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다 Aug 03. 2021

운동장

잊을 수 없는 공간

 등록금이 마련되지 않았다. 1984년 봄. 휴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초등학교 때 하루, 중학교 때 하루 결석한 것 말고는 13년 간 학교를 쉬어 본 적이 없었다. 내 사회적 정체성은 ‘학생’이 다였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맞은 겨울. 아버지랑 엄마는 하루종일 단칸방 문고리에 가죽 띠를 묶고 허리띠를 엮었다. 하나 완성하면 80원. 두 분이 그렇게 내 등록금을 만드는 걸 보고 있자니 괴로웠다. 뭐라도 해야 했다. 무작정 집을 나와 전철을 탔다. 종로 거리를 걷다가 ‘아르바이트생 구함’이라고 써 붙인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근무 시간이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인데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다음날부터 하겠다고 했다. 그 날 저녁 남자 친구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그가 펄쩍 뛰었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정말로 모르느냐고 했다. 몸을 파는 일이라는 말을 듣고는 주저앉았다. 결국 그 겨울에 나는 돈을 벌지 못했고 아버지랑 엄마도 등록금만큼의 허리띠를 엮지 못했다.


 은행 융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장기융자는 다 나갔고 단기융자만 가능하다고 했다. 등록금 전액 47만 원을 융자 받고 그 달부터 매달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가는 방식이었다. 갚는 건 어떻게든 내가 해 보겠으나 문제는 보증인을 세우는 거였다.       아버지는 여러 날을 두고 지인들한테 부탁해 보았으나 거절당하는 모양이었다. 등록 마감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날, 마지막 카드인 양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왕십리 당숙 가게에 가 보라고. 아버지는 평소에 그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했었다. 살려달라며 두 번씩이나 거액을 가져가놓고 나몰라라 하는 그는 동기간이 아니라 원수라고 했다. 그에게 보증 부탁을 하셨으니 그 심정을 알 만했다. 자양동 집을 나와 왕십리를 갔다. 내리막길 왼쪽에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현대전파사’가 보였다. 가게에 들어가니 가겟방에 명옥이 언니만 있었다. 언니는 자기 아버지가 갑자기 볼일이 있어 나갔는데 언제 들어올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둑한 방에 엉거주춤 앉아 한 시간여를 기다렸다. 당숙은 오지 않았다. 언니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니네 아버지는 능력도 안 되면서 딸내미를 무슨 대학을 보내갖고......”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당숙이 일부러 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게를 나왔다.

 

 가게 앞 건너편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시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다. “아버지.”하고 첫말을 떼고 나니 목이 메었다. “....안 오세요. 지금까지 기다리다 나왔어요.”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아버지한테 내 대학 입학은 아버지 그간 삶의 노고에 대한 표창장 같은 거였으리라. 내가 네 살 때 여주의 기름진 논밭을 팔고 서울행을 선택한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고 했다. 당신 무학의 설움을 씻는 방법으로 자식들을 서울에서 가르치는 것. 서울 정착금이었던 돈을 두 번이나 가져가 가게를 차린 자신의 사촌형이 오늘 자신의 딸을 외면했다. 나는 아버지 입에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다는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니가 힘들더라도 올해는 쉬어야겠다.” 그 말이 떨어지자 알았다. 몇 달 동안 내가 두려워한 말이 그 말이었다는 것을. 이제 정해졌다. 나는 더이상 학생이 아니다. 학생이 아닌 나는 누구지.   

 

 턱!하고 길이 끊긴 것 같았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왔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난감했다. 집은 아니었다. 나란히 앉아 허리띠를 짜는 부부가 있는 단칸방. 그 남루함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숨을 곳이자 안길 곳. 그 곳이 어디일까. 어쩌다 그 곳이 생각났을까. 나는 걷기 시작했다.


 동명국민학교였다. 내 인생 최초의 학교. 마장동을 들어섰다. 운동장이 보였다. 1학년 꼬마들이 구령대를 보고 반별로 줄 서 있었다. 나는 구령대 반대쪽에 있는 스탠드에 앉았다. 꼬마들이 저 멀리 보였다. 운동장은 지잉징 울려대는 확성기 소리로 찼다가 비워졌다가 했다. “옆으로 나란히! 양팔을 벌려 봐요.....자 이제 노래 소리에 맞춰 율동하면서 노래 부르는 거예요.” 노래가 나오자 아이들의 양팔이 출렁거렸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 무연히 그 움직임을 봤다.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가 운동장이 빌 때까지 앉아 있었다.

 

 간혹 읍면 단위 마을의 초등학교를 지나칠 때가 있다. 그 시간이 하교 후여서 운동장이 비어 있을 때, 나는 그 곳에 훅하고 들어가고 싶다. 스탠드에 앉아서, 햇볕을 받아 백사장 같아 보이는 운동장을 바라보고 싶다. 여건이 될 땐 그러기도 했다. 머물고 있노라면 그런 기분이 들었다. 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분. 그 때까지의 삶을 갈아엎고 다른 씨앗을 심어 돌보고 싶어지는 기분. 33년 저쪽 그 봄날에 내가 앉아 있었던 운동장. 동요와 양팔들의 출렁거림.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서 천천히 차올라왔던 슬픔. 운동장을 떠나 집으로 오는 동안 천천히 올라왔던 기운. 더 봐야겠다. 그 날 그 운동장의 무엇이 나를 안정시키고 새 걸음을 걷게 했는지.

작가의 이전글 이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