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5_무색(無色)의 관계

부모-자녀 관계는 건강과도 같아서

by 두부맘

이 글을 클릭하신 당신께 여쭌다.

"당신의 기억 속, 어머니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지난 몇 년간 나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던졌던 질문이다.


처음 이 질문을 하게 된 건,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나와의 시간 중 어떤 순간을 제일 행복하게 느끼셨을까? 가장 행복해하셨던 그 순간을 재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가 가장 행복했었지?'

슬프게도 나는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려고 하면 되려 불화와 갈등으로 점철되었던 시기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돌보느라 폭풍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난 후, 글감 발굴을 위해 어렸을 적을 되돌아봤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 한 편에 코끼리가 뿅 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나쁜 기억은 넣어두자'라고 다짐할 때마다 잊고 있었던 상처나 과오가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만, 이전과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어머니 간병 당시에는 주로 내가 어머니의 속을 썩였던 사건들이 생각나 괴로웠던 반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과거 내게 깊은 상처가 되었던 어머니의 말씀과 행동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연신 흔들어댔다.


임신 후기 즈음에는 출산 후 진정으로 부모가 되면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기며 나쁜 기억들을 애써 외면하곤 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지 백 일이 지나도 여전히 달콤한 인생의 김선우(이병헌 扮)에 빙의하여 "저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따져 묻고 싶은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사소하게는 내가 아끼던 인형들을 언질도 없이 하루아침에 처분해 버리신 사건부터, 고작 초등학생이었던 내 앞에 락스를 따라 들이밀며 "같이 죽자"라는 발언을 하셨던 버거운 기억까지. 글을 쓰는 내내, 양가적인 감정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뜻밖에도, 이 기나긴 고뇌에 해답을 준 건 남편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주말 아침, 남편과 노는 아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어머니를 최악의 장면들로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워서였다. 육아가 많이 힘겹냐며 걱정하는 남편에게 나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고백하자, 남편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를 툭 건넸다.

"그랬구나. 그렇지만 어머님이 자기를 사랑하셨다는 건 자기도 잘 알잖아. 그게 중요한 거 아닐까?"


맞는 말이었다. 응어리진 마음에 짓눌리면서도, 어머니의 사랑을 의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가 정말 나쁜 양육자였다면, 그저 당신을 원망하기만 하면 되었을 테니 양가감정에 시달릴 일도 없었어야 했다.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라면 당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그 후 나는 더 이상 어머니와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잔잔하게 행복했던 기억들을 되새기려 노력 중이다. 어머니와 나 둘이서 생크림 케이크 한 판 먹기에 도전했다가 끝끝내 맞이하게 되었던 김치 엔딩이라든가, 함께 '도전 골든벨'을 시청하다 마지막 문제를 맞힌 나를 대견해하시던 어머니의 표정, 혹은 주기적으로 만들어주시던 쌀떡볶이와 야채 튀김 같은 것들 말이다.




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부정성 편향'을 가진다고 한다. 좋은 경험보다 나쁜 경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오래 기억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라나. 게다가 내가 원체 예민한 성격이다 보니, 분명 훨씬 많았을 어머니와의 소소한 행복들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불화만을 각인해 왔던 게 아닐까 싶다.


문득 가족 관계, 특히 부모 자식 관계는 건강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평소에는 무색의 배경처럼 느껴져 그 가치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 한 번의 균열로 삶 전체가 흔들리기도 한다는 점이, 그리고 좋은 상태를 지키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관심을 갖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꼭 닮아있다.


보통 글을 다 쓰고 나면 마감의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하는데, 이번 주는 유독 마음이 무겁다. 이 글을 써 내려가는 도중, 나 역시도 내 아이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기억되리라는 아주 두렵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내가 365일 중 364일 동안 완벽한 엄마였더라도, 단 하루의 과오가 아이의 기억을 뒤덮어버릴지도 모른다. 아이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도 아이에게 냉담한 모습을 보이거나 화를 내는 순간이 생기면 이를 몇 번이고 후회하며 더 또렷이 기억하게 될 거다. 깨달음을 얻은 이상 지금부터라도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아이에게 미안할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이 단순한 원칙을 지키기가... 솔직히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잘해봐야지 결심한다. 매일매일 엄마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엄마는 이제 너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너는 엄마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존재라고 속삭여주리라 다짐한다. 얼씨구, 마지막 문단을 쓰고 있는데 홈캠 속의 아이가 눈을 마구 비비며 꿈틀대기 시작한다.

아가, 곧 깨서 다시 재워달라 칭얼대겠구나. 오늘 밤은 엄마랑 꼭 끌어안고 푹 자자.

keyword
이전 15화#14_둥지를 떠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