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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다 Aug 03. 2021

이불

잊을 수 없는 선물

 실업은 면했다. 대학 4학년 2학기에 시작한 전일제 아르바이트 일이 졸업하면서 임시직으로 이어졌다. 부서도 바뀌었다. 한국현대문학전집을 만들던 문학부에서 국어사전부로.  그 당시 동아출판사 국어사전부에서는 1988년 1월 19일에 고시될 한글맞춤법 개정에 맞춰 시장에 낼 새 사전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입사한 1987년 3월 그 훨씬 전부터 국어사전부는 야근 체제로 일이 돌아가고 있었다.아침 아홉 시에 출근해서 밤 아홉 시까지 표제어 카드를 들고 ‘가’ 철제 서랍부터 ‘하’ 철제 서랍까지를 쉴새없이 오간 뒤 퇴근하려고 2호선 지하철에 오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서 할 일이라고는 잠자는 일밖에 없는 이런 생활, 이건 내가 원한 생활이 아니었는데.......

 

 따분했다. 1933년 이래 처음 개정되는 한글맞춤법이라고 해도, 내가 하는 일이 그것을 담는 역사적인 일이라고 해도 나는 일이 영 재미가 없었다. 순위고사 공고가 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립대 사범대를 나온 내가 교육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는 그거밖에 없었다.하지만 국립대 사대 졸업생 적체 문제가 원체 심각해서 한 해에 뽑는 국어 교사 수는 도별로 열 명 내외였다.

 8월 말쯤 공고가 났다. 서울 지역 국어과 열두 명. 절박한 심정으로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곧 좌절했다. 그만큼의 시간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9월 초엔가 나는 아버지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회사 근처에 방을 얻어 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석 달만이라도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고.

 

 방값은 월20만 원이었다. 보증금 없이 석 달치를 선불로 내는 방식이었다.  아버지한테는 힘에 부치는 돈이었다. 그 방에서 나는 어떻게든 합격을 위한 땀을 흘려야 했다. 그 방은 주인집의 부엌과 붙어 있는 방으로, 구조상 식모방에 해당하는 방이었다. 방의 크기는 누웠을 때 남는 공간이 옆으로나 아래위로나 일 미터가 채 되지 않는 정도였다. 창도 없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소리였다. 도마질 소리, 찌개 끓는 소리, 그릇 부시는 소리, 어린 딸이 제 엄마한테 치대는 소리, 그 딸한테 고함치는 젊은 엄마의 쇳소리.....

소리들을 이기느니 일찍 자고 일어나 책을 봐야겠다 해서 잠을 잤다가는 못 일어나기 일쑤였다.

 

 어느 새 시월이었다. 야근을 한 뒤 주인집 마루를 지나 부엌을 지나 시험지같이 작은 그 방에 몸을 들여 까무룩 잠들었다가 다시 부엌을 지나 마루를 지나 회사를 가는 생활이 계속됐다.

 공중전화로 집에 두어 번쯤 전화했다.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지내는 생활이었다. 같이 있을 땐 몰랐던 육친애가 전화선을 타고 느껴졌다.전화를 받는 사람이 엄마면 “엄마”, 아버지면 “아버지”하고 부르고는 훌쩍이느라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 느낌이 생소했다. 전화를 끊고 돌아서면 마음이 힘들었다. 전화를 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감상에 빠지면 부엌방 생활이 서러워질 테고, 그러노라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날이 선득해졌다. 퇴근하고 오면 연탄불이 죽어 있곤 했다. 주인집 젊은 여자는, 내가 죽은 불을 살리려고 마당에서 새 연탄과 번개탄을 붙여서 살려 보려 애쓰는 걸 보면서도 한 번도 탄불을 봐 주겠노라 말 한 적이 없었다. 붙임성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점심 시간에 잠깐 나와서 연탄불을 갈고 회사를 다시 들어갈망정 부탁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날도 야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방에 갔다. 문을 열었는데 큼직한 뭔가가 방을 그득 메우고 있는 게 보였다. 얼른 봐서는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발을 들이고 앉으니 그 덩어리가 내 앉은 키랑 같았다. 그것은 이불 보따리였다. 솜이불. 그것도 집에서 엄마랑 내가 덮었던 무거운 솜이불. 165센티미터의 아버지는 그 이불을 꽉꽉 누르고 꽁꽁 묶어서 57번 버스를 타고 구의역 지하철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 쇠막대기를 밀어내어 지하철을 타고 구로공단역의 그 긴 계단을 내려와서 독산동행 버스를 타고 이 방을 온 거다.

 

 나는 이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등을 말고 두 팔로 이불을 움켜쥐었다. 얼굴을 이불에 묻었다. 주인집 내외가 신경이 쓰였다. 울음 소리를 이불로 막아야 했다. 나는 그때까지 아버지한테 한 번도 선물이라는 걸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다섯 식구 어느 누구의 생일에도 서로가 알은척한 기억이 없는 삶이었으니 식구끼리 선물을 주고받을 때 드는 느낌을 알려야 알 수가 없었다. 그 날, 이불을 들고 집을 나섰던 아버지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홀로 지내는 딸이 밤에 옹송그리고 잘 걸 생각하니 힘들 것도 부끄러울 것도 모르는 그 마음이었을까. 이불이 나한테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선물이 될 거라는 걸 알기나 하셨을까. 이불 보따리와 같이 움직였을 자그마한 아버지 몸이 지워지지 않아서 그 밤에 나는 늦게서야 이불을 풀었다.   

 

 독산동 그 부엌방이 아직도 있을 리 없겠지. 네 살 때 일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신다는 아버지는 그 터를 찾아내실 거 같다. 그 날 내가 아버지가 놓고 가신 이불 보따리 때문에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는지 아버지는 모르신다. 아버지 역시 그 날 이불을 놓고 갈 때의 마음을 얘기하신 적이 없다. 그러니 아버지랑 나는 쌤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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