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분심, 0%의 확률을 뒤집는 한 수

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12

by 보험외길

​보험업계에는 일반인에겐 낯설지만, 누군가에겐 생명줄이 되는 마법 같은 제도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과분심'이다. 오늘은 이 생소한 제도가 어떻게 한 가정을 파산의 위기에서 구해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한 씁쓸한 인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주변을 보면 꼭 이런 사람이 있다. 평소엔 "아는 사람이 많아서 보험가입은 어렵다"며 거절하다가, 정작 큰일이 터지면 가장 먼저 전화를 거는 사람. 내 지인 최수동 씨가 딱 그랬다. 그는 수년째 단 한 건의 보험도 내게 맡기지 않으면서, 사고만 나면 내 번호를 눌렀다.


​어느 날, 휴대폰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찰나, 수화기 너머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점장님! 큰일 났습니다! 시골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다 승용차랑 정면으로 박으셨어요!"


​사건은 5일장이 서던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발생했다. 장날의 시골길은 그야말로 무법지대다. 화물차와 경운기, 손수레와 오토바이가 뒤섞여 신호 따위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70세에 가까운 최 씨의 부친은 지름길인 일방통행로로 역주행 진입을 했고, 마침 주유소에서 나오던 승용차와 정면충돌했다.


​부친은 바닥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쳤다. 평소 쓰고 다니던 안전모는 오토바이용 헬멧이 아니라 공사장에서나 쓰는 딱딱한 작업모였다. 그마저도 턱끈을 매지 않아 충격과 동시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으니, 머리엔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다.


​3개월간의 사투 끝에 부친은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슬픔도 잠시, 유가족 앞엔 4,000만 원이라는 거대한 치료비 청구서가 놓였다. 교통사고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용이 가공할 수준이다. 문제는 과실 비율이었다. 역주행 사고였기에 경찰과 보험사는 과실 비율을 100 대 0으로 판정했다.


설상가상, ​최 씨 부친의 오토바이는 책임보험만 가입된 상태라 본인의 치료비를 보상받을 '자기 신체손해' 담보가 없었다. 과실이 100%라면 상대방 보험사로부터 단 한 푼의 치료비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상대 승용차의 파손과 운전자의 부상에 대한 보험금이 책임보험 보상한도를 초과한다면 추가로 물어내야 할 처지였다.


​블랙박스도 CCTV도 없던 시절, 오토바이 보험 가입사인 소형 A사는 이미 손을 떼고 있었다. 상대 운전자의 "불가항력이었다"는 주장에 맞설 논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최수동 씨는 내게 울먹이며 매달렸다.

"지점장님, 이대로면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습니다. 제발 방법이 없겠습니까?"

​나는 고민에 빠졌다. 보험 한 건 없는 지인이지만, 부친의 사망 사건을 외면할 순 없었다.


"최 씨, 지금 당장 보험사에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과분심' 신청을 상의해 보세요."

"과분심요? 그게 뭡니까?"

​과분심은 "자동차사고 과실비율 분쟁심의위원회"의 약어로서 보상실무에서 널리 사용하는 말이다. 자동차 사고 시 과실 비율에 합의가 안 될 때, 법원 소송 전에 손해보험협회 전문가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제도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소송의 대안으로, 현장의 고수들이 판례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과실을 가려낸다.



통상 과실분쟁 시 해결하는 방법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서 판사의 판결로 해결해야 된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소송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고 이에 대한 경험도 없다. 이럴 때 손해보험협회에 과분심을 신청하면, 전문가들이 과실비율을 판단해 준다. 물론 과분심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부분의 판사들은 과분심의 결과를 존중해 판결을 낸다. 다만, 과분심은 일반인은 직접 과분심을 신청할 수 없고 손해보험회사가 대신 신청할 수 있다.


​나는 1%의 희망을 보았다. 자동차보험의 독특한 제도 중 하나는 '피해자 구제 원칙'이다. 상대방 과실이 단 1%라도 잡히면, 과실 비율과 상관없이 피해자의 치료비 전액을 상대 보험사가 지불해야 한다. 일방통행 역주행이라 하더라도, 주유소에서 도로로 진입하던 승용차 운전자가 전방 주시를 더 철저히 했다면 사고를 피할 수도 있었다는 논리를 펴야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과분심은 오토바이 과실 90%, 승용차 과실 10% 결정을 내렸다. 승용차 운전자의 해당 도로의 상황상 일방통일 도로라고 하다라도 주의운전과 양보운전 위반의 과실을 조금은 인정한 것이다. 덕분에 최 씨는 4,000만 원의 치료비 전액을 면제받았고, 추가로 1,500만 원의 보험금을 더 수령했다. 지옥 끝에서 돌아온 셈이었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최 씨는 내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평생의 은인"이라고 치켜세웠다. 나는 내심 '고생했다는 의미로 장기보험 한 건 정도는 먼저 물어보겠지'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는 보험금을 받은 뒤 다시 연락이 뜸해졌고, 고맙다는 밥 한 끼 대접조차 없었다.


​지금도 그는 2~3년에 한 번씩 내게 전화를 건다. 안부 인사가 아니라, 또 다른 사고가 터졌을 때만. "지점장님, 저 최수동입니다! 이번에 주차장에서 문콕을 당했는데..."

​그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는 '과분심'으로 구제한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이기심이었는지 헷갈리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절박한 전화를 외면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30년 보험맨의 자부심이기도 한 거니까.


여러분의 응원 한마디가 보험인생 30년의 기억을 기록하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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