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통해 시간을 감각하는 법
우리는 흔히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러나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에서 이야기는 거의 말을 걸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멈춘 자리에 남는 것은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흐름, 그리고 지속의 감각이다.
허우 샤오시엔은 영화에서 “말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의 롱테이크, 카메라의 거리감, 시간의 느릿한 리듬은 우리가 시간과 감정을 느끼는 방식 자체를 전환시킨다. 이 글은 허우 샤오시엔이 어떻게 시간을 이미지로 감각하게 만드는지를 프레임, 시점, 서사의 빈칸 등을 중심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 허우 샤오시엔의 이야기 구조와 정지된 시간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에는 분명 서사가 있다. 하지만 관객은 그 서사를 따라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 자체를 거의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들—예컨대 ⟪비정성시⟫, ⟪연연풍진⟫, ⟪희생양⟫—에서 이야기의 기승전결은 흐릿하다. 극적 전환도 없다. 대사로 갈등을 설명하거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도 거의 없다.
대신 남는 것은 정지된 듯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그의 영화는 인물이 사건을 '겪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여운이 '머무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인물이 말을 멈추고, 화면 속에 고요히 앉아 있는 시간이 길게 지속된다. 그러는 동안 관객은 이야기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그 장면의 밀도 안에 머무는 감각을 익히게 된다.
이건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전환이다. 허우 샤오시엔은 이야기 대신, 시간을 이미지로 전환하는 방식을 택한다.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자리의 공기와 정적이 그의 영화에 남는다.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 장면만이 남는다.
— 롱테이크와 감정의 거리
허우 샤오시엔은 ‘보여주는 것’보다 ‘지켜보는 것’에 가까운 연출을 한다. 카메라는 대부분 고정되어 있고, 인물은 그 안에서 멀어지거나 사라진다. 관객은 인물의 감정에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 멀리서 그 감정을 유추해야 한다.
이는 단지 연출 방식의 차이가 아니다. 그는 감정을 직접 말하게 하지 않고, 감정이 지나가는 장면 자체를 보여준다. 말이 멈춘 자리, 대화가 끊긴 공간, 그 사이의 침묵. 관객은 인물의 감정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맴도는 공기를 느끼는 방식으로 감각하게 된다. 특히 롱테이크는 이 감정적 거리감을 극대화한다.
인물이 말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고, 카메라는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한다. 그 지속의 시간은 어떤 감정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 깊게 침투한다. 말보다 먼저 감정이 흐르고, 그 감정은 서사보다 오래 남는다.
허우 샤오시엔의 이미지는 그래서 ‘설명하지 않는 감정’을 보여준다. 감정이 프레임 안을 조용히 통과할 수 있도록, 그저 기다릴 뿐이다. 이 방식은 관객에게도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이야기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이미지 안에 머무르면서 감정이 머무는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 시선의 이동보다 지속의 감각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에서 프레임은 장면을 ‘구획하는’ 틀이라기보다, 시간이 흐르는 통로처럼 작동한다. 인물이 움직이지 않아도 프레임은 작동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그 장면은 계속된다. 카메라는 이동하거나 줌인하지 않는다. 그저 정지한 채로 한 공간을 오래 지켜본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움직임—예컨대 인물의 고개 돌림, 빛의 기울기, 창밖의 소음—은 시간의 흐름을 조용히 드러낸다. 이때 중요한 건, 프레임이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밀도를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이동하는 인물보다 머무는 인물, 변화하는 사건보다 지속되는 분위기가 중심이 된다. 인과와 목적의 흐름이 사라진 자리에 지각되지 않던 시간의 흐름이 드러나는 것이다. 허우 샤오시엔의 프레임은 그래서 공간을 가두는 틀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창이다. 관객은 그 창을 통해 시간을 보고, 이미지를 통해 감정의 리듬을 체험하게 된다.
4장. 관객은 기억을 본다
— 플래시백이 아닌 감정의 회귀 구조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에서 ‘기억’은 회상 장면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그는 시간의 전환을 표시하지 않고,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닌 감정의 회귀로 시간을 감각하게 만든다. 예컨대 ⟪비정성시⟫에서 관객은 어느 순간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모르게 된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정서의 밀도에 따라 출렁이는 감정의 층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서 인물은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 공간에 스며 있고, 관객은 그 감정을 지속적으로 겪으며 이야기보다 기억의 리듬을 따라가게 된다. 허우 샤오시엔은 플래시백처럼 인공적인 장치 없이도 한 장면을 통해 시간의 ‘되돌림’을 만든다.
그건 플롯의 반복이 아니라, 마음속에 남은 감정이 다시 떠오르는 방식에 가깝다. 이처럼 그의 영화는 기억이 구성되는 방식 자체를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이 어떻게 돌아오고, 그 감정이 어떻게 다시 몸에 스미는지를 본다.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사건을 따라가지 않고,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인물은 침묵 속에 머문다. 그러나 그 침묵의 프레임 안에는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은 어느 순간 감정이 되어 관객에게 스며든다.
우리는 그의 영화를 통해 플롯이나 설명 없이도 시간의 밀도와 감정의 여운을 경험한다. 이미지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고, 견디고, 가라앉는 방식으로. 이건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다. 감정을 쉽게 소비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그 감정을 스스로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태도.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는 시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다시 감각하는 방식’에 대한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