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모순. 사랑과 자유.
언니가 결혼을 한 달 앞두고 꿈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무수히 많은 작은 벌레들이었어.
징그러운 벌레들이 다리를 타고 기어올라
배를 뒤덮고, 두 팔을 새까맣게 감싸고, 마침내 얼굴까지 기어올랐어.
겁에 질려서 울부짖듯 오빠를 불렀어.
근데 오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어, "괜찮아. 별 일 아니야."
벌레들은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어.
목구멍을 새까맣게 뒤덮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결혼식 날 언니는 허리를 조인 코르셋이 답답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작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그녀의 이름 씨씨'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는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을 뒤로한 채, 자유를 찾아 거리로 나온 여성들을 그린다.
'집'은 안락함을 주는 동시에, 그녀들의 꿈과 자유를 속박하는 족쇄이기도 하다.
안식처이자 족쇄인, '집'
그 집에 갇힌 딸과 그녀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자유와 사랑.
둘은 양립할 수 없는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집을 떠나온 여성에게 '당신의 집은 어디입니까?' 물으니
'나는 계속해서 집을 찾고 있다. 방랑하는 이들 모두 결국 집을 찾고 있는 이들이다.'라고 답한다.
'집이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집을 찾기 위해' 떠난 것이라는 아이러니.
나는 결혼식 날 언니의 얼굴에서
무수히 많은 이름 모를 여자들의 얼굴을 겹쳐본 것 같다.
영화 <방랑자>는 한 젊은 여성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밭에서 의문의 시체가 발견되고, 그녀의 죽음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주인공 모나는 '거리 위의 방랑자'로, 자신에게 주어진 온갖 사회적 규범과 역할들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배낭을 멘 채 이 집 저 집에 몸을 의탁하며 거리를 떠돈다. 때론 길 위에서 만난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고, 그들이 정착을 제안하기도 하지만 거부한다. 사람들의 호의와 안정된 생활의 유혹도 그녀의 '방랑'을 막을 순 없다.
영화에서 모나는 철저히 '타자'로 그려진다. 카메라는 그녀와 교류했던 많은 인물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그녀는 많은 이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정의되지만, 한 번도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발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누군가에겐 '더럽고 무책임한 존재'이고, '게으른 사회의 실패자'이고, 때론 '자유와 저항의 아이콘'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모나를 해석하고 소비하며, 이 과정에서 모나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아닌 평가와 해석의 대상(객체)이 된다. 사람들은 모나에 대해 각기 다른 말을 하고, 모나는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알 수 없는 타자'로 남는다.
영화 <방랑자>는 '인간이 집 없이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No'로 응답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머물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외로움 속에 메말라 버리고 만다. 과연 모나는 '자유로웠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능동적인 자유를 선택했다기보단 사회로부터 소외된 것에 가깝다. 그녀는 자유롭고 싶었지만, 그 자유는 누구에게도 수용되지 않았고, 그녀는 스스로의 언어조차 갖지 못한 채, 사회가 기억하는 방식으로만 남는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철저히 외로운 '타자'였다.
'사랑'과 '자유'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두 가지 가치이다. 누구나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고 소속되길 원하지만, 동시에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갈망한다. 머무르고 휴식할 수 있는 '집'을 강하게 원하는 동시에, 그 집이 주는 답답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열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집에 대한 갈망과 거부.
때로 사랑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은 대게 '책임'을 요구하고, 이는 안정감을 주는 한편 나를 예속시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겐 사랑과 집이 필요하다. 사랑 없는 자유는 공허하며, 자유 없는 사랑은 나를 질식시킨다. 자유와 사랑이 모두 충족될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
결국 중요한 건 '적당한 거리감'이 아닐까. 식물마다 필요로 하는 물의 양이 다르듯,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거리감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타인과 빈틈없이 가까워지고자 하고, 누군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거리감보다 너무 가깝다고 느낄 때 자유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너무 멀어질 때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사랑과 자유는 결코 배타적이지 않다. 인간은 사랑과 자유가 모두 충족되는, 내가 필요로 하는 '거리감'이 유지되는 공간을 머무를 수 있는 '집'이라 느낀다. 충분히 사랑받으면서도, 나의 자유가 온전히 존중되는, 내가 나로서 사랑받을 수 있는 곳.
역사적으로 '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사랑이 충족되는 곳이 아니었던 듯 하다. 비단 여성 뿐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관계가 지속되다 보면, 사랑은 무뎌지고, 자유는 쉽게 침범된다. 처음엔 사랑과 안식의 공간이던 '집'이, 갈수록 역할과 책임만이 남은 족쇄로 변질되는 것은 주변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일이다.
'집'의 의미를 곱씹으며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나는 누군가의 집이었나. 당신의 집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