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제였던가."
유명한 이방인의 첫 문장. 냉혹하고 서늘하다.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파렴치하다', '비인간적이다'라며 숙덕거린다. 이후 그가 아랍인을 죽이고 재판장에 끌려갔을 때도,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문제시된다.
삶의 무의미와 불교의 공사상
불교미술을 공부하다 보면 부처의 열반을 그린 회화를 종종 보게 된다. 특이한 점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들은 부처의 죽음에 대해 눈물 흘리지 않고 담담한 모습이지만, 무지한 중생들은 오열하고 감정이 격해진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보살들에게 있어 삶이란 고통스러운 허상일 뿐. 부처가 마침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무로 돌아가게 되었음을 이해하기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다.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삶의 '무의미함'은 불교의 공사상과 닮았다. 공사상은 삶이 '공하다', 즉 텅 비었다는 것. 불교미술 교수님께서는 늘 삶이란 일종의 '연극'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무한하고 광막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삶이란 민들레 홀씨 만큼 사소한 것일지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울고 웃고 때론 비참하게 하는 사랑도, 죽음도, 역사도 모두 다 허상이고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소한 삶의 문제들에 구태여 눈물 흘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뫼르소는 왜 눈물 흘리지 않는가
뫼르소는 삶의 공한 본질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 흘릴 이유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어머니도, 자신도, 사랑하는 여자도, 결국은 모두 텅빈 '무'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담담함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깨달음의 징표일 수 있다.
뫼르소의 시선에서, 인간사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에 격한 감정을 토로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억지스런 연극이자 가식이다. 삶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멀어지고 회피하려는 어리석은 몸부림. 그에게 있어선 사랑도, 결혼도, 어머니의 죽음도 인간들이 삶의 무의미를 버티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소꿉놀이에 불과하지 않기에, 무관심하고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사회의 가증스런 연극에 동참하지 않고, 감정을 연기하지도 않고, 정직하게 삶의 공하고 무의미한 본질을 응시하고자 한다.
카뮈는 삶의 '허무함'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무의미한 삶을 체념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삶일지라도, 정면으로 응시하고 마주서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꿋꿋하고 정직하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부처럼, 구태여 삶의 의미를 어거지로 만들지 않고, 거기에 매달리지도 않고. 연기하지도 않고. 그저 무의미한 삶을 묵묵히 살아나가는 굳건한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이방인,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약 40년 뒤의 소설인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무의미한 삶과 그를 견디는 인간 존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카뮈가 '무의미 속에서도 정직하고 굳건하게 살아가는 나'를 해답으로 제시했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를 거부한다. 쿤데라는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모더니즘을 거부하고, 모든 해답이 상대적이고 진리가 아닐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의미 속에서도 정직하고 굳건하게 살아가는 나' 조차 허상일 뿐임을 지적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서 '나'라는 개념은 해체된다. 실존주의 문학은 어지럽고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도 고체처럼 단단한 '나'를 이야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고정적인 '나'는 존재하지 않다고 말하며 자아를 해체하고 액체화한다.
두 소설의 세계 인식은 비슷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완전히 다른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카뮈가 무의미 속에서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나를 그렸다면, 쿤데라는 무의미 속에서 거듭 방황하고 혼란스러운 연약한 인간을 그린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카뮈는 인간사의 온갖 논리와 규범이 허구라고 고발하면서, 이에 대한 해답으로 굳건한 자아라는 또다른 허구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듯하다. 그저 무의미의 혼돈과 부조리 속에 마무리되는 쿤데라의 이야기가 보다 진실하게 느껴진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뫼르소의 삶은 '가벼움'의 극단에 있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두 다리를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채, 무의미의 노래를 부르며 여기저기 부유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세속의 번민을 떠나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보살의 삶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사는 존재이다. 지나치게 '가벼운' 삶의 태도는 현실을 경시하고 삶에 몰입하지 못하게 한다.
반면 '무거운' 삶의 태도는 어떤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테레자의 삶은 '무거움'의 극단에 있는 삶으로 보인다. 인생의 다양한 문제들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고통과 번민에 휩싸인, 말하자면 불교에서 구제의 대상인 중생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삶에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중용의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시 해답은 중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