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베지터블 마스터] 中 5화
그런 아빠가 어느 날은 영어를 배우고 싶다며 어디선가 유치원생들이 보는 그림책을 가져오더니 매일 퇴근하면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아빠 나이에 영어는 배워서 뭐 하게?”
네다섯 살짜리 아이들이 보는 영어 그림책을 촤르르 펼쳐보았다. 왓츠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잭! 따위의 글과 사람같이 생긴 아기 쥐들이 귀엽게 앞니를 내보이고 있는 책이었다.
“그냥. 영어 잘하면 좋잖어.”
집이 무너지면서 그 좋아하던 친구도 안 만나고 모임도 안 나가며 일주일에 하루 쉬는 일요일이면 바닥에 깔린 요에서 시름시름 앓던 아빠가 몇 년 만에 처음 입 밖으로 낸 요청이었다.
열 페이지도 안 되는 자그마한 책을 내밀며 삐죽 웃던 아빠의 얼굴이 순간 내가 알던 예전의 그 같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일주일에 많으면 세 번 저녁 먹고 아빠와 접이식 책상 앞에 앉았다. 나와 동생이 아기 때 쓰던 접이식 플라스틱 책상이었다. ABC부터 써야 하는 거 아니냐는 아빠의 물음에 요즘엔 그렇게 안 한다며 핀잔을 주고 회화부터 시작했다.
아빠, 뜻을 자세히는 몰라도 일단 외워. 일단 입으로 뱉어. 그래야 늘어. the는 왜 자꾸 쓰는 거야? 아니, 여기에 쓰여 있길래. 무턱대고 the부터 붙이지 마. 문장을 통째로 외워서 써봐.
왜 사람들이 엄마들한테 자기 자식은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지 아빠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알게 됐다. 속이 터지다 못해 10분만 지나면 천불이 났다.
아니, 아빠! Wednesday의 d는 묵음이라니까?
웨드네스 데이가 아니라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아빠를 쳐다보면 아빠는 연필과 지우개를 양 손에 쥐고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다 보면 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재개발을 앞둬 하나둘씩 사람이 빠져나가던 그 집에서 우리가 소리 내 웃었던 시간은 영어 수업 시간이 유일했다.
아빠는 꽤나 열심이었다.
회식과 야근으로 수업을 하지 못했던 날에도 혼자 공책에 영어 단어를 썼다.
프루트, 플라워, 칠드런. 한 단어를 스무 번씩 쓰고도 다음 날 다시 써보라고 하면 꼭 철자 하나씩을 빼먹었다. 철자를 자꾸만 틀려도, 자꾸만 아무 데나 a와 the를 붙여도 우리는 열심히 공부했다. 몇 번 하고 그만두자고 할 줄 알았던 영어 수업을 우리는 1년 넘게 계속했고 1년이 지날 무렵 아빠는 나와 기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빠와 이십몇 년을 살면서도 잘 몰랐었는데 아빠의 어릴 적 꿈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일찌감치 대학 진학의 꿈은 포기했지만, 아빠는 옆구리에 두꺼운 영어 사전을 끼고 다니는 대학생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손가락 터치 몇 번만으로 금방 뜻과 원어민 발음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아빠는 항상 옆에 벽돌만 한 영어 사전을 두고 수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