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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연작 2 _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정원을 사랑한 인상주의의 대가

by Phillip Choi

이전 글 _ ‘수련 연작‘ 작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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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연꽃, 수련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수련은 천천히 꽃잎을 오므린다. 마치 세상의 소란을 피하며 깊은 잠에 드는 듯하다. 아침이 되면 다시 조용히 피어나 태양을 맞이하지만, 밤이 오면 다시 스스로를 감춘다. 그래서일터이다. 수련(睡蓮)이라는 이름에는 ‘잠자는 연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수련과 연꽃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연꽃이 물 위로 높이 솟아오르는 것과 달리, 수련은 물에 살포시 떠 있다. 잎도 다르다. 연꽃의 잎은 둥글고 매끈하며 물방울을 또르르 굴려내지만, 수련의 잎은 피자의 한 조각을 떼어낸 것처럼 살짝 잘려 있는 모양이다. 때문에 흔히 신성한 꽃으로 여겨지는 연꽃과 달리, 수련은 조금 더 친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두 꽃을 구별하는 또 하나의 차이는 열매의 운명이다. 연꽃의 연밥은 물 위에 떠다니며 씨앗을 퍼뜨리지만, 수련의 열매는 조용히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마치 모든 것을 물에 맡긴채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찾는 듯 하다.

< 수련 그림. 수련. 클로드 모네.1897~1898 >
< 연꽃 그림. 하화청연도. 김홍도. 1845~? >


수련의 낮과 밤이 다른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고대 서양에서는 수련의 이러한 리듬에서 태양과 생명의 순환을 연상하였다. 나일강이 흐르던 고대 이집트, 그리고 인도와 그리스에서 수련은 신성한 꽃으로 여겨졌고, 여성의 생명력과 창조의 힘을 상징하는 꽃으로 노래되었다(수련은 이집트의 국화(國花)이다). 반면에 동양에서 신성함의 상징이 된 것은 주로 연꽃이었다. 불교에서는 연꽃이 깨달음과 극락을 의미하며, 부처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찰의 연못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꽃도 이러한 믿음과 맞닿아 있다.

< 수련을 그린 고대 이집트 그림 >
< 완주 송광사 연꽃 풍경 >


수련은 어쩌면, 연꽃보다 더 자연에 가까운 꽃인지도 모른다. 해가 뜨면 피어나고, 해가 지면 스스로를 감추는 리듬은 인간의 삶과도 닮아 있다. 무리하게 솟아오르려 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피고 지는 꽃이자, 떠 있는 듯하면서도 깊은 물속까지 뿌리를 내리는 꽃이다. 해를 따라 변하는 찰나의 빛 경관을 따라온 클로드 모네에게 수련의 이러한 본성은 필연적 관심의 대상일것이다.

조용히 물 위를 흐르며 낮과 밤을 살아가는 수련을 보고 있으면,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모네가 그러하였듯이, 때로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러운 순환을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한 방식이겠다 싶다.



수련이 피어나는 정원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수련 정원을 꼽는다면, 단연 양평 두물머리에 위치한 세미원이다.

경기도 제1호 지방정원이기도 한 이곳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2004년부터 물을 정화하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여름과 가을이 되면 수련문화제가 열리는데, 다양한 품종의 수련과 연꽃이 한껏 만개하는 이 시기엔 정원 전체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 양평 세미원 수련 >


정원을 걷다 보면, 전 세계 연꽃 연구의 권위자였던 페리 슬로컴이 기증한 연꽃이 심어진 페리 기념 연못이 나온다. 또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백련지, 붉은 연꽃이 만발한 홍련지, 그리고 열대 지방의 수련과 호주 수련이 자리한 열대수련못까지, 다양한 수련과 연꽃이 있는 경관을 연속하여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재미있는 공간을 꼽자면 단연 빅토리아 연못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잎을 가진 빅토리아 수련이 떠 있는 이 연못에서는 어린아이가 거대한 수련잎 위에 올라타 볼 수도 있다. 커다란 녹색 잎이 작은 몸을 품고 떠 있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신비롭다.


세미원 하이라이트의 하나는 사랑의 연못이다. 수련이 떠 있는 연못, 일본식 아치형 다리 그리고 연못가의 버드나무 등, 모네의 그림에서 본 지베르니 정원을 그대로 옮겨놓은듯 하다. 한편으로는 배경의 낮은 산자락과 우리 눈에 친숙한 식물들로 구성되어 우리네 오래된 정서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해질녘, 노을이 연못 위로 내려앉을 때 이곳을 찾는다면 더욱 특별한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석양이 수면에 반사되며 번지는 붉은 빛이 수련 사이로 퍼지는 풍경은, 그 순간을 화폭으로 옮기지 못하는 나의 짧은 손이 부끄러울만큼 아름답다.

< 세미원 사랑의 연못 >


수련과 연꽃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경남 함안의 연꽃테마공원도 추천할 만하다.

이곳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한 송이의 꽃이 건네는 긴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09년, 함안 성산산성에서 고려 시대의 연꽃 씨앗이 발견되었고, 무려 700년을 기다린 그 씨앗은 2010년 다시 꽃을 피웠다. 그렇게 되살아난 ‘아라홍련’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이 공원은, 다른 곳보다 한층 더 정제된 분위기를 지닌다. 주변에 나무가 많지 않아 시야가 탁 트이고, 오롯이 연꽃에 집중할 수 있는 곳.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내고 다시 피어난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씨앗이 품고있던 오래된 이야기를 연꽃이 대신하여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다.

< 함안 연꽃 테마 파크 >



수련과 연꽃은 같은 물 위에서 피어나지만, 그 모습도,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다. 물 위를 떠다니는 듯한 수련은 마치 흐름에 몸을 맡긴 듯하고, 연꽃은 뿌리 깊이 자리 잡고 곧게 위를 향한다. 그러나 둘 다 조용히 자신의 시간에 맞춰 피어나고, 지고, 다시 새로운 계절을 기다린다.


수련이 가득한 연못에서, 수련 연작이 걸린 미술관에서, 한적한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북적이는 축제기간의 수련정원에서, 각기 다른 의미와 배경으로, 각기 다른 수련의 빛을 감상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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