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니와 알렉산더> 예술이 무슨 힘이 있다고

돈이 되니 ?

by 백연의 아카이브


예술과 사랑 . 돈도 안 되는 거 . ㅋ


나는 왜 글을 쓸까. 왜 예술을 하고 싶어 할까.
예술이 무슨 힘이 있다고. 돈도 안 되는 거.


나는 왜 매번 사랑에 빠질까. 왜 사랑을 하고 싶어 할까.
사랑이 무슨 힘이 있다고. 돈도 안 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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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보니 예술과 사랑에 닮은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돈도 안되고, 별 쓸모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계속 끌린다는 점이 꼭 닮았다. 사랑과 예술을 같은 선상에 두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지만, 예술 없이는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 사랑과 예술은, 마치 하나의 인격에서 파생된 두 개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아주 어릴 땐 사랑은, 예술은, 머나먼 별처럼 동경과 미지의 대상이었다. 사랑을 한다는 건, 예술을 한다는 건, 아주 성숙한 어른들만이 향유하는 고귀한 행위이자 닿고 싶은 세계였다. 그리고 사랑에 눈 뜰 나이가 되기 전엔, 오히려 사랑보다도 예술이 더 큰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사랑은 배워가는 중이고, 예술은 잘 모르겠다. 공통점이 있다면 사랑도, 예술도, 나를 발가벗겨 아주 솔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나의 깊은 내면을 보여주려 하듯, 글을 쓸 때만큼은 가장 솔직한 진심을 고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사랑과 예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신성한 힘'이 내면에 가장 충실하고 진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일종의 종교처럼.


동경의 대상.
삶의 원동력.
삶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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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연극배우'다 .


<화니와 알렉산더>는 감독 잉마르 베리만이 자신의 삶을 투영한 자전적 영화라고 한다. <페르소나>만큼 충격을 안겨준 작품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진심 어린 고백과 성찰이 담긴 '고해성사'처럼 느껴지는 영화였다. 감독은 '어린 소년'의 얼굴로 돌아가, 삶과 예술의 의미를 되짚는다.


잉마르 베리만에게 있어 삶과 예술은 일종의 '연극'이었던 듯하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엑달 가문은 연극을 하는 배우 집안으로, 그들의 실제 삶과 연극의 무대, 현실과 연기는 종종 혼동되며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연극의 배우라고 볼 수 있다. 마치 배우처럼, 누군가의 자식이자 연인, 부모, 학생, 상사 이런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역할들을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부여된 것도 아니고, 결코 고정적이지 않으며, 아주 부서지지 쉬운 것이기도 하다. 이런 역할극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연극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자아연출의 사회학>에서도 각 개인들이 다양한 페르소나를 연기하며 살아가는 연극의 배우들과 같다고 본다. 개인의 고정된 정체성이 없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자아를 연출하고 연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잉마르 베리만이 연극하는 배우들을 주요 인물들로 설정하고, 연극과 삶의 경계를 불투명하게 설정한 것은, 삶이 일종의 연극이고 예술이며 구분되기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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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거짓말'은 가장 깊은 '진실'을 드러낸다 .


때로 허구는 가장 깊은 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진실'과 '사실'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 '25년 12월 한 해의 첫눈이 내렸다'가 사실이라면, '그 첫눈에 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는 일종의 진실이다. '사실'이 검증가능한 객관적인 정보라면, '진실'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파악되는 주관적 통찰을 말한다.


영화를 비롯한 예술은 늘 객관적인 사실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예술의 '거짓말'은 종종 사실 속에 은폐된 '진실'을 보여준다. '사실이란 것은 얼마나 객관적인가.' 우리가 객관적 사실이라 믿는 '역사'도 실상은 승자의 기록이고, 기득권의 입장에서 쓰인 주관적 현실일 수 있다. 때론 허구의 예술이 사실보다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부여한다. <백 년의 고독>이 단편적인 역사 기록 뒤에 가려진 식민지 민중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이들이 겪은 고통과 삶의 비애를 수면 위로 드러냈던 것처럼. 그들에겐 'XX 년도에 XX당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보다, 그들이 피부로 느낀 전쟁의 상처와 설움이야말로 더 큰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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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따뜻한 어깨에 기대어 ..


가르시아가 현실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허구가 더 큰 진실을 드러낸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마술적 사실주의를 활용했듯이, <화니와 알렉산더>도 연극과 삶이 뒤섞이고, 죽은 사람의 유령이 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등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려지고 침투하는 방식이 활용된다. 또한 주인공 알렉산더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허구의 힘을 빌린다. 죽은 아버지의 유령과 대화하기도 하고, 폭력적인 새아버지의 권위에 맞서 그가 전처와 딸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한다.


알렉산더에게 예술은 비단 고통스러운 삶의 도피처일 뿐 아니라, 더 큰 진실을 보여주는 통로가 된다. 어린 소년에게 삶은 억압적이고 갑갑한 밀실이지만, 예술은 광활하고 아름다운 진실을 보여주는 열린 창이 되어준다. 실제로 잉마르 베리만은 엄격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종교와 권위에 답답함을 느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사랑이 결여된, 권위적 형식만 남은 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의 영화들은 '신의 부재와 침묵'을 주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아마 그는 신이 침묵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 예술을 택했을 것이다. 예술이 그에겐 종교이자 구원이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차디찬 현실이 닥칠 땐, 기댈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 혹은 환상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종교의 품에 안길 것이고, 잉마르 베리만에겐 '예술'이 따뜻한 어깨를 내어줬던 게 아닐까.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부조리한 현실을 날 것 그대로 직면하는 건,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에게 현실의 도피처가 되어줬을 뿐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고통과 내면을 드러내고 더 큰 진실을 보여주는 창이 되어주었다. 실제로 그는 융의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았고, '꿈과 환상'이 인간의 무의식과 진실을 더 깊게 반영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에게 예술은 곧 구원이고, 종교이고, '진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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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예술이란 ...


감각의 우주 ?


나에게 예술은 무엇일까. 내가 글을 쓸 때, 사랑할 때만큼 '솔직'해진다고 느끼는 건, 가장 깊은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 같다. 지구의 내핵을 목격할 때까지 땅을 판다는 심정으로, 더 깊이, 더 깊이. 더 낮은 곳에 웅크린 진실을 파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사실 많은 경우에 문장을 무겁게 하는 미사여구와 수식어들이 진실을 은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스로의 무지함을 감추기 위해 복잡한 어휘 뒤에 숨고 있지만, 나날이 내 문장이 가벼워질 것을 믿는다.


최근에 하라켄야의 <디자인의 디자인>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그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인간의 감각과 감정의 세계가 우주만큼 무궁무진하다는 재밌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세상에 대해서는 많은 사실 증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감각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은 정말 예리하고 디테일한 시선과 감각이 있어야 포착하고 느낄 수 있다. 내가 꾸준히 예술과 글쓰기를 훈련하는 것도,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다. 이런 훈련이 스스로에게 무한한 감각의 세계를 열어줄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의 공부가 깊어질수록, 특히 예술을 공부하고 향유할수록, 세상을 보다 '디테일하게' 감각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걸 걸 작지만 매일매일 느끼고 있다. 삶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재미! 이것이 내가 예술을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감각을 더 날카롭게 갈고닦아,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감각의 우주'의 지도를 그리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돈은 안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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