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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다 Aug 03. 2021

오두막

잊을 수 없는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이요.” “고흐의?” “네.” “그 그림을 좋아해서 무슨 행동을 하셨어요?” 사람들이 무슨 그림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 지인이 내 질문에 답했고 나는 그 답에 꼬리를 달았다. 나는 그림에 문외한이다. 좋아하는 대상이 ‘그림’이 될 때 어떤 행동이 따르는지까지 들어야 그림을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알 거 같았다. “갖고 있다가 친구한테 줬어요.” “네? 좋아하는 남자를 여자 친구한테 줄 수 있나요?” 나도 모르게 반문한 뒤 내가 왜 그런 비유까지를 들어가며 놀랐나를 생각해 보았다. 그림은 나한테 숭고한 예술이다. 세상을 만나는 심경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사람, 투기 목적이 아니라 걸어 두고 보려고 큰돈을 쓰는 사람, 오직 원본을 보려는 마음 하나로 타국까지 발품을 파는 사람 들을 우러러본 만큼 나는, 어느 그림 하나를 특별히 좋아한다면 그 행동이 남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런 내가 접근하기 편한 미술이 그림책이었다. 그림책의 그림은 글과 같이 있어 이해하기 쉽고 원본이 아니라는 찝찝함이 없이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이 역시 예술인지라 심미안이 부족한 내가 그걸 보며 깊게 감동하기는 어려웠다. 그림 작가가 색채와 선으로 나한테 걸어오는 말에 귀기울이기보다는 그저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마음이 순해지는 걸 즐기는 수준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 그림책 두 장을 찢었다. 두 면을 나란히 놓아 그림을 맞춰 붙인 뒤 선 키의 눈 높이에 해당하는 벽에 그림을 고정했다. 그림책 한 권을 훼손할 가치가 있다고 본 그 그림은 존 버닝햄의 <크리스마스 선물> 36, 37쪽 두 쪽에 걸쳐 펼쳐진 그림이었다.

 

 그림 크기는 두 면을 합친 크기로 가로 52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이다. 두 면은 사진 질감의 청록색으로 꽉 차 있다. 첫새벽의 빛깔이다.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이 천지는 여명으로 점령당했다. 해를 품은 실구름과 오두막의 연기가 흰 빛이지만 청록의 기세에 흠을 낼 만큼은 아니다. 청록을 배경으로 하고 존재하는 사물은 딱 둘. 36쪽의 중앙에 가로6센티미터 세로 3센티미터 크기로 오두막 하나가 있고, 37쪽 오른쪽 아래에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2.5센티미터 크기로 산타할아버지가 있다. 산타할아버지는 빨간색 외투에 줄무늬 잠옷 바지, 검은색 장화 차림을 하고 있다. 몹시 지쳐 보인다. 허리를 앞쪽으로 말아서 한 걸음 한 걸음 오두막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오두막은 나무집이다. 지붕은 눈이 덮였는지 하얗다. 오두막과 산타할아버지의 사이는 25센티미터. 전체 길이의 절반 길이이다.

 

 산타할아버지는 롤리폴리 산꼭대기에 다녀오는 길이다. 거기 오두막에 사는 하비 슬럼펜버거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오는 길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을 다 돌리고 아픈 순록 한 마리를 재운 뒤 막 자려는데, 침대 발치에 선물 하나가 남아 있었다. 바로 가난한 하비 슬럼펜버거에게 줄 선물이었다. 깜짝 놀란 산타할아버지는 황급히 잠옷 위에 외투를 걸친 뒤 순록도 없이 먼 길을 떠났고 그 추운 겨울밤에 다섯 조력자들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하비 슬럼펜버거의 양말에 선물을 넣을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기던 내 손이 멎은 장면은 바로 그 다다음 장면이었다. 산타할아버지가 갖가지 탈것을 타고 또 다시 집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장면 다음에 나온 장면. 저만치 집을 앞두고 한 발짝씩 발을 떼고 있는 산타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앞에 있는 굴뚝 있는 오두막. 그 둘을 감싸안은 청록빛 새벽 세상. 벽에 붙여놓은 그 그림을 눈에 들이며 나는 조곤조곤 속말을 하곤 했다. 고단하지만 괜찮아. 집에 다 왔잖아.

 

 예술이 뭔지 내 알 바 아니지만 이따금 내 수준에서 예술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 경험을 안겨주는 예술이 이거다라거나 그 속성이 대략 이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런저런 창작물 앞에서 느닷없이 목덜미를 잡아채이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아마도 그 때가 내가 예술을 알현하는 때가 아닌가 한다. 그 때 나는 ‘지금 여기’를 벗어난다. 홀연히 ‘그 때 거기’나 ‘나중 거기’에 가 있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게 하는 힘, 모르긴 몰라도 예술이라면 그 힘을 지니고 있을 테다. 내가 그림책 속 그림을 낱장으로 떼어내 보고 또 보고 했던 것도 그 힘에 떼밀려서였을 거다. 내 삶이 산타할아버지의 그 날 노동에 겹쳐지면서 나는 산타할아버지보다 먼저 집에 가고 있었다. 무거운 다리를 쉬게 할 집이 저만치 보여서 다행이었다. 길 위에 있는 시간들이 너무 길어서 힘겹다 할 그 즈음 존 버닝햄의 그림은 나를 미래의 집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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