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아이를 돌보다 보니 나의 건강 관리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지곤 한다. 그 때문일까, 정기 검진 주기에 맞춰 치과를 찾았더니 벌써 깊게 썩어버린 치아가 하나 있단다. 예상치 못한 충치 치료로 십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을 결제하고 나와,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다.
"아니 100세 시대라는데, 벌써 이가 이렇게 썩어서야 남은 70년을 대체 어떻게 살아?"
그러자 돌아온 우문현답.
"그냥 끝도 없이 고장 나면서 사는 거지. 옛날 같았으면 2~30년만 더 쓰면 될 치아를 70년 쓰는 거야. 40년은 플러스알파라고 생각하면 편해."
아주 지당하신 말씀이다.
치매는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질환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2000년에 이미 '나이가 들면 인지 기능에 저하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하니까, 치매라는 증상 자체는 인류와 언제나 함께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치매 환자의 돌봄 문제가 사회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데,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가장 큰 원인은 인간의 기대수명이 점차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첫 문단에서 다룬 내용과 궤를 같이 하는데, 그나마 치아는 관리 여하에 따라 양호히 보존될 가능성이라도 있는 반면, 치매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이 '연령의 증가'인지라 개인의 노력으로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고령일수록 유병률이 유의미하게 증가하며, 85세 이상에서는 무려 40%의 유병률을 보인다고 하니 백세 시대에 치매 환자가 어찌 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쩌면 우리 시대의 '장수(長壽)'는 그 자체로 축복이자 저주일지도 모른다.
아울러 초로기 치매 환자가 증가하는 추세도 한몫하는 듯하다. 우리 사회의 복지 정책은 대다수가 노년층을 주 타깃으로 삼고 있다. 이에 청년층 혹은 중장년층은 돌봄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은데, 전체 치매 환자 중 초로기 치매 환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발병 시기마저 빨라지고 있다고 하니 향후 중장년층 초로기 치매 환자 돌봄 문제가 심화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소가족화에 따른 가정 내 돌봄 인력 부재도 문제다. 옛날 한국 가정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자연스럽게 삼대가 한 지붕 아래 북적북적 살아가는 광경이 연상된다. 이처럼 과거에는 가정이 기본적으로 대가족의 형태였으므로, 가족 구성원들이 돌봄 노동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계에 따르면,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우리나라 전체 가구 중 약 70%가 2인 이하 가구라고 한다. 이러한 가구 규모 축소 현상은 주보호자에게 과중한 돌봄 부담을 지우게 되고, 그 결과 최근 우리 사회는 간병살인 · 노노간병 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다.
나 역시도 돌봄 부담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어머니의 주보호자는 아버지였으나,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면 내가 모든 일을 백업해야 했다. 두 분 사이에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었으므로. 새벽 기차로 경주에 내려갔다가 밤 기차로 서울에 복귀하기를 수십 차례, 도대체 이런 생활을 얼마나 더 지속해야 하나 절망스러웠다.
어머니의 치매로 힘들었던 몇 년간, 나는 ‘세상에 이렇게 힘든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같은 처지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까 싶어 시중에 출간된 치매 환자 가족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위로가 되는 날보다 울컥 화가 치솟는 날이 더 많았다. 주거를 함께하며 치매 노인을 보살핀 이야기, 가족 구성원들이 돌아가며 돌봄의 의무를 다했던 일화, 가족들의 노력에 부응해 환자가 긍정적으로 변화한 경험 등을 들려주고는 에세이 말미에 "여러분도 희망을 놓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던질 때면 속에 천불이 났다. 나는 당신보다 10년이나 일찍 이 일을 겪고 있다고, 내 직장과 본가는 400km나 떨어져 있는 데다 우리 가족은 환자를 포함해 고작 3명밖에 되질 않는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의 병에 대해 무덤덤하게 언급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나자, 나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은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친구가 본인 아버지의 치매 증상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글을 접한 적이 있는데, 그가 안쓰러워 눈물이 났다. 20대의 나에게도 청천벽력과 같았던 일이 그때의 나보다도 더 어린 친구들에게 벌어지고 있다니... 가엾고 딱해 그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끔 상황이 너무 절망적일 때는,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에게 벌어진 이 일이 내 업보로 인해 내려진 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확률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임을, 어쩌다 나에게도 찾아온 것임을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니까. '그게 왜 하필 나인가'라는 생각에 가끔 하늘이 야속하긴 해도 모든 원인을 나에게서 찾게 되는 자기혐오와 절망에 빠져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에.
끝으로, 내가 듣고 싶었던 위로의 말을 남기며 이 글을 맺으려 한다. 치매 환자의 가족이지만 당신의 인생도 소중하다고, 세상에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가족을 돌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타협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혹시라도 글을 읽고 계신 당신, 나와 같은 상황에 흘러 흘러 이 글까지 오게 된 것이라면, 부디 나의 글들이 당신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