄슈타인의 마음을 알아주기도 전에 너무 가혹하게 밀쳐내는 모습에 명치가 아팠다.
세상을 대면하며 모든 게 서툴고 신기한 어리숙한 모습에 실망하기보다 하나하나 알려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일 것이다. 부모의 기대와 욕심으로 피지도 못한 많은 꿈의 조각들이 아이의 상처로 남을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빅터 또한 그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다. 아버지의 권위와 강압에 짓눌리고 동생에게 빼앗긴 사랑에 질투하면서 자라났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창조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위안 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피와 전기로 탄생한 괴물을 공포의 아이콘이 아닌 세상에 버려진 존재이자 사랑을 갈망하는 희생자로 다시 불러냄으로써 깊은 여운을 남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음습한 공간과 무너져 내리는 인간들의 욕망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통을 학습해 가는 크리처의 시선은 묵직한 슬픔과 잔혹한 공포를 동시에 전한다.
거대한 신체와 상처투성이의 얼굴은 공포를 자아내지만, 그 안에서 흔들리는 눈빛과 서툰 몸짓, 상처 입은 동물처럼 주변을 탐색하는 호흡은 이 존재가 얼마나 순진하고 외로운 영혼인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폭력과 배신을 겪을수록 표정이 서늘하게 굳어가면서도, 끝내 누군가의 손길을 바라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괴물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슬픈 공포의 정서가 인상적이다.
괴물 취급을 당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쌓아간다. 과연 자신이 원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시신을 찾아다니고 선별하는 사람이 괴물인가, 그 손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것이 괴물인가? 존재 자체의 존엄과 책임에 대한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빅터는 아버지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 그 연쇄작용으로 알게 모르게 자신이 증오하고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에게 보였고, 그러한 성격과 감정이 무에서 시작한 투명했던 피조물 크리처에게 영향을 끼친다.
크리처는 자신을 버리려고 했던 빅터의 손에서 벗어나 노인을 만나 지식과 내면을 바라보는 법을 만났고, 엘리자베스를 보고 순수함을 배웠다. 빅터에게서 분노를 배워 가장 괴물 같았던 그의 시작, 하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며 점점 더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자신이 괴물임을 인지하고 슬퍼하는 크리처, 마지막 순간에 빅터를 용서를 택하고, 아들이라 부른 그를 아버지라 인정한 크리처. 죽지 않고 살아가기를 택하며 나아가기 위해 배를 밀어주던 크리처의 모습에서 인간미마저 느껴진다.
크리처가 물 위로 떠가는 나뭇잎을 보며 신기롭게 따라가는 어린애 같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분노보다 사랑과 관심을 더 먼저 배웠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노인을 만나 책을 읽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가면서 세상과 마주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삶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악한 인연을(크리처에게는 빅터가 그러하리라) 끊어내는 법이 용서이며, 과거에서 머물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얼음에 박힌 배를 밀어주고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